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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에 침묵한 대통령, 李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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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부패'에 침묵한 대통령, 李가 처음이다"

[인터뷰] 김정수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사무처장

"먼지에 절은 굴비보다 갓 뜬 생선회가 먼저 상한다."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사립학교법 개정을 놓고 여권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내뱉은 말이다. 젊고 개혁적인 세력이 나이 들고 보수적인 세력보다 더 쉽게 타락한다는 뜻이다. 이른 나이에 금배지를 단 386 정치인들을 비아냥거릴 때, 자주 쓰였던 표현이다.

정치적 공방 속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런 표현은 '부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랜 통념을 잘 보여준다. 뇌물을 받는 공직자를 가리켜 흔히 "부패했다, 썩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부패에 일찍 물든 이들이 차라리 낫다는 통념이다. "(뇌물을) 먹어본 놈이 더 적게 먹는다"라는 표현도 그래서 익숙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이들 역시 공직자의 '부패'가 좋은 일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먼지에 절은 굴비보다도 훨씬 오래 묵은 패배의식을 떨칠 수 없었을 따름이다. 많은 이들이 공직자의 부패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긴다.

'갓 뜬 생선회'를 탓하는 목소리는 그래서 나왔다. 젊은 권력자들이 관행을 잘 몰라서, 관행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받을까봐. 혹은 대중 앞에서 깨끗한 인상을 유지하고픈 욕심 때문에 뇌물에 상응하는 조치를 뒤로 미룰까봐. 신흥 권력 집단이 뇌물에 대한 '공정가격'을 뒤흔든다는 우려인 셈이다. 이런 우려가 두터울수록 '먼지에 절은 굴비'가 낫다는 통념도 단단해진다.

'먼지에 절은 굴비'가 낫다는 통념이 힘을 발휘한 게 이번 대선이었다. 이명박 당선인의 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거듭 나왔지만, 반향은 미미했다. 대신 "어차피 다 썩었는데…", "안 썩은 놈도 곧 썩을 텐데…", "능력이 있으니 썩었겠지. 음식도 맛있는 부분이 먼저 썩는 법이야", "썩지 않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어. 물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인다잖아" 등과 같은 중얼거림이 무성했다.

부패에 무관심한 당선인…허물 덮어두자는 <중앙일보>

오래된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이런 통념에 힘입어 대권을 잡은 까닭인지, 이명박 당선인은 여느 당선인과 달리 '부패 근절'을 이야기하는 데 인색했다. 대개 권력을 처음 잡은 이들은 "부패를 청산하고"라며 말 머리를 열기 마련인데, 이 당선인은 달랐다.

아예 대통령직 인수위는 공직자의 비리를 감찰하는 기구인 국가청렴위원회를 없애겠다고 밝혔다. 지난 10년 간 생겨난 각종 위원회 조직을 정리하겠다는 입장과 맞물린 것이지만, 새로 출범한 정부는 으레 '공직자 비리 척결'을 내세운다는 점을 떠올리면 아주 이례적이다.

언론은 한술 더 떴다. 지난 22일자 <중앙일보>는 "총리감이 없다고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이훈범 <중앙일보> 정치부문 차장은 이 칼럼에서 "대통령 당선인에게 그랬듯 과거의 허물은 덮어두고 인재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면 어떨지. 그들 손에 걸레를 들려줘 세상을 투명하게 닦을 임무를 맡기는 건 어떨지"라고 적었다. 이어 그는 "어찌 보면 온갖 부조리를 관행과 관례라는 이름으로 눈 감아온 게 우리 자신 아닌가. 그들이 그걸 즐겼지만 나도 (기회가 닿았으면) 마찬가지였을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새 정부를 구성할 이들의 어지간한 부패 전력은 그냥 덮어주자는 이야기다. "밭을 갈지 않아도, 기계를 돌리지 않아도 언론인이 끼니마다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는 이유는 밥을 나눠주는 권력을 감시하는 사람도 사회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포기한 언론까지 밥을 먹여가며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원초적인 질문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한국은 '부패의 함정'에 빠져 있다"

하지만 언론의 이런 태도에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거듭 강조하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도, 공직자의 부패에 대해 더욱 엄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래서 이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공직자의 부패를 막기 위한 대책에 인색해 보이는 당선인의 태도가 영 불안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경보음을 내지 않는 언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패 방지를 위한 사회적 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단체인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에서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김정수 씨도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이른바 '386세대'에 속한 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지금 '부패의 함정'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규제의 함정'에 빠져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당선인 측의 생각과 다르다. 그런데 '부패'와 양립할 수 없는 말이 '투명성'이다.

