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면에서 이번 정권 교체는 민주노총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기,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시련의 시기'라 보일 법 하다. 특히 이명박 당선자는 '기업'(사 측)을 경제정책의 최우선에 두겠다는 말을 수차례 해왔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앞으로의 '이명박 시대'를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지 듣고 싶어 지난 12월 28일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이석행 위원장을 만났다. 걱정이 태산일 것 같았던 이 위원장의 첫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뭐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어느 정권이 민영화 반대 파업, FTA 반대 파업, 비정규직법 반대 파업 인정했습니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인정했습니까? 이명박 당선자가 정치적 목적의 파업은 법과 원칙에 따라 강력하게 대응한다고 하는데, 예전에도 똑같았습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친기업'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재벌적'
그러면서도 이 위원장은 '이명박 시대'의 달라질 점을 지적했다. 긴장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이 당선자가 '친기업적' 인물이 아니라 이 당선자 자체가 '재벌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당선자가 재벌 회장들 모아놓고 얘기하는 걸 보니 마치 81년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대통령 카리스마가 원상 복귀될 것으로 봅니다. 다시 정경유착 시대로 돌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재벌의 파이가 더 커져야 하기 때문에 서민의 호주머니는 더 쥐어 짜야 할테고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노동조합, 특히 민주노총을 극심하게 탄압할 것으로 보입니다."
결연한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민주노총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격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노동자 980명이 감옥에 갔습니다. 이명박 시대에는 9800명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84년 대동중공업 파업 때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때는 내 몸을 던져야 파업을 할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저도 감옥에 갈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민주노총도 만만치 않습니다. 과거의 전노협이나 민주노총이 아닙니다. 이 당선자가 친재벌적으로 흘러갈수록 민주노총은 힘을 얻을 것입니다."
결의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에 가장 주안점을 둘 것인가를 물었다. 대답은 예상했던 모범답안에 가까웠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멀리 길게 봐야 합니다. 이번에 호주 노총을 초청해 얘기를 들어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당장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호주 노총은 장기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주변부터 파고 들어갔습니다. 동네회의 등에 나가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대중들을 설득해 나갔습니다. TV나 라디오 광고를 통해 자기들의 정책을 알리는 데도 열심히 나섰습니다. 그래서 노동당이 집권하게 됐습니다. 민주노총도 올해에는 일상 속에서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에 주안점을 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끼리만 몰려가 싸웠는데, 대중들에게 감동을 줘야 합니다. 장기적 전망을 갖고 지도부가 바뀌더라도 정치사업은 뚜벅뚜벅 걸어가게 해야 합니다."
대중 속으로…"집회 만능주의 벗어나겠다"
'집회 일변도 투쟁'에서 벗어나겠다는 말도 '새로운 시도'로 성공할지 주목된다.
"사실 올해 가장 아쉬웠던 것이 집회만능주의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싸움의 상대는 시민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기 끊고 가스 잠그는 파업투쟁은 모르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도심에서 길 막고 집회하는 것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것 아닌가 반성해봐야 합니다. 100명이 모여 같은 복장을 입고 자전거를 타거나 삼보일배를 하며 주변에 상황을 알리거나 3000명이 모여 잠실에서 시작해 여의도까지 강변의 쓰레기를 주으며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무언가 참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직원에게 지도부가 희망과 비전을 심어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장의 현안 앞에서는 다시 강경한 자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공기업 민영화 문제이다. 이 위원장은 "해당 산별노조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민주노총 전체가 똘똘 뭉쳐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총파업'을 하겠다는 의지다.
"과거 구조조정 싸움은 해당 연맹 주체들이 주도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노총 전체 차원에서 싸움을 해나갈 것입니다. MBC 민영화 얘기가 나오던데 오늘도 언론노조 위원장을 만나 민주노총이 모두 다 안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산별연맹별로 각개격파 하지 않고 정부의 민영화 기조에 대해 전체 정책적인 선을 긋고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민주노총 만만한 조직이 아닙니다. 80년대와는 다릅니다. 1월 초 산별 대표자 수련회 등을 통해 연맹의 사업계획이 확정될 것입니다."
"도덕불감증 심해질까 우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대선 평가'를 부탁해봤다.
"이 사회를 지탱해 온 골간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덕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 진보진영이 국민들에게 '우리를 책임질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대선에서 민심은 '경제'라고들 보는데, 국민들의 이해에 왜곡이 있다"고도 말했다.
"마치 기업 사장 하던 사람이 대통령 되면 경제를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미국이나 칠레의 예를 보면 기업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 경제를 성공시킨 예가 거의 없습니다. 또 막연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현혹돼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는 '경제'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실 '대선 평가'를 부탁한 것은 최근 내홍을 겪고 있는 민주노동당 분당 논란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당이냐'는 비판의 대상이었던 이 위원장은 이미 수차례 "분당을 말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해왔다.
"저도 공동 선대위원장이었습니다. 제 활동을 점수로 매기자면 낙제점입니다. 대통령 선거 당일까지도 저는 '집토끼' 챙기기에 전전긍긍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국민들에게 다가서야 하는데, 집안 단속조차 안 돼 힘들었습니다.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결과라고 봅니다."
