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현실의 이상적인 조합이다. 불온한 현실에는 창조적 상상력은 금지된다"
지난 20일 오후 5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시장에서 이색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금지된 상상력'이란 주제로 15년 전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이유로 작품 <모내기>를 압수당한 신학철 화백(61)의 후배 화가들(책임기획 안성금)이 힘을 모아 기획됐다.
***"15년간 작품과 생이별"**
<모내기>의 작가 신학철 화백은 지난 89년 8월17일 새벽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작품을 자택 내에서 압수됐다. 신 씨는 공안당국으로부터 수사를 받고, 그해 11월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그의 작품 <모내기>는 1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신씨에게 돌아오고 있지 않다.
<사진1>
문제의 그림 <모내기>는 신씨가 87년에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이 주최한 제1회 통일전에 출시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민미협이 제작한 89년 달력에 배경그림으로 담겼다. 89년 인천지역 재야청년단체가 달력 그림을 복사해 부채를 만들었고, 이것이 공안당국에 적발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공안당국은 신씨의 <모내기>가 "행복한 북한과 혼란스런 남한을 대비시켰다"며 89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기소했다. 이 그림은 1,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이 원심판결을 파기해 돌려보내면서 2000년 서울지법에서 징역 10월형 선고유예와 그림 몰수 판결했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을 검찰이 독점하려 하다니"**
신씨는 일단 <모내기>가 공안당국이 말하는 것처럼 "행복한 북한과 혼란스런 남한을 대비시킨 것이 아니다"고 항변한다.
<사진2>
신씨는 "상단의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봄에 모내기하고 들밥먹고 가을에 수확하고 잔치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위아래 놓은 통일염원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신씨가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을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검찰이 자신들의 자의적 해석을 받아들이라고 강제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문화연대 류제홍 그림평론가는 "검찰의 자의적 해석도 문제지만, 그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을 검찰이 독점하려는 태도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즉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은 보는 이에 따라서 다 다르기 마련인데, 검찰이 검찰의 시각만으로 임의로 해석해 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 근거한다는 설명이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안성금씨도 "검찰의 자의적 해석으로 많은 예술인의 상상력이 제약되고 있다"며 "검찰의 그런 태도와 이를 부추기는 국가보안법이 있는 이상 예술인의 상상력은 앞으로도 제약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인권위원회, "명백한 표현의 자유 침해", "작품 반환하라"**
한편 이번 전시회는 법무부가 유엔인권위원회의 권고사항을 빨리 이행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기도 하다.
신씨는 2000년 대법원 상고마저 기각되자 마지막 수단으로 유엔인권위원회에 이 사건을 제소했다. 신씨의 제소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는 지난달 10일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왔다.
인권위는 "명백한 표현의 자유 침해 사건"이라며 "한국정부에게 ▲유죄판결에 대한 보상 ▲유죄판결의 무효화 ▲법정비용 보상 ▲그림의 원상 복구 및 반환 등을 조치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정부는 인권위의 권고에 대해 90일 내로 조치사항 이행여부를 통보해야 한다.
<사진3>
신 씨는 "대법원까지 다 판결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권위에 제소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권위의 권고를 한국정부가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불투명한다.
안성금씨는 "이번 전시회만 해도 지속적으로 검찰 측에서 '어떤 작가들이 참가했냐'며 협박하고 있다"며 "행여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후배 작가들이 이번일로 피해나 입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검찰, 국가보안법 이유로 작품 열람 마저 거부**
신씨는 "작품 반환은 힘들더라도, 보존 상태라도 한 번 확인하고 싶다"고 말한다.
신씨에 따르면, 그의 작품 <모내기>는 89년 경찰에 의해 압수된 뒤로 A4 보다 조금 큰 봉투에 담겨 검찰 창고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모내기>가 130×160㎝ 크기인 것으로 비춰, "여러겹으로 꼬깃꼬깃 접혀있다"는 신씨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신씨는 "유화작품이라 접으면, 접힌 부분이 그대로 표시가 날 뿐만 아니라, 심하면 물감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며 "사실 작품 훼손은 이미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신씨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결의 후 검찰에 '작품열람'을 요청한 바 있다. 이에 서울중앙지검은 4일 "그림이 이적표현물인 만큼 타인에게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반포죄에 해당된다"며 신씨의 요구를 거절했다. 유엔 인권위가 반환조치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검찰은 열람마저 거부한 셈이다.
신씨를 비롯한 신씨를 지지하는 작가들은 경찰청 앞에서 서울지방검찰청 앞에서 10일부터 '유엔인권위권고사항 이행'과 '작품열람'을 요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