<중앙일보> 칼럼처럼 적당한 부패는 잠시 덮어두자고 이야기하는 측에서는 "맑은 물, 즉 투명한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김정수 씨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투명하고 깨끗한 물에서 사는 고기가 건강하다"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지금은 물고기가 모이지 않을까봐 걱정할 때가 아니라, 물고기의 건강을 염려할 때다. 병든 고기가 사는 물에 건강한 고기가 모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수 씨는 "투명성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다. 오히려 경제 성장을 위해 뛰는 이들의 발목을 가볍게 한다"고 말한다. "투명해야 투자도 유치할 수 있다"라는 말도 꼭 곁들인다. 이는 그가 모든 종류의 경제 성장을 배격하는 입장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투자 유치와 경제 성장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들도 때론 그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좀 다르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너무 적고, <중앙일보> 칼럼에 공감하는 이들은 아주 많다. 그를 만난 것은 그래서였다.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사무실에서 김정수 씨와 나눈 이야기를 간추려 정리했다.


"청렴위, 기업 부패 문제로 확대해야 할 판에 폐지라니"

프레시안 : 정부 조직 개편안이 논란을 낳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놓은 개편안에 따르면,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 행정심판위원회가 '국민권익위원회'로 통합돼 국무총리실 소속 기관이 된다.

김정수 : 매우 우려스럽다. 고충처리위와 감찰기관인 청렴위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기관을 한데 모아두면, 기존의 세 기관이 해 왔던 역할은 모두 위축될 것이다.

부패방지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청렴위의 역할을 더 강화돼야 한다. 물론 이런 입장이 기존의 청렴위를 무턱대고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청렴위는 전부 공무원으로만 구성돼 있다. 같은 위원회 조직인 국가인권위원회 등과 대조적이다. 인권위의 경우, 공무원 외에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출신도 다양하게 포함돼 있다. 청렴위가 객관적인 위치에서 감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인적 구성을 보다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기존의 청렴위가 갖고 있는 한계와도 관계가 있다. 공공부문의 부패 방지만을 다루고 있다는 한계다. 민간 부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치명적인 한계다.

최근의 삼성 사태에서 드러나듯, 사기업의 부패는 특정 기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사회 전체를 오염시킨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내부 고발자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유엔 반부패 협약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미 100여 개 국가가 비준한 이 협약을 한국은 비준하지 않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우선 청렴위가 독립기구로 유지되도록 하면서, 단순 감찰 기능을 넘어 민간과 공공 부문의 부패에 대한 폭넓은 조사 권한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세계적 추세도 이런 방향이다. 그런데 이명박 당선인 측은 이와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의로운 사람만 내부 고발자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 : 내부 고발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 역시 내부 고발자의 한 유형이다. 과거 조직의 비리를 내부에서 고발했던 이들은 "김 변호사는 그나마 처지가 낫다"고 이야기한다. 증언 내용이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 고발자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적인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매장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 김정수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사무총장. ⓒ프레시안

김정수 : 내부 고발자들은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그가 속한 조직의 내부 구성원이 아닌 외부인까지 이런 비난에 동조하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부 고발자들은 부당한 해고를 당해도, 맞서기 힘들었다. 또 재취업의 기회를 얻기도 어려웠다.

제도와 문화, 두 측면에서 살펴야 한다. 제도적으로는 내부 고발자가 보복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를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 보복의 성격을 띤 부당한 해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공적 기구가 내부 고발자의 전직(轉職)을 알선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조직에서 보이지 않는 따돌림을 당해서, 어떨 수 없이 직장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비슷한 업종에서 취업하는 게 무척 어렵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문화적 측면의 고려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내부 고발자는 배신자, 아니면 엄청난 용기를 지닌 의인(義人)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내부 고발자 역시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배신자도 아니지만, 유난히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의인도 아니다. 조직의 비리를 접한 사람이면, 누구나 내부 고발자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명박, 부패 근절 과제 앞에선 왜 머뭇거리나"

프레시안 :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당선인의 도덕성 문제가 논란이 됐다. 도덕적 의혹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당선인이 공직자 부패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까 걱정스럽다.

