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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인터뷰] 거리에서 두 번째 명절 맞는 코스콤 비정규직 박주현 씨

"여기 없는 거 없이 다 있는데 단 하나 없는 게 있어요. '위생'이예요."

그는 웃으면서 뜨거운 물을 부은 인스턴트 커피를 포장 비닐로 휘휘 저어 건넸다.

정말이지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앞 식당에는 없는 게 없었다. 플라스틱 용기에 가득 담긴 김치부터 프라이팬 등 각종 취사 도구와 식용유를 비롯한 온갖 조미료까지. 비록 천막 식당이긴 하나 여느 음식점의 주방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파업이 길어지면서 조합원들이 생활하는 천막과 별도로 '식당'을 만들었다. '투쟁'도 먹어야 하는 일이기에, 집으로 갖다 줄 생활비도 없는데 매번 밥을 사먹을 순 없는 일이기에 생각해 낸 것이 '밥 해먹기'다. 조합원 중에 전속 주방장도 따로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따끈한 명절 음식의 풍요를 느낄 이번 설 연휴에도 그는 '위생 하나만 없는' 이 식당에서 밥을 해 먹을 테다. "크리스마스가 내게 파업 127일차일 뿐"이었던 것처럼, 설 연휴도 그에게는 그저 "또 파업 날짜가 하나 더해지는 하루"일 뿐이기 때문이다.

설 연휴 분위기가 조금씩 번져가던 지난 4일, 증권선물거래소 앞에서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 박주현 씨(35)를 만났다.

유니텔이 신기했던, 그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이야기
▲ 설 연휴 분위기가 조금씩 번져가던 지난 4일, 증권선물거래소 앞에서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 박주현(35)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

추운 날씨에 오래 거리 농성을 하다 보니 코스콤 비정규직의 복장은 거의 똑같다. 검은 모자에 두툼한 점퍼, 여러 겹 껴입었을 것 같은 넉넉한 트레이닝복 바지까지. 아내와 여섯 살 딸아이를 둔 서른다섯 살 가장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주현 씨의 눈은 시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입대를 했다. 처음 컴퓨터란 물건을 손에 만져본 건 제대 즈음이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인 지금은 그 이름도 아련해진 '유니텔'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엄청 신기하더라고요. 재밌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대한 그해 전문대에 들어갔어요."

전공은 당연히 전자통신이었다. 더욱이 1990년대 중반 우리 사회는 IT 열풍으로 들끓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코스콤과의 인연은 1998년 아르바이트로 시작됐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식으로 입사를 했다.

물론 코스콤 정규직이 아닌, 도급업체 소속이었다. 당연히 도급이 뭔지는 알 리가 없었다. "그때는 솔직히 비정규직이라는 말도 잘 몰랐다"고 덧붙였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비단 주현 씨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코스콤의 도급업체로 입사해 코스콤의 일을 하던 조합원 대다수가 그랬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입사 10년 차네요."

돌이켜보면 억울한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 "어느덧 입사 10년차네요." 그는 웃었지만 웃는 얼굴 위로 천막에 걸린 "비정규직 차별 철폐" 구호가 선명히 보였다. ⓒ프레시안

그는 웃었지만 웃는 얼굴 위로 천막에 걸린 "비정규직 차별 철폐" 구호가 선명히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 것도 몰랐던 그가 생각하기에도 "억울한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언제 제일 처음 '이건 아닌데' 싶었을까?

"첫 월급 받자마자요."

면접 때 만난 코스콤 관계자는 140만 원 정도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정작 손에 쥔 돈은 겨우 92만 원이었다. 그때 자신에게 월급을 주던, 사무실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급업체로 전화를 걸었다. 한바탕 따지고 나니 바로 코스콤의 총무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첫 마디는 "그만두고 싶냐"였다.

외환위기 직후여서 취직조차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들어간 직장인데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때는 "계속 이러기야 하겠어. 조금씩 나아지겠지" 싶었단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난 10년 동안 월급은 딱 두 번 올랐다. 그마저도 10만 원에 한참을 못 미쳤다.

