길었던 설 연휴가 지난 뒤에도 영어 교육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정책 때문에 영어 예비교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테솔(TESOL) 등 각종 '사교육 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인수위는 한 번의 공청회를 열었던 이후로 들끓는 사회적 논란을 외면하는 모양새다.
지난 12일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범국민교육연대 등 단체로 구성된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 대응 공동행동'은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현장의 눈으로 바라본 새정부 영어교육정책 해부와 대안'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토론회에서는 사범대 영어교육과 교수를 비롯해 현직 영어 교사들이 나와 인수위 영어 교육 정책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했다.
"인수위 정책, 이미 '실패' 맛본 낡은 정책"
토론자들은 인수위가 발표한 정책이 결코 '새로운 대안'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그 동안 교육 당국이 이와 비슷한 영어교육 정책을 계속 내놓았지만 영어 사교육 시장은 오히려 가열됐다는 것.
전국영어교사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홍완기 교사(서울 용산고)는 "영어 회화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홍완기 교사는 "영어 교육 대책을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은 교사 문제만 해결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사고와 교육 과정을 고치면 된다라는 식의 사고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이 같은 대안은 거의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며 "반복되는 논의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꼬집었다.
조진희 교사(서울 영일초)도 "TEE 또는 몰입교육(Immersion Education)은 이명박 정부가 만들어낸 새로운 정책이 결코 아니다"라며 "이는 '영어능력평가시험'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2006년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내놓은 <영어교육 혁신방안>의 핵심 사안은 '영어교사 양성방안'과 '영어능력인증시험'이다. 2005년 교육부가 발표한 '영어교육 활성화 5개년 종합대책'(2006~2010년) 추진 경과 보고에도 △'영어로 진행하는 영어수업(TEE)' 활성화 지원대책 수립(2000년 4월) △영어교사 심화연수 기본계획 수립(2003년 1월)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경감대책 수립(2004년 2월) 등 인수위 정책과 거의 유사한 정책이 실행됐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영어에 부여된 가치 걷어내지 않으면 사교육 줄지 않아"
한국의 영어교육 과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홍완기 교사는 "영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홍 교사는 "그런 합의는 결국 전 국민의 영어 사용 능력을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가 될 것"이라며 "그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초·중등학교에서는 어떤 영어를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인수위의 영어 교육정책은 사회적 합의 없이 오히려 '사회적 요구'라는 명분으로 필요 이상의 영어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영어에 대한 가수요 내지는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며 "영어교육이 올바른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수요와 요구를 현실성 있게 분석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이병민 교수(영어교육과) 역시 "단기간에 학교 교육의 틀로 영어교육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생각인지 알아야 한다"며 "그것은 우리 사회에 있는 내부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목고에서 영어점수가 1점이라도 우수하면 점수를 더 주는 현실, 영어정책이 결국 대학 자율화와 맞물려 또 다른 입시경쟁이 심해질 것이라는 현실,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이 엇박자를 이루는 현실 등을 인수위가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양화와 자율화의 모색을 축으로 학교별 다양한 영어교육 실험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현재 한국 영어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영어교사가 영어 수업을 해주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마치 정부가 나서서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현 정부가 3불은 안된다고 강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뿐만 아니라 사교육에 있어서는 영어에 지나치게 부여되어 있는 가치를 걷어내지 않으면 사교육 수요를 제어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학 입시와 취업 등 곳곳에서 영어 성적을 '필수 제출 항목'으로 요구하고, 심지어 영어 성적이 합격의 당락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사교육 시장이 줄어들기란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예일 대학 학생들도 좋은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 높은 점수를 딸 수 있는 학원 사교육을 받는 것이 현실"이라며 "특목고나 대학에서 영어를 통한 선발방식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학은 입학과 관련하여 별도의 영어능력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른 평가도구를 통해서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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