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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강가에서 '5월 광주'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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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강가에서 '5월 광주'를 떠올리다"

[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1>]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라 쁠라따 강

청년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10개월 동안의 짧은 오토바이 여행이었다. 남아메리카 곳곳을 여행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손문상 화백과 박세열 <뉴스툰> 기자가 젊은 시절의 체 게바라가 오토바이로 누볐던 길을 그대로 밟는 여행을 떠났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해 칠레, 페루의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지역을 거쳐 콜럼비아, 베네수엘라, 쿠바로 이어지는 여행이다.

지난 20일, 여행을 시작한 손 화백과 박 기자가 첫 번째 글과 사진을 보내 왔다. 체 게바라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을 찾아간 이야기로 시작하는 글이다. 그러나 체 게바라의 흔적을 더듬는 게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손 화백의 카메라는 식민 통치와 독재를 거쳐온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남긴 상처를 비켜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처를 담은 박 기자의 글은 비슷한 과거사를 가진 우리에게 가시처럼 박혀 온다. 지구 반대 편에 있는 그들이 보낸 글과 사진을 소개한다. <편집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아침은 여유롭다. 더운 날씨라고는 하지만 서울의 지독한 열섬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딱 좋은 날이었다.

체 게바라가 살던 집엔 수퍼마켓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로까스 거리에 있는 체 게바라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찾았다. 기침하는 작은 아이는 이 곳으로 이사를 왔었다. 게바라가 처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와서 살았던 곳은 중국인이 하는 수퍼마켓으로 바뀌어 있었고, 두 번째로 이사를 왔던 집은 체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작고 오래된 평범한 건물이었다. 한 켠에는 게바라의 사진과 함께 이 곳이 작은 박물관임을 알리는 글이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척 봐도 사설 박물관인 듯 했다. 물론 거창한 기념관을 상상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해 조금 실망했다. 그리고(!) 문도 열리지 않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현재 휴가 기간을 맞아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이라 한다. 이 작은 박물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운영하는 사람이 휴가를 간 모양이었다. 2월 1일에나 다시 열게 된다니, 우린 운이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 로까스 거리에 있는 체 게바라가 살던 집. 현재는 사설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다. 이 곳 주인의 휴가 관계로 2월 1일에나 문을 연다고 한다. ⓒ손문상

우울한 시대, 화려한 건축…아름다운 수도궁

차를 타고 체 게바라가 다녔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립 의과대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수도국', 즉 한국으로 하면 수자원공사 쯤 되는 건물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정식 명칭은 빨라스 델라 아구아, 즉 '수도궁(水道宮)'쯤 될 것이다.

'궁(宮)' 이라니. 바로크 건축의 장엄함과 화려함에 남미 특유의 아기자기한 밝음이 어울린 건물이었다. 이 곳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과는 다른 특유의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 경인데, 마침 유럽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또 원주민 양식의 화려함이 섞여 건물이 화려해졌다고도 한다. 시대가 우울하면 건축은 지나치게 화려해진다.

무상의료, 무상교육…페론의 유산

아르헨티나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지만 정책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나라다. 이를테면 의료 서비스와 공교육은 무료로 제공되는데, 이를 '인민주의 체제'로 부르기도 한다.

신문지상에서 흔히 들어왔던 '페론식 포퓰리즘'이라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페로니즘의 특이한 점은 정치 경제 상황이 변함에 따라 끊임없이 정책 스타일을 변형시킴으로써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 1950년대 초반, 페론 집권 초기에는 당시 국가의 부를 좌지우지했던 '지주+수출부르조아지'에 대항해 '공업 부르조아지와 노동자 동맹'의 지지를 얻었다. 노동자와 사장님이 나란히 페론을 지지한 것이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유럽의 디저트' 역할을 하며 대 농장 지주의 배를 불려 부를 쌓아온 과정의 모순이 터져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노동자들은 페론을 열열히 지지했다.
▲ '페로니즘'과 페론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을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레꼴레따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그녀의 묘소와 방문객들. ⓒ손문상

진화하는 페론주의

페로니즘의 등장시기는 반제국주의 정서가 강했던 때였다. 이를 위해 계급 협력이 활발히 일어났던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NL처럼 '자주, 반제(自主, 反帝)'의 가치가 계급 대립의 구도를 넘어선 것이다. 이 점이 계급 대립의 전통적 구도의 형성을 막은 것이다.