"민노당, 내부 토론을 해야지 언론에 너무 많이 떠들어"
이어지는 얘기는 '섭섭함'이었다.
"민노당 당원, 특히 당 간부들이면 누구도 감히 지금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잘잘못을 따지면 안 됩니다. 저는 '낙제점'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국민과 당원 앞에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고 새로운 혁신 프로그램을 내부 토론으로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나서 당이 활짝 문을 열어야 민노당에 4월 총선도 있고 미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승수 전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겨냥한 말이었다. 조승수 전 의원, 심상정 의원에 대한 불만 표출도 과감했다.
"지금 당이 이 모양 이 꼴인데 좀 겸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에게 책임이 없나요? 국민에게 사과는 했나요? 반성을 먼저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제가 울산에 다섯 번 내려갔는데, 조승수 전 의원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심상정 의원은 공동 선대위원장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내부적으로 해도 될 말을 언론(조선일보)에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최선의 해결책'에 대해 물었다. 이 위원장은 '백의종군'을 얘기했다.
"재창당 수준으로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전망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당직자는 물론 최고위원까지 모두 사퇴해 백의종군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안을 마련한 뒤 국민들 앞에 다시 환한 표정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 당원으로서의 제 생각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민노당 대선후보 선출 방식으로 '민중 경선제'를 주장했던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아쉽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였다.
"이번 선거는 어찌 보면 소수가 다수를 질곡시킨 선거였습니다. 다수가 민중경선에 찬성했지만, 2/3에 2% 모자라 민중견선을 하지 못 했습니다. 거기서부터 평가가 시작돼야 한지만, 당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제가 다시 말하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아 말하기 힘듭니다."
'일단 반성하고 보자'는 이 위원장. 그렇다면 '앞으로 진보진영의 길은 무엇이냐?'고 다소 애둘러 질문을 던졌다.
"진보진영도 실사구시가 필요합니다. 실용적 과제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상만으로 진보운동을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그동안 많이 부족했습니다. 민주노총이 전선운동을 하는 것처럼 비춰져 있는데, 그 덕분에 조합원의 피로도가 높아졌습니다. 대중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작은 투쟁이라도 무언가 만들어서 성과를 대중들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큰 이슈만 갖고 투쟁해왔습니다. 큰 이슈와 작은 싸움을 조화롭게 이어갈 때 실사구시가 이뤄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니 "지난 10년 동안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이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한 진보진영 원로의 말이 떠올라 그대로 물었다. 이 위원장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끝이 있는 싸움을…"
"우리 조합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죽어라고 싸우는데 싸움에 끝이 없다'라고. KTX 승무원 문제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뭔가 싸움이 일어나면 받아 챙길 건 챙겨야 하는데 그걸 못 만들어냈습니다. 싸움이라는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위원장은 "1월엔 이랜드 투쟁을 반드시 끝내겠다"고 말했다.
"이랜드 투쟁을 좀 빨리 끝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랜드가 정권이 바뀌자마자 또 치고 나오는데(노조 지도부 집단 해고) 참 간교합니다. 가진 자들이 정권 바뀌었다고 바로 교섭 대상을 해고시킨 것 아닌가요. 이런 일이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 돼야 하는데, 용납이 됩니다. 대통령마저 도덕성의 의심을 받는 상황이니까요. 이 나라가 앞으로 이런 도덕 불감증에 완전 휩싸일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랜드부터 다시 총격을 모아 끝낼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새해 각오를 물었다.
"84년 총파업을 할 때 나를 지탱해 준 대중들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심정으로 파업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보안사로 끌려갔습니다. 그 때와 심경이 비슷합니다.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도 노동자들을 위해 바치겠다는 각오와 결의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그런 책무를 갖는 자리입니다."
[인터뷰 후기]
"이 자리가 그런 책무를 갖는 자리입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 위원장도 말했지만 민주노총은 '조직' 자체로만 봐도 간단한 조직은 아니다. 조합원만 80만 명이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민주노총이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사와 민주화 역사에 자리매김한 역사적 무게를 감안하면 결코 간단치 않은 조직이다. 그는 그 조직의 수장이다.
그래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특히 '이명박 시대'를 맞이하는 민주노총의 전망과 각오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가 취임 후 틈만 나면 공언하던 "가스와 발전을 멈추는 총파업을 해내겠다"는 말이 곧 현실화 될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급히 예단하기는 힘들지만 '이명박 시대'가 아닌가.
"대중 속으로 파고 들겠다"는 말도 눈에 띈다. 70~80년대 노동운동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노동자들의 '인간 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 하나만으로 대중성을 얻을 수 있었고, 민주화의 바람 속에서 노동운동도 한 축이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다소 대중들에게서 멀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양극화·비정규직 시대에 다시 노동운동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를 외치게 됐다.
"지던 이기던 끝이 있는 싸움을 하겠다"는 그의 말도 의미심장하다. '제대로 싸우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싸움이 길어지면 지는 것보다 더 비참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에서 얻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명박 시대'에 맞서 싸우기 이전에 '민주노동당 내분'과 먼서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문제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최근 조승수 전 의원 등의 비판으로 시작된 논쟁에 대해 조 전 의원 측을 강하게 비난했다. (☞ 관련 기사: 이석행 "조승수, 분열 선동하고 조국통일사업 음해")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