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할 점은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의 목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에서 아들 이재용 씨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를 달성하는 일.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포섭한 '삼성 왕국'의 부패를 종식하기 위해선 내부 비리를 고발할 제2, 제3의 김용철이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가운데 새삼 주목을 받는 책이 있다. 지난 7월 출간된 경영이론서 <고르디우스의 매듭>(두레스 펴냄)이다. 책의 저자인 김병윤 두레스경영연구소 소장은 20년 이상 삼성전자 직원으로 근무했던 '전직 삼성맨'이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한국의 재벌 경영, 특히 삼성의 문제점에 대해 쏟아내는 비판은 그만큼 날카롭고 진지하다. 또 그가 밝힌 몇몇 사례들은 김용철 변호사의 진술과 맞물리며 흥미롭게 다가온다.
가신들의 암약이 지탱하는 재벌 왕국
이 책의 특징은 한국 재벌의 문제점을 춘추전국시대 또는 조선 시대 왕조가 겪은 역사적 사건과 비교하며 분석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역설적으로 현재 한국 재벌의 비정상적인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경영권을 쥔 '가문'과 이를 둘러싼 '가신'으로 이뤄진 '재벌 왕국'이다.
저자는 특히 재벌의 '가신'들이 야기하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밝혔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나라의 대부 밑에서 벼슬을 한 사람을 뜻하는 '가신'이란 단어는 이제 조직의 발전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형성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여받은 권력을 남용하는 이를 일컫는다. 정경 유착, 부의 세습, 독과점과 문어발식 기업 확장, 임금구조 왜곡 등 수많은 문제점을 지닌 한국의 재벌들이 버틸 수 있는 건 이 같은 '가신'들의 암약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신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재벌 총수들의 그릇된 경영관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즉 법을 피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기업 내부에 전담 조직을 만들게 되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훗날 자신들의 안위를 염려해 개인 주머니를 부풀리는 데 몰두하고, 실제로 열심히 일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기업의 성장에 기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견제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 위해 일하는 '가신'이 경제를 살린다고?
이런 현상의 폐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힘쓰면서 유능한 전문 경영인들을 내치는 '황제 경영 체제'에서는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보다 효율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일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
"모 기업의 경우, 비자금을 조성하라는 특명을 받고 현지 법인의 장으로 나간 인물이 비서와 불륜 관계를 갖고 상당 정도의 회사 돈을 유용한 것이 발견된 적도 있다. 회사 측에서는 그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비서만 퇴사시키는 선에서 무마시켰다. 그리고 그가 주재 기간을 채우고 본사로 들어오자 계열사 사장으로 발령 내서 지속적으로 자리를 보전해주는 '관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저자는 "비자금의 형성과 관련된 기업 운영의 문제점 중 하나가 이런 일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인사상의 처리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총수의 집안일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웬만한 잘못은 문제가 되지 않는 '철밥통'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지난 10년간 삼성그룹 내 구조조정본부장과 전략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이학수 부회장은 가장 적합한 사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엄정한 법 적용이 결국 기업의 생존 돕는다"
저자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방안은 "법의 엄정한 적용"이라고 밝혔다.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나 관료들조차 '경제를 위해서'라며 기업인들의 잘못에 눈을 감지만, 결국 이같은 관행이 한국 경제를 위기에 처하게 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을 비자금 등으로 빼돌리는 이들에게 죄를 묻는 것이야말로 결과적으로 기업의 생존을 돕는다고 강조했다.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다시 한번 단순한 역사의 교훈을 상기시키며 특히 이재용 씨의 경영 승계를 위해 '신화 만들기'에 몰입하는 삼성의 '가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지 일깨워준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배웠다. 왕이 무능하거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 경우 외척이나 환관들이 개입해서 서로 편을 가르고, 간신의 활약으로 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심지어는 망하게 된다는 것을."