현재 페로니즘은 1990년대 메넴 정권이 내걸었던, 소위 신자유주의를 품은 짝퉁 철학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한때 무소불위였던 IMF에 대한 상환을 거부함으로써 반신자유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음 말할 것도 없다. 페로니즘은 아르헨티나 특유의 정치, 경제 제도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다.

물론 문제가 도처에 널려있기도 하다. 살인적 실업률로 유명한 아르헨티나답게 이른바 '피케테로'라 불리우는 실업자 연맹의 맹공을 받고 있기도 하다.
▲ '5월 광장'(Plaza de Mayo)의 밤, 그리고 아르헨티나 국기를 만든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 기마상, 그 앞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저 멀리에는 1807년 영국군 격퇴를 기념하는 '5월 기념탑'이 보인다. ⓒ손문상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명동 쯤 되는 '레꼴레따' 거리에서 만난 어린 소년. ⓒ손문상

간밤(1월 22일)에 봤던, 마요 광장(오월 광장) 한 켠에 누더기처럼 널려 있던 수많은 피켓과 펼침막, 그리고 전단지들은 '새로운' 페로니즘에 대한 '새로운'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는 유물같은 것이기도 하다.

수출보다 국내 물가 안정이 우선

그래도 국가 기반 서비스를 주로 하는 복지 정책은 사람들의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한 국내 물가 안정을 위해 수출 억제책을 펼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방식이다.

이를테면 곡물가가 뛰고 있는 지금 수출세를 부과해 곡물의 국내 공급량을 안정시키도록 유도하는, 다소 무리한 방식으로 국내인들의 기본 생활을 보장해주기도 한다.

이런 정책들로 인해 한때 악명높았던 '카길 아르헨티나'와 같은 곡물 메이저들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

석유 역시 자급할 수 있을 정도의 생산량을 갖고 있지만 가격이 불안정할 때는 수출을 제한함으로써 국내 석유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책을 편다.

이는 아직까지 사람들이 페론이라는 이름 아래 전통적인 계급 구도를 와해시키는 인민주의의 전통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유가 안정책 거부한 셸, '침묵의 불매 카르텔'로 맞선 시민들

아르헨티나가 페론이라는 이름을 버리게 되는 날은 아마 수 십년이 흐른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명소 '꼴론 극장'. ⓒ손문상

▲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로사리오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손문상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석유제품 시장 점유율이 16%인 셸은 정부의 공급가 인하 정책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인 소비자들은 암묵적으로 셸을 거부하고 있다. 침묵의 불매 카르텔이다. 이 때문에 셸 매출은 30% 이상 떨어졌다고 한다.

지난 22일에는 에너지 판매연맹 (개인주유소연맹) 회장단이 아르헨티나에서 정부와 반목을 빚고 있는 셸의 깃발을 내리고 영업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정부의 유가 안정 정책이 대다수 국민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증거다.
▲ 로사리오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잇는 고속도로 변의 풍경. ⓒ손문상

▲ 고속도로 변의 작은 잡화상에서 만난 주인 아주머니와 아이들.ⓒ손문상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대에서 게바라의 흔적을 찾다

수도국을 지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과대학에 들렀다. 건물은 오래되고 낡았지만 운치가 있어 보였다. 이 대학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유명한 곳이라 한다. 칠레, 페루, 우루과이 등지는 물론이고 브라질과 멕시코에서까지 이곳에 유학을 온다.
▲ 체 게바라가 다녔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과대학 건물. ⓒ손문상

지금은 방학기간이라 학생들이 없는 텅 빈 복도를 걸었다.
▲ 의과대학 건물 내부 복도. 50년 전이나 딱히 바뀐 것은 없다. 체는 두꺼운 의학 서적을 들고 이 곳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평범한 대학시절을 보냈을 것이다.ⓒ손문상

정문 한편에는, 체 게바라의 딸이자 역시 의사인 일디타가 강연을 위해 이 곳을 방문한다는 대자보가 놓여 있었다. 지난해였던 체 게바라 서거 40주년을 기념한 특별 강연이었을 것이었다. 체 게바라의 흔적이다.