김정수 : 역대 어느 대통령이건 당선 직후, 혹은 취임 직후 공직자 비리 척결을 강조했다.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사를 검토해보면 알 수 있다. 부패 근절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당선인은 당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부패 문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삼성 사태에서도 드러나듯 공공 부문뿐 아니라 민간 부문의 부패도 심각한 상황 아닌가. 우려스럽다.

물론 역대 정권이 공직자 비리 척결을 강조한 맥락은 조금씩 달랐다. 군사정권의 경우, 공직자 부패 문제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한 측면이 강했다. 정당성 없는 정권이 공무원 길들이기의 용도로 활용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패 문제에 대해 '시스템'을 통해 풀기보다 '기강을 세운다'라는 발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부터는 '시스템'을 통한 접근이 시작됐다. 2001년 7월, 부패방지법을 제정됐다. 이 법에 근거해 이듬해 부패방지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기구는 2005년 개정된 법률에 따라 국가청렴위로 거듭났다. 이처럼 부패 문제에 대해 제도적인 접근이 시작됐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앞서도 언급했듯 민간 부문의 부패, 내부 고발자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등에 대한 제도적 접근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부분을 강화하면서, 국가기구의 청렴도와 사회 전체의 투명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그런데 인수위 방침을 보면, 새로 들어설 정부는 이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듯해서 몹시 걱정스럽다.

당선인 측은 규제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불필요한 규제도 많다. 이런 규제는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규제 완화를 외치는 분위기 속에서 '투명성' 보장을 위한 장치까지 사라질까 두렵다. 경제 성장을 강조하는 입장에 선다 해도, 이런 상황은 우려스럽다.

이른바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 사회의 낮은 투명성이다. 투명성을 높이자는 주장이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다. 그 반대다.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부패와 불투명성이다.

이는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1위 수준이다. 반면 공직자의 청렴도 순위는 43위다. 금융 투명성은 60위권이다. 이것만 봐도, 이른바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청렴도와 투명성을 높이자는 주장은 이념이나 정파와는 무관하다. 새로 들어설 정권이 지난 10년과 다른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해도, 청렴도와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과제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

"투명해야 투자도 한다"…"부패 근절은 좌파만의 과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이명박 당선인 측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듯하다. 정부의 규모와 부패 문제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김정수 : 외국의 경우를 봐도, 공공 부문의 확대를 주장하는 좌파가 집권하건 민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우파가 집권하건 부패 해결 문제에 대한 관심이 느슨해진 적은 없다. 오히려 정부의 규모가 작아지고, 민간 부문이 활성화될수록 투명성 강화는 더 중요해진다. 돈이 엉뚱한 데로 새지 않고, 제대로 쓰이는지 투명하게 드러나야 투자도 할 것 아닌가. 투명해야 투자도 이뤄진다.

핀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등은 이른바 국가 경쟁력 지수 평가에서 늘 최상위권으로 꼽히는 나라들이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을 보면, 임금 수준이 매우 높다. 그리고 환경 보호를 위한 규제도 엄격하다. 그런데 왜 경쟁력 평가에서 1, 2위를 다투는 걸까. 사회의 높은 투명성이 원인이다. 정부와 기업을 믿을 수 있으니까,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다. 투명하니까, 사회에 유통되는 정보의 질과 정확성이 높다. 그래서 의사결정도 합리적으로 이뤄진다.

새로 들어설 정부는 한국의 경쟁력이 낮은 원인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부패를 없애고 투명성을 높이는 과제는 진보·좌파 진영만의 의제가 아니다. 경쟁력을 중시하는 보수 진영도 관심을 쏟아야 하는 과제다.

