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는 등 당내 386 정치인의 선두주자 격으로 여겨졌던 김 전 의원의 '배신'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대가 컸던 만큼 분노도 컸다. 누리꾼들 사이에 김 전 의원은 대표적인 '철새 정치인'으로 여겨졌고, '김민새'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김민새'는 누리꾼들 사이에 정치 세태를 풍자하는 유행어가 됐다. 김 전 의원 측은 궁여지책으로 김 전 의원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 가운데 '김민새'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김민X'로 자동 변환되도록 하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5년 간의 공백기를 갖고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하는 등 정치적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때 입은 상처를 회복하기에는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와서 김 전 의원 얘기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그때는 그래도 '배신'을 이야기할 수준은 됐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기 때문이다. 대선을 8일 앞둔 시점에서도 후보단일화 문제 등이 결론 내려지지 않은 '어지러운 대선판'을 틈타 이쪽에서 저쪽으로 '둥지'를 옮기는 정치인들이 속출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이미 극에 달해서일까? 내년 4월 총선을 염두에 둔 이들의 '배신'에 유권자들은 분노조차 하지 않고 있다. 대선에서 보이는 모습만을 놓고 보면 우리 정치는 5년 전에 비해 확실히 퇴보했다.
노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김혁규·진대제의 '배신'
김혁규 전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이 11일 이회창 후보 캠프에 합류했다. "정체성에서 이회창 후보와 뜻이 가장 맞다"는 게 그가 내세운 명분이다.
지난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경남도지사에 발탁된 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3회 연속 민선 도지사에 당선된 전력을 가진 그의 입장에서는 '원대복귀'라고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김 전 지사에게 쏟아 부었던 '애정'을 생각하면 그가 이회창 캠프로 간 것은 정치적 차원을 떠나 인간적인 배신이다. 물론 노 대통령이 김 전 지사를 '총애'한 것은 임기 내내 '지역구도 해소'를 명분으로 내세워 영남 개혁세력의 결집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건너온 김 전 지사는 노 대통령의 '동진정책'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노 대통령은 2004년 탄핵에서 복귀한 직후 김 전 총리를 국무총리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물론 한나라당 뿐 아니라 개혁총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도 반대해 수포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던 진대제 전 장관도 지난 6일 한국여성벤처협회 송년의 밤 축사에서 "이번 대선은 물론 앞으로도 상당기간 기업경영의 성공경험이 있는 CEO 출신이 국가지도자가 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삼성전자 CEO 출신이기도한 진 전 장관이 현대건설 CEO 출신인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한 것 역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진 전 장관 역시 노 대통령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었다.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 열린우리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물러날 때까지 3년 넘게 장관직을 수행한 노무현 정부의 최장수 장관이었다. 노 대통령은 여러 차례 진 전 장관의 업무 능력에 대해 칭찬했었다. '삼성' 출신의 진 전 장관은 좌도 우도 끌어안겠다는 노 대통령의 '좌파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으면서 한나라당 이명박 캠프로 건너간 인물은 진 전 장관 이외에도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있다.
무너지는 민주당…앞 다퉈 '적장'에 몸 던져
열린우리당과 분당 사태를 거쳐 '호남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도 내년 총선을 계산해 각자 살길 찾기에 바쁘다.
장전형 전 민주당 대변인이 지난 4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그는 한나라당으로부터 10년간 무려 16번이나 고소, 고발을 당한 인물이다. 자신이 수차례 "차떼기 부패 정당"이라고 비난했던 한나라당에 입당한 이유에 대해 장 전 대변인은 "국민통합과 경제 살리기에 적합한 사람은 이명박 후보"라는 지지 이유를 밝혔다.
이윤수·안동선 전 의원 등 민주당 원외당협위원장과 당직자 등 38명은 같은 날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 때 '적군의 수장'이었다. 남북화해정책인 '햇볕정책'의 산실인 민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선명한 대북정책'을 기치로 내세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는 것은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어색한 장면이었다.
소위 진보개혁진영의 정치인들이 앞다퉈 보수진영으로 '투항'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전반적인 보수화 경향이 반영된 현상이다. 노무현 정권의 '무능'에 극도로 실망한 유권자들의 '묻지마 지지'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이미 대세를 굳혔으며, 이런 표심은 대선 직후 치러질 내년 총선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짙다. 따라서 내년 총선에서 '명함'이라도 내밀라면 일찌감치 적을 옮겨놓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다행히 '무관심'과 '혼란'이 대세인 이번 대선판에서 이들의 '배신'은 5년 전과 달리 유권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후보에게 행운처럼 따라 붙었던 '묻지마 지지'가 내년 총선에서 이들 '철새 정치인'들에게도 계속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정치적 혼란을 틈타 커밍아웃한 '철새'들이 총선에서 걸러질 수 있다면 5년 전보다 퇴보한 우리 정치가 나선형을 그리며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그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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