물론 큰 의미를 갖지 않는 작은 대자보일 뿐이지만 그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다.

체가 걸었을 복도, 계단, 그리고 그의 눈길이 머물렀을 학과 게시판들이 무질서하지만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곳 대학은 '교정'이랄 게 없다. 정문 밖은 곧바로 도로와 맞닿아 있고, 도로 건너편엔 예쁜 식민지풍 건축물과 잔디가 깔린 공원이 있었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이곳에서 그의 대학 생활은 어땠을까?

라 쁠라따 강에 던져진 사람들

우리는 라 쁠라따 강으로 향했다. 정복자에게 죽임을 당한 인디오들의 피가 흐르고 있어 붉은 빛을 띤다는 '은강(銀江)'.

라 쁠라따 강은 피와 인연이 많다. 소위 '야간비행' 또는 '죽음의 비행'이라는 이름으로 군정 시절 반체제주의자들로 낙인 찍혔던 이들이 무차별하게 내던져진 붉은 물살.

1969년에 시작된 국가 공권력 주도의 테러는 1982년 군정이 종식되고 알폰신 대통령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반체제 인사들에게 약을 먹인 후, 구금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이라 속인 후에, 비행기에 태워 라플라타 강에 버렸다. 버려진 자들은 발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고 영영 떠오르지 않을 붉은 심연으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무려 3만 명. 그 중 신원이 밝혀진 사람들은 불과 9천 명뿐이다.
▲ 인디오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붉은 빛을 띤다고 하는 라 쁠라따 강변에 있는 고급 낚시 클럽(Club de Pescadores). 1915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손문상

▲ 라 쁠라따 강이 보이는 낚시터. 붉은 강 바닥 아래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학살한 인디오의 시신이, 그리고 군사정권에 맞선 민주 인사들의 시신이 잠겼다. ⓒ손문상

"학살을 기억하라"

우리는 9천 명의 이름을 새기고 이들을 기념하는 공원인 '빠르께 데 라 메모리아'를 찾았다. 라 쁠라타 강변에 있는 작은 이 공원의 주변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에르난이라는 젊은이가 우리의 안내를 맡았다. 두 평 남짓한 감옥 세 개를 옆으로 뉘어 쌓아 놓은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 빠르께 데 라 메모리아 공원 구석구석의 설명을 맡아주었던 22살 사회학 전공의 대학생 에르난(Ernan)과 라 쁠라따 강(Rio de la Plata)ⓒ손문상

▲ 기념 공원 (Parque de la Memoria)의 조형물. 서울 올림픽 공원의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던 미국 출신의 작가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의 작품, 탈출 기념(Monumentum al escape). 1976년~82년까지 군부 치하의 '더러운 전쟁'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세워진 공원이다. ⓒ손문상

그 뒤로 군정시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희생자들의 영정이 벽을 따라 주욱 늘어서 있었다. 나는 광주 망월동의 영정들이 생각났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 기념 공원 (Parque de la Memoria) 한 편에 걸려있는 희생자들의 영정들. ⓒ손문상

아르헨 군사 정권, '잃어버린 아이들'을 자본가에게 팔다
▲ 1969년에 시작된 국가 공권력 주도의 테러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영정들. ⓒ손문상

에르난은 대학생으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이 곳에서 일한지는 두 달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팁을 주려고 하자 한사코 말리는 품이 아무래도 자원봉사자인 듯 싶었다.

사무실 대용의 작은 컨테이너 안에는 에르난 또래의 학생들이 4~5명 있었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 공원의 의미와 조성 계획 등을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손문상 화백이, 혹시 이 아이들이 군사정권 치하의 이른바 '잃어버린 아이들'인지 물었으나 이들은 아니라고 답했다. 잃어버린 아이들은 실종자들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생존 증거였다.

