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공선옥은 세상 사람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얼굴에 닿는 햇볕과 습기만으로도 어디서 나리가 필지 알 수 있는 '초능력' 소녀였다. 여전히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것은 그 초능력의 흔적이리라.
공선옥은 삶의 지혜를 책에서 얻는다는 이른바 '배운' 사람의 말을 불신한다. 그가 얻은 대부분의 지혜는 대개 그의 어린 시절 자연과 함께한 경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선옥의 마음을 울린 책이 있다. 바로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공선옥은 이 책을 읽은 일을 "축복"이라고 표현했다.
"이 책은 서평 원고가 좀 늦어지더라도 천천히, 진정한 의미에서 저작(咀嚼)하듯이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었다. (…) 나는 그리고 뒤늦게나마 이제야 제대로 된 스승을 한 분 만난 기분이다. '정의(正義)의 길로', 어떻게 가느냐 하면, '비틀거리며' 가는 자발적(거룩한) 바보라니."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잔잔한 반향
석 달 전 출간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가 변변찮은 광고 한 번 없이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에서 1999년 나온 이 책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2001년이다. <녹색평론> 2001년 5-6월호(제58호)에 이 책의 한 장이 소개된 게 처음이었다. 당시 처음 이 책을 소개하고 7년 만에 완역을 한 김종철은 이렇게 회고한다.
"6년 전 이 책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고, 미국에서 주문한 책이 도착한 뒤, 나는 며칠 동안 밤낮 없이 골몰해서 읽고, 읽은 다음에는 여러 날 동안 나도 모르게 이 책에 관련해서 골똘한 생각에 빠져 지냈었다. 그때 나는 왜 이 책을 좀 더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이 미국에서 출판된 해가 1999년이었으니까, 실제로 나는 책이 발간된 직후에 읽은 셈이었지만, 그 때 내 기분이 그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나는 만약에 내가 이 책을 좀 더 젊었을 적에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극적으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한 정도로-달라졌을 것이라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만큼 이 책이 내게 준 충격은 강력했다."
"날이 갈수록 무지와 야만주의가 활개를 치고, 인간적인 가치들이 패퇴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자문할 때마다 늘 이 책은 큰 위안과 용기와 지혜를 주는 원천의 하나였다. 나는 빈번히 답변하기 어려운 난문(難問)에 부닥칠 때마다, 이런 경우 호이나키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자문해 보기도 했다.
(…) 3년 전 내가 평생의 직장이던 대학의 선생 노릇을 그만두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나는 '오늘날 가장 특권적인 직업'인 대학 교수의 자리를 버리고 궁벽한 시골의 농부가 되었던 호이나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외람된 말이지만, 어떤 근원적인 정신적 연대(連帶)를 생각하면서 부질없는 고립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삶 자체가 비틀거림의 연속이었는데…"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본 눈 밝은 독자는 적지 않았다. <녹색평론>에 이 책의 한 장이 소개되자마자 몇몇은 아예 원서를 찾았다. 당시 1년째 채식 중이던, 또 귀농을 준비하던 <문화일보> 김종락 기자도 그랬다. 6년 만에 호이나키의 책을 다시 읽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6년 동안 그는 채식을 그만뒀고, 10년째 망설이던 귀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녹색평론>에서 자주 보았음직한 이야기, 하지만 '비틀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나아간' 호이나키의 삶은 내게 많은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삶 자체가 비틀거림의 연속이었던 것은 그와 비슷하되, 나는 제자리에서 머뭇거리기만 했기 때문일까. 이미 앞서 나아간 그는 좌고우면, 머물러 있는 나를 채근하며 이렇게 질책한다."
"이렇게 길 떠나지 못해 다양한 구실을 마련하는 와중에도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에 완전히 눈을 감거나 진정한 삶에 대한 꿈이 사라지지 않은 건 끊임없이 호이나키 같은 이들이 잦아들어가는 내 의식을 일깨워주기 때문이었다. (…)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상황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내가 지금 여기서' 탈출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공선옥이 이 책에서 "근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소비주의 생활양식'에 물들지 않은 생활을 해오던 부모"를 떠올렸듯이 소설가 최성각도 아버지를 떠올렸다. "가족이 살 집을 손수 지었고, 그 집에서 아홉 형제를 낳아 기른", 전쟁 중에 국군이 어느 소녀를 능욕하는 짓을 막으려다 개머리판으로 죽을 만큼 맞고 석 달을 앓아누운 그 아버지 말이다.
"그의 아버지처럼 내 아버지 역시 억지로 생산되어 주입된 문화가 아니라 그 이전 '여러 세기를 걸친 경험으로부터 얻은 문화적, 도덕적 자세'로 한 생을 채우고, 대지 위에서 한 가장으로서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치르신 뒤 병원이 아닌 집에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다. (…) 그의 삶은 ('명사의 삶'이 아닌) '동사의 삶'이었다."
용기를 내 함께 정의의 길로 걷자
이 책은 올해 만 여든이 되는 미국의 지식인 리 호이나키가 평생 불의에 저항하며 정의로운 삶을 찾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앞서 소개한 독후감에서 알 수 있듯이 호이나키가 비틀거리면서 극복하고자 했던 삶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육아, 교육, 의료, 복지와 같은 온갖 근대 제도, 관행이 강요하는 '괴물'이다.
호이나키 스스로 '비틀거리며' 간다고 고백했듯이 그런 제도, 관행을 극복하고 정의로운 삶을 찾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가 말미에 소개한 애먼 헤너시의 용기는 이 길을 걷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헤너시의 용기를 가지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자유로운 삶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덕행의 가능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의 부유한 부문에 속해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포기는 너무나 극적이고, 너무나 겁나는 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몸을 결박하는 제도적 지원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물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어려운 길을 뒤따를 이들을 위해 호이나키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모방할 만한" 친구를 찾는 것이다. 공동체의 복원이야말로 각 개인이 현대 문명이 강요하는 온갖 불행의 길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지금 우리는 고독한 '탈주'가 아닌 공동체 '복원'이 필요하다. 2008년 어깨 걸고 비틀거리며 정의의 길을 걸어갈, 당신의 친구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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