"언제부턴가 신입들이 들어오면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적당히 여기서 경력 쌓아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이제 와 후배들에게는 그렇게 말하지만, 본인은 쉽게 옮길 생각을 못했다. "이제는 평생 직장이라는 것도 옛말이 됐다지만 대학 졸업 후 만난 첫 직장"이었던 데다가, "5년을 넘기니 근속연수라는 것도 있어서 이직이 말처럼 쉽지 않기도" 했다.

비슷한 계통에서 일하는 대학 친구들을 봐도 이직이 만능은 아닌 듯 보였다. IT업계가 주목을 받으면서 인력이 워낙 많이 몰려 들었다. 게다가 워낙 하청에 재하청을 주는 하도급이 만연한 동네가 IT다. 주현 씨는 "어떤 곳은 공사장보다 하도급이 더 심하다"고 말했다. "4단계 하도급까지 봤다"면서.

"내가 노동자라는 것이 알면 알아갈수록 참 골치가 아파요"
▲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유니텔이 그저 신기해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도, 졸업 후 코스콤에 발을 딛었을 때도,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도 늘 "이럴 줄은 몰랐"단다. 그의 말처럼 "내가 아무 의식이 없어서" 몰랐던 일일까? ⓒ프레시안

그래서 더 바꾸고 싶었을까? 지난해 5월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얘기를 듣고는 "우리가 당하는 부당한 처사를 회사에 알릴 수 있는 통로가 될 테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회사가 이렇게 아무 말도 안 들어주고 우리는 시멘트 바닥 위에 앉아 있게 될 줄은 미처 몰랐죠."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유니텔이 그저 신기해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도, 졸업 후 코스콤에 발을 딛었을 때도,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도 늘 "이럴 줄은 몰랐"단다.

그의 말처럼 "내가 아무 의식이 없어서" 몰랐던 일일까? 혹은 코레일의 직접고용을 요구하고 있는 KTX승무원에 대한 일부의 시각처럼 "알고 들어가서 생떼 쓰는" 중일까? 취업을 앞두고 있는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들과 달리 도급과 파견의 차이, 비정규직의 범위를 잘 알고 있을까?

주현 씨는 얼마 전 나온 초중등학교 교장·교감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기사 얘기를 꺼냈다. 응답자의 97%가 학교의 노동교육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관련 기사 : 초중고 교장·교감 97% "학교 노동교육 필요") 국·영·수만 잘하면 된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근로계약이 뭔지,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에서 자신들이 받을 수 있는 보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터로 내몰리고 있다.

"노동자라는 것이, 내가 노동자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알면 알수록 참 골치가 아프고 억울하고 그래요."

애초부터 정규직이 되진 못했더라도, 코스콤 명함을 들고 똑같이 협력업체를 상대로 일을 하면서도 받는 월급 봉투 두께가 다른 것이 억울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편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고 도급업체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동료들도 그런 것일까? 증권노조 코스콤비정규직지부는 도급업체 소속 노동자 400여 명 가운데 90여 명만이 조합원으로 속해 있다. 주현 씨는 "그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내가 예전에 그랬듯 자기 위치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는 노동조합을 하면 들어오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 가압류, 당장 생계난을 너무 잘 알아서 못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노동조합 만들고 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아팠던 건 분당의 콜센터 비정규직이 대거 가입했다 며칠 만에 대거 탈퇴했을 때라고 털어놨다. 하는 일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임금 편차가 있지만 콜센터 비정규직의 임금은 겨우 80만 원이다.