군정에 의해 생부모를 잃고 순식간에 고아가 된 아이들은 주로 경제적 능력이 탄탄한 부르조아들에게 팔려나갔거나 선물로 주어졌다. 죽은 자가 남긴 증거로서의 능력은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거세당한 셈이다.

가해자 처벌 없는 화해의 몸짓…진정한 위로인가?

에르난은 열정적으로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설명했다. 현재 이 공원의 조형물은 세 개뿐이다. 앞으로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슬로베니아, 네덜란드 등 출신 미술 작가들의 작품 13점이 더 생길 예정이라 했다.

그 중에 눈길을 끌었던 것은 라 쁠라따 강가에 세워질 투명한 소년 상이었다. 이 소년 상은 강 위에 세워져 강물의 수위가 변함에 따라 가라앉았다가 솟았다가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희생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년을 형상화 한 것이라 했다. 아이의 나이는 고작 14살이다.

이런 조각 계획은 내게 라 쁠라따 강에 드리워진 수많은 죽음들에 대한 슬픈 메타포이자 자연과 인공의 합동 장례식처럼 상상되었다. 그 위로 사람들은 죽은 가족을 기리기 위해 꽃 송이들을 붉은 강물에 던질 것이다. 죽음은 불필요한 인간의 의식(儀式)을 필요로 한다. 화해의 제스쳐를 가장한 그런 자위적 제의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위로해 줄 것인가?

중요한 것은 확실한 치유여야 한다는 것, 또 그 치유를 위해 가해자들이 스스로의 허물을 내보이고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해결책들은 항상 무시당하곤 했다.

임신한 14세 소녀는 어디로 갔나

실종된 이들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진 커다란 벽의 시작은 1969년도부터였다. 연도와 실종자 이름, 나이, 그리고 임신 여부가 돌 위에 새겨졌다.

▲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임신 여부가 새겨진 벽. 1969년에 시작되어 1983년에 끝나는 지점 사이에 약 9000여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손문상

임신부... Embarazada라는 글귀가 나란히 쓰인 이름... 가르시아, 모니까 엘라사베뜨 14세 임신부(Garcia, Monica Elizabeth 14 anos Embarazada), 17세, 18세, 22세 등... 새 생명을 가졌던 이들은 자신이 품은 씨앗과 함께 강물살을 타고 어디로 간 것일까? 인간의 야만은 어디까지인가?
▲ 가라사 마리아 엘레나, 17세, 임신. ⓒ손문상

▲ 가르시아 모니까 엘리사베뜨, 14세, 임신. ⓒ손문상

30여 년 전의 학살, 이제야 기억하다

오는 길에 들렀던 레꼴레따 묘지의 죽은 부자들이 수백만 달러에 몸 하나 뉘일 관을 사들였다는 사실이 그 이름 위에 포개졌다.

이 벽은 지그재그로 세워져 있었다. 에르난의 말에 따르면 '번개'를 상징한다고 했다. 이들이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손문상 화백과 나는 얼굴을 마주보며 "벼락 모양이라는 설명도 그럴 듯하지만, 마치 생채기같기도 한걸?"이라고 이야기했다. 벼락이건, 생채기건, 이 모든 시설들이 최근에 와서야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면서도, 서글픈 일이다.

머리 벗겨진 독재자가 29만원, 그러니까 850 페소로 호의호식 하는 것을 보고 있는 우리로써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참고로 우리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환전한 돈은 약 1500 페소다.

부시 얼굴 위의 낙서 "내가 바로 테러리스트"

메모리아 공원은 현재 '메인 홀'을 건설 중이며, 다른 시설물들이 위치하기 위한 자리 매김 공사가 한창이었다. 완공이 된다면, 현재보다 약 다섯 배 이상의 크기가 될 것이라 했다.

에르난은 우리에게 완공 후의 조감도를 보여주기 위해 임시 사무실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안내했다. 컨테이너 박스 안의 다른 학생들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곳에 붙어 있던 부시의 얼굴을 찍었다. 부시의 얼굴 위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내가 바로 테러리스트라고."

그리고 아침의 체 게바라 박물관 취재 실패를 만회할 중요한 팁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공원이 일반인에게 공개 된 것이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아침에 불운하다고 생각했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우리는 큰 행운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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