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지난 10년간 사형집행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이 국제앰네스티가 분류하는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의 기준을 달성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마지막 특별사면에서 사형수 6명이 무기로 감형되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 중에는 지난 1996년 여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페스카마호' 사건으로 부산구치소에서 12년째 수감생활을 해오던 '중국동포' 사형수 전재천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감형 소식은 개인적으로도 또 한국사회에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현대판 노예선'의 비극
1996년 여름 일어났던 '페스카마호' 사건은 당시 언론을 통해 6명의 '중국동포' 선원이 한국인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 등 11명을 살해한 잔혹한 살인사건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1심 재판부는 이들 6명의 '중국동포' 선원들에게 전원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부산지방변호사 인권위원회에서 무료변론을 맡고, 이례적으로 중국에서 조선족 출신의 변호사가 이들의 변론을 위해 한국에 오면서부터 '외국인 선원들의 인권박탈과 중국동포의 고단한 삶'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우리 보고 개라 부르고 마누라 보고는 암캐라 부릅니다.… 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아 진저리나며, 선원의 인권과 건강을 해쳤습니다. 음식 배불리 못 먹고, 눈칫밥, 하루에 작업 21시간, 흐리멍텅한 정신 상태였습니다.… 집에는 아내, 자식들이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낙후한 국가에서 살지만 조상은 한 조상이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를 못살게 괴롭히고 심지어 가정까지 못살게 구덩이로 처넣으려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1996년 10월 1심 재판부에 제출한 전재천의 탄원서 중)
마치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사형수 전재천이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는 당시 선상에서 일어난 참담한 상황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에서 교사로 재직했던 그는 큰딸의 대학입학금과 노모의 병원비 때문에 자신이 좀 더 고생하면 가정을 잘 꾸려갈 수 있으리라 다짐하고 한국인 선원들과 함께 일하면 말도 통하고 같은 혈육이니 잘 대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승선했다. 하지만 선상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기대는 한순간에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페스카마호'의 교훈
모든 한국인들은 고기잡이배를 타는 선원들의 힘든 노동과 고달픔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으며, 그 힘든 노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상폭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지난 1991년 국회 국정감사 때 선상폭력문제에 관련된 보고에 의하면 90년부터 불과 1년 반 사이에 해상사고로 인한 사망‧실종자가 500명을 넘어섰으며, 그 대부분의 사인이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선상폭력을 고소해도 선장이 구속되거나 처벌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보고도 있었다. 당시 '현대판 노예선'이라 불리며 크게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선상폭력문제가 한동안 잠잠하여 선원들의 처지가 많이 개선되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 바로 이 '페스카마호' 사건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 살인적인 노동조건 때문에 한국인들은 꺼려하는 그 자리에 가난한 버마, 인도네시아인들, 그리고 '중국동포'들이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고질적인 선상폭력이 결국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연변의 '중국동포' 3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가 제출되었고, <길림신문>을 비롯한 '중국동포 신문'들은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한중수교 이후 선원이나 공장노동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간 '중국동포'들이 한국에서 받았던 천대와 멸시, 부당한 대우 등은 이들의 가슴에 고통과 분노를 심어주었고, 이 사건은 아픔을 겪은 '중국동포'들에게는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97년 항소심 재판부는 전재천 씨를 제외한 5명은 무기형으로 낮춰 선고했고 이들은 지금까지 전국의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
"…감형장을 받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너무 큰 기쁨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한편으로 본 사건으로 고인이 되신 분들과 유가족 분들에 대한 죄책감에 머리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제가 감형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나의 감형으로 유가족 분들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저는 지금까지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향한 용서에 대하여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죄로 인한 고통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2008년 1월 1일, 전재천 씨가 보내온 편지의 일부이다. 전재천 씨의 사형이 확정된 이후 지난 10년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해 왔다. 아니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페스카마호' 선상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의 실질적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무감각한 한국사회, 지금까지 선원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가난한 나라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인격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한국사회가 그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런 취지에 공감한 많은 분들이 늘 함께 해 주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비극적인 '페스카마호' 사건을 통해 진정한 배움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선상폭행사건은 끊이지 않았고, 선원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그의 감형소식은 그동안 가슴 졸이며 아들을 기다려 온 81세의 노모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 그리고 연변의 '중국동포'들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이번 그의 감형은 단지 한 사형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이상 '페스카마호'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빠른 시간 내, 전재천 씨를 비롯한 5명의 무기수들이 중국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 "한 '중국동포' 사형수의 감형과 한국사회"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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