"저보다, 우리 조합원 대다수보다 더 열악한 분들 인거죠. 그 분들 가운데 한 분이 노동조합을 탈퇴하면서 '나는 80만 원이라도 벌어야 해서…'라고 했을 때는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스스로 비정규직이면서도 "삐라 같다"며 외면하는 친구들
▲ 최근에 벌어지는 비정규직의 싸움이 대개 다 그렇지만 코스콤의 경우도 주현 씨처럼 IT업계에서 일하고 싶었을 뿐인, 평범한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 소위 '운동권'이 뭔지도 잘 모르고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프레시안

최근에 벌어지는 비정규직의 싸움이 대개 다 그렇지만 코스콤의 경우도 주현 씨처럼 IT업계에서 일하고 싶었을 뿐인, 평범한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 소위 '운동권'이 뭔지도 잘 모르고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도 자신이 직접 싸우기 전까지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주현 씨도 지난해 금속노조가 한미FTA 반대 파업을 할 때, "FTA랑 현대차노조랑 무슨 상관이라고 지들이 파업을 해?"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막상 노동조합 조합원이 되고, 아무 말도 못 듣는 체 하는 회사를 상대로 장기 파업을 하고 보니, 사람들의 그런 인식을 마주할 때면 답답하다.

코스콤비정규직지부는 최근 파업기금 마련을 위해 CMS 후원회원 모집을 시작했다. (☞관련 기사 : 코스콤 비정규직, CMS 후원 모집)

20년 지기 친구는 주현 씨가 보내준 후원회원 가입서를 보고는 "무슨 (북한에서 만든) 삐라 같아. 무서워서 못하겠어"라고 말했다. 후원금 때문이 아니었다. 왜 그 친구들은 우리를 그렇게 볼까가 궁금했다. 1시간도 넘게 전화선을 넘어 대화를 나눴다. "노동조합이 '빨갱이 집단'은 아니"라고 말했다. "너도 비정규직 아니냐"고도 말해봤다. 그런데도 결국 그 친구는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정년퇴직하고 1년 단위 계약직으로 버스 운전기사 일을 하는 아버지는 주현 씨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오래도록 파업만 하고 있는 아들이 영 못 마땅하기만 하다. "넌 뭐하는 자식이냐?"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도 비정규직 아니십니까?"고 말해봤지만 마음으로 지지를 얻어내긴 역부족이다. 결국 "구정 때까지만 좀 참아주세요"라고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주현 씨도 자신의 오늘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도 강 건너 불보듯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언제쯤 아빠도 다른 아빠들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해?"
▲ 여섯 살 난 딸에게 아빠는 보름 만에 한 번씩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보름 전에 집에 갔더니 딸이 "언제쯤이면 아빠도 다른 아빠들처럼 아침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해?"라고 물었다. ⓒ프레시안

그런데 구정이 지나면 나아질까? 노동부도, 국회의원도 불법파견이라고 했다. 코스콤이 실질적 사용자라고 볼 수 있다는 법원 판결도 나왔다. (☞관련 기사 : "코스콤, 현행법상 사용자 맞다", "노동부의 법률검토서도 전원 '고용의제' 적용 판단", 법원도 "코스콤이 사용자")

그런데도 회사는 꼼짝하지 않는다. "언제쯤 파업이 끝날 것 같아요?" 물었더니 주현 씨는 미래의 어느 날 대신 지금까지 어떻게 왔는지를 말했다.

"'한 달만, 한 달만 더 가보자'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다른 것보다 가족들이 힘들어할 때 저도 제일 힘들어요."

지난 2000년 결혼한 아내에게는 미안함이 많다. 결혼한 뒤에도 늘 100만 원 안팎의 월급만 가져다 줬으니 미안함은 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계에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가장이다.

여섯 살 난 딸에게 아빠는 보름 만에 한 번씩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보름 전에 집에 갔더니 딸이 "언제쯤이면 아빠도 다른 아빠들처럼 아침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해?"라고 물었다.

"어려도 눈치는 있나 봐요."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 달 만, 한 달만 더'가 몇 번이 반복되고 나면, 이 파업이 끝이 날까? 혹 주현 씨가 일터로 돌아간 뒤에 이들의 정규직화 요구를 보며 "쟤들은 왜 다 알고 들어가서 난리냐"고 혀를 차던 누군가가 또 이들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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