5000년 역사를 움직인 핵심인물 7위가 이건희 회장? 김병윤 소장은 책 곳곳에서 재벌의 문제점을 삼성의 사례를 통해 지적했다. 그 중에는 이미 알려진 것들도 있다. 그는 이 같은 사례들을 기업의 도덕성과 가신의 결탁이라는 흐름에 따라 재배치하며 재벌 경영이 가진 문제점을 보여줬다. "1990년대 중반 삼성그룹에서는 수천만 불의 거금을 들여 'Dream 21(21세기의 꿈)'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유람선을 구입했다. 이 유람선은 삼성그룹의 임직원 교육에 활용될 예정이었으나 두 번의 항해 후 거제도 앞바다에서 장기간 방치되고 있었다. 그룹에서는 '돈을 먹는 하마'가 되어버린 유람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 결국 구조조정본부에서 2002년에 무조건 처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SK해운이 발벗고 나서서 2003년 초 시쳇말로 '똥값'에 처분해버렸다. 이로 인해 발생한 적잖은 손실을 계열사에서 분담한 것은 물론이다." "2007년 4월 <월간중앙>이 창간 39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푸른역사연구소'와 공동으로 우리나라 5000년 역사를 움직인 핵심 인물 10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그런데 현재 생존해 있는 이건희 회장이 그중 7위로 선정됐다. 놀랍게도 10위 안에는 박정희와 이승만이 4위와 9위로 올라 있다. 이런 영광을 만들어낸 배경에는 아무 생각 없이 충성만 외치는 가신들의 공작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삼성은 오래전부터 일정 기간 근무한 사람을 선발해서 유학을 보내는 제도가 있었는데, 2003년 갑자기 근무 기간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자격을 심사해서 선발하는 것으로 사규를 개정했다. (…) 당시 유학 자격 심사 기준이 개정된 데는 의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제도 변경이 이뤄진 때가 공교롭게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이학수 실장의 아들이 신입 사원을 입사해서 바로 외국어 과정에 들어가 영어 실력을 키운 시점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2006년 10월 지병으로 별세한 전 삼성화재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지분 4.68%가 그해 말 삼성생명 공익 재단에 기부됐다. 이처럼 거액의 재산이 공식 발표 없이 조용히 기부된 것을 보고 세간에서는 삼성생명 지분이 고인의 명의로 위장 분산돼 있다가 증여된 것일 수 있다는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된 배경은 재벌 일가의 주식이나 자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룹 임직원 명의의 차명 주식 계좌나 차명 계좌로 관리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간혹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회사와 협상을 통해 자신의 몫을 챙기거나 편법을 통해 착복하는 경우도 있다." |
"재벌과 함께 추락하는 한국 경제, 끈기와 집념으로 다시 풀자"
삼성에 비판의 칼을 들이댄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김병윤 소장도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삼성 측의 '공작'을 받았다. 김 소장은 지난 11월 22일 인터넷신문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책이 출판되기 3주 전부터 삼성 쪽에서 접근을 해왔다"고 밝혔다.
"고등학교 선후배,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처럼 잘 아는 사람들이 주위를 맴돌면서 '식사나 하자' 그런다 그래서 만나면 회유와 협박을 한다. '책이 나오기만 하면 명예훼손 소송한다. 준비 다하고 있다. 조심해라' 이런 식이다. 책을 내면 삼성 쪽에서 다 사들이겠다는 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직접 출판등록을 해서 냈다. 다른 곳에서 내려고 해도 책을 내줄 곳이 없다. 얘기를 해봐도. 그래서 직접 냈다."
그는'언론과 삼성의 결탁'도 심각하다고 말했다. 몇몇 언론사에서는 책 광고를 의뢰했으나 결국 실리지 못했다며 <매일경제>에서는 돈까지 줬는데 결국 광고를 싣지 않았다고 했다. 김 소장은 "'자기들도 먹고 살아야 되는데, 어떡하겠느냐' 하소연을 해서 돈을 받아왔다"며 "김용철 변호사 사건이 터져 마침 좋은 기회다 싶어 다시 언론사에게 광고 얘기를 해봤지만 대답은 똑같았다"고 밝혔다.
김병윤 소장은 이 같은 한국의 현실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빗댔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농부의 아들이었던 프리지아의 왕 고르디우스는 왕이 된 이후 신전에 마차를 묶어 기념했는데 그 매듭이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이후 이 매듭을 푼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신탁이 전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마침내 기원전 333년 원정길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김병윤 소장은 "풀기 어려운 매듭을 칼로 잘라버리면 원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없는 법"이라며 "끈기와 불굴의 집념으로 추락하는 한국 경제에 대해 알렉산드로스의 지혜를 뛰어넘는 대안을 찾고 이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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