그래야만 부패 문제에 대해 일관성을 갖고 대응할 수 있다. 이런 일관성이 중요한 이유는 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투명성과 청렴도가 높은 나라들 역시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부가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부패 근절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기에 가능했다. 홍콩의 경우, 1960년대까지 공공부문의 부패가 극심했다. 범죄자들에게 뇌물을 받는 홍콩 경찰의 관행은 유명했다. 1970년대 들어 홍콩 정부가 이런 부패 관행에 칼을 들이댔다. 염전공서라는 공공부문 비리 감찰 기구를 설치하고, 강력한 힘을 실었다. 물론 뿌리 깊은 부패 관행을 없애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 수준의 청렴도를 확보하는데 약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는 한 번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밀어붙였다.

한국 정부가 사회의 투명성과 공공 부문의 청렴도를 높이기 위한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인 첫 번째 계기는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이었다. 이 당시부터 계산해도, 채 15년이 안 됐다. 부패방지위원회 설치부터 계산하면, 6년이 안 됐다.

홍콩처럼 작은 나라에서 부패 문제를 푸는데 20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벌써 고삐를 늦추겠다고 한다면, 과거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냉전 이후 창궐한 국제 테러 조직, 부패를 먹고 자란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과거의 관행을 적용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변화를 겪었다. 더 이상 '요소 투입 증대'를 통한 성장을 꾀할 단계가 아니다. 부패를 적당히 묵인하면서, 노동자를 쥐어짜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는 경제체제가 돼 버렸다.

게다가 한국을 둘러싼 외부 환경도 변했다. 부패 근절 문제는 특정 정부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공공 부문 부패 문제는 국제 사회의 주요 과제가 됐다.

동구권이 붕괴되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무력의 국가 독점 상태도 끝났다.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테러조직이 무기를 구입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이 주로 마약 거래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약 거래는 부패한 정부에서 확산된다. 깨끗하고 투명한 공권력이 집행되는 곳에서는 마약 시장이 확대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테러 조직이 무기를 살 수 있는 이유도 부패 때문이다. 부패한 관리가 암시장에 넘긴 무기가 이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테러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정부 부패를 없애기 위한 국제적 공조가 절실하다.

"부패 문제는 국제적 관심사"…제3세계 원조금 낭비의 교훈
▲ ⓒ프레시안

게다가 1990년대 이후, 세계은행이 제3세계 국가들에게 지원한 원조금의 사용 실태가 드러났다. 도로, 교량 등 사회 인프라 구축을 위해 지원한 돈인데, 해당 국가 정부가 엉뚱한 용도로 쓴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 동구권에도 이런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 제3세계의 부패한 정부를 계속 지원할 이유가 없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원조금의 투명한 사용은 국제적인 관심사가 됐다.

국가별 공공 부문 부패 지수에 국제 사회가 관심을 쏟게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유엔 반부패 협약을 100여 개 국가가 비준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 이 협약에 비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국제사회가 부패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쏟지 않았던 시기에 형성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낡은 관행에 안주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았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0년 전 관행으로 돌아가면, IMF 재앙 재발한다"

이명박 당선인 측이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10여 년 전의 낡은 관행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IMF 외환위기와 같은 재앙을 다시 겪게 된다. IMF 외환위기 직전에 발생한 한보 사태 등은 대표적인 권력형 비리였다. 권력과 재벌 사이에 뇌물이 오가는 속에서 잉태된 사건이라는 뜻이다.

어찌보면 1997년 외환위기는 '70년대의 복수'라고도 할 수 있다. 군사정권이 1960, 70년대에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믿음이 사회에 뿌리내렸다. 합리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거치는 일은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확산됐다.

하지만 과정을 생략하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중간에 치렀어야 할 비용을 나중에 물게 될 뿐이다. 투명한 제도와 문화를 정착시키려면 비용이 든다. 그리고 그 비용은 한창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1970년대에 치렀어야 했다. 그때 비용을 치르지 않았던 대가를 1997년에 치른 것이다.

대가를 제때 받지 못한 70년대가 90년대에 복수를 한 셈이다. 더 이상의 복수를 피하려면, 사회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겨우 10년 밖에 안 지났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빨리 지난 일을 잊은 듯하다.

"부패 근절하려면, 경제계 반발에 흔들리지 말아야"

프레시안 : 부패한 공공부문을 개혁한 홍콩 사례를 이야기했다. 또 부패 관행 속에서 잉태된 재앙인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제 위기를 부패 관행을 개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외국 사례를 좀 더 듣고 싶다.

김정수 : 미국 역시 20세기 초 대공황 이전에는 부패가 극심했다. 공공 부문과 민간 기업이 모두 썩었다. 주가 조작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래서 생겨난 게 증권거래위원회(SEC,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다. 증권시장을 감독하는 권한을 갖고 있으며, 준사법기구로서의 성격도 띠고 있는 강력한 기구다. 증권거래위원회가 생기면서, 금융 부문의 부패가 줄었다.

또 하나의 계기는 1976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처음 공개된 록히드 사건이다. 미국 군수업체인 록히드사가 공적자금으로 일본정부의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자민당의 간판이었던 다나카가쿠에이 전(前) 수상이 체포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겪으며, 미국은 기업 부패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했다. 외국 정부 관계자에게 뇌물을 준 행위에 대해서도 처벌하는 규정을 도입했다. 물론 당시 경제계의 반발은 거셌다. 수출국 정부에 대해 외국의 경쟁업체는 뇌물을 주고, 미국 업체만 주지 않는다면 미국 업체가 크게 불리해진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당시 미국 의회와 정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장점은 이런 부패 사건이 불거지면, 언론과 정치권이 제도 개혁을 통한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한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사회는 20세기 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해졌다.

최근 논란이 된 사례로는 클링턴 전(前) 미국 대통령이 아칸소 주지사였던 시절 힐러리가 받았던 변호사 수임료 문제를 들 수 있다. 힐러리가 아칸소 주에서 상당히 많은 사건을 수임했는데, 남편의 후광 때문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이런 논란에서 알 수 있듯, 미국 사회는 공직자의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다. 고위 공직자의 재산 관계가 투명해지지 않고서는 부패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한국과 비교할 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재산을 공개하면서 아들의 재산은 밝히지 않았다. 그랬더니 결국 아들에게서 문제가 생겼다. 이명박 당선인은 이런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생활 속 부패는 확 줄었는데, 대통령은 변하지 않는다면…"

프레시안 : 이명박 당선인은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재벌 가문에 속한 친·인척이 제법 있다. 그래서 우려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이런 친·인척 관계가 국정에 반영될 경우, 누가 정부 방침을 신뢰하겠느냐는 것이다.

김정수 : 선거 과정에서 이명박 당선인은 재산 관계를 투명하게 밝히겠다고 했다. 이런 약속이 거짓 없이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이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있을 때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상식을 당선인도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대선 결과에 대해 "국민들은 경제 성장을 원한다"라고 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맞는 말이겠지만, 조금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국민들의 진정한 바람은 "개처럼 벌어도 좋으니,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만 하면 된다"라는 게 아니다. 누구나 '웰빙'을 원하지 않는가. '개처럼'이 아니라,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겠다"는 게 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라고 본다.

이명박 당선인은 서울 시장 재직시절에도 이해 당사자들을 가까이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거대한 반발에 부딪힐 것이다.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한 조사기관이 무작위로 뽑은 대상자들에게 "실생활에서 뇌물을 준 경험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1%'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훨씬 낮지 않은가. "교통경찰에게 뇌물을 줬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직접 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체감하는 부패는 확실히 줄었다. 다만 재벌과 고위 공직자의 부패 문제가 충분히 해결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국민들이 재벌과 고위 공직자의 부패 문제에 민감한 것도 그래서다. 자신들은 과거보다 깨끗해졌는데, 권력을 쥔 자들은 여전히 썩었다면 불쾌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부패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런 문제가 또 생긴다면, 누구나 짜증이 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정부에 대한 극단적인 신뢰 상실로 이어진다.

"'신뢰 적자', 더 이상 늘리지 말자"

나는 '신뢰 적자'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돈을 벌고, 쓰는 과정에서만 흑자와 적자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믿음을 주고받는 관계에서도 흑자와 적자가 발생한다.

정부는 국민을 믿는데 국민은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면, '신뢰 적자' 상태다. 그리고 경제적인 적자와 달리 신뢰 적자는 흑자로 돌리기가 아주 힘들다.

정치권이 한 사례다. 십년 전과 비교하면, 정치권은 많이 깨끗해졌다. 이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십년 전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신뢰 적자'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렇게 어렵다.

정부와 국민 사이의 '신뢰 적자'는 이미 심각하다. 이런 적자가 이명박 정부에서 더 늘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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