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발전이란 뭔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각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고민의 사회적 축적 없이 이뤄진 단기적 권력 변동의 결과는 늘 허탈하다. 동일한 의식의 장에서 사람들은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그저 정치적 선호를 옮긴다.
홍 기획위원은 "참여정부의 잘못은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실패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노력 없이 오로지 경제수치에만 매달렸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나날이 경제적 동물로 축소되고 있고, 이런 풍토에서 이명박 씨가 고평가되는 건 외려 자연스럽다. 이명박 씨가 뜰 수 있는 정신적 토양을 일군 건 노무현 정부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정치도 바뀐다. 홍 기획위원은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한꺼번에 바꾸는 게 혁명"인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집요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다가서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제도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구성원의 의식에 관계하는 제도 가운데 그가 특히 주목하는 건 교육이다. 그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무상교육, 무상의료만 가능하다고 해도 참 행복하겠다. 무상교육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홍 기획위원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다"고 했다. '잃어버린 10년'의 기득권이 부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조중동과 한나라당 세력을 삼진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며 "이념과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나라당에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진보정치에 대한 예의'라는 칼럼을 통해 '비판적 지지론'에 따끔한 일침을 가했던 그가 "한나라당을 패배시키는, 삼진아웃시키는 가능성을 놓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홍 기획위원은 "다른 어떤 후보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품격'이라는 게 보이지 않나 싶다"며 문국현 씨에게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개혁의 문화' 조성 실패"
프레시안: 이회창 씨가 대선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회창 씨와 이명박 씨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홍세화 : 차이야 있겠죠. 이회창 씨 발언을 보더라도 수구적인 냉전보수의 대표성, 차별성을 내걸고 있지 않습니까. 한나라당이 집권에 두 번 실패하고 나서 수구적인 냉전보수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느냐 하는 흐름이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이명박 씨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추대됐다고 보여집니다. 과거의 냉전보수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프레시안 : 이회창 씨의 등장을 퇴행으로 볼 수 있겠군요.
홍세화 : 그렇게 볼 수 있죠. 퇴행이라고 할 수 있죠. 한나라당의 울타리 안에 있던 냉전보수세력들이 헤게모니를 좀 빼앗겨온 것 아닙니까? 그 세력들이 이제 나서겠다고 하는 거죠. 한편으론 자기들이 망하는 길을 재촉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퇴행이지만 한번쯤은 거쳐야 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프레시안 : 이회창 씨의 등장을 보수의 분화로 보시는군요.
홍세화 : 수구세력의 분화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회창 씨는 극우적이며 냉전적인 보수죠. 이명박 씨는 울트라 신자유주의자고요. 수구적인 보수세력은 한나라당으로 뭉뚱그려졌는데 거기서도 분화가 이뤄지는 거죠.
프레시안 :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 중 상당수가 현재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일까요.
홍세화 :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경제지상주의적 조류와 맞물리면서 이명박 씨에게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참여정부의 잘못은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개혁의 문화를 조성하지 못했다는 거죠.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풍토를 만들지 못했다는 거죠. 경제지상주의적 가치관으로 보면 노무현 정부나 한나라당이나 박정희 집권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새만금 사업 같은 경우 오로지 경제적인 수치의 문제로만 접근했는데, 그런 기준으로 보면 이명박 씨가 성공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겠죠. 지금의 40~50대는 20대에 '이 억압에 맞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을 강요받으면서 정치적 동물이 됐고, 나이 들어 외환위기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거치면서 '경제적 동물'로 축소됐죠. 지금 20대는 그런 과정 없이 '경제적 동물'이 되고 있고요. 결국 모두 경제적 동물이 되어 있는 셈인데, 이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이명박 씨에게서 커다란 하자를 발견하기 어렵죠. 노무현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이 '결국 누가 해도 마찬가지네' 하면서 '저 사람이 경제는 잘 할 것 같다'고 이명박 씨를 지지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한나라당이 '삼진아웃' 돼야 하는 이유
프레시안 : 한나라당과 범여권의 차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 차이를 중시하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반한나라당 연합론이 나오는데요. 권영길 후보도 가치연정을 말했죠.
홍세화 : 이거 아주 난처한 질문인데(웃음). 골치 아파요. 아주 난처한 상황인데, 사실 조중동과 한나라당 세력을 삼진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는 기본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의 처지에서 보면 사태가 제대로 보일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10년' 소리를 계속 해온 세력이 이번에 이렇게 고공행진을 했는데도 집권하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15년'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거죠.
이 얘긴 뭐냐 하면, 한나라당이 현재의 이념적 지향으로는 집권을 할 수 없다는 게 확인되면, 냉전적 보수는 물론 시장만능주의적인 것과도 일정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흔히 얘기하는 합리적 보수로의 자리매김이 이뤄지지 않겠느냐, 전망을 해보는 거죠. 그렇게 되면 한나라당과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차별성은 정말 별 게 없어지는 거고, 결국 진보정당의 입지도 강화되지 않겠느냐 생각해보는 거죠. 또 남북관계의 변화로 냉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면 분단 상황에서 진보정당은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접근이 용이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프레시안 :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경우 민주주의가 후퇴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시는군요.
홍세화 : 그렇습니다.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해야 할 것 같아요. 사학법 재개정에서도 드러났듯이 사익추구집단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아주 집요합니다. 조선일보의 극악함도 마찬가지인데,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얘기하듯이 과거로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대로 집권에 실패하게 되면 이제 집요함을 버리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수준에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거죠. 예를 들어 남아공에서 과거사 청산이 일정하게 성과를 거뒀던 이유는 백인정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식이 결국 백인들로 하여금 사회경제적인 기득권을 향유하는 선에서 일정정도 타협을 하도록 강제한 거죠.
프레시안 :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이 저지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60(한나라당)대 20(범여권)대 2(민주노동당)입니다. 현재로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데요. 그래서 '진보개혁' 일각에선 단기 승리를 위한 '사술'보다는 '준비된 패배'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지적도 합니다.
홍세화 : 어…(한숨). 준비된 패배라…. 준비 됐건 안 됐건 패배는 안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저는 여전히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어요. 어쨌건 이명박 씨는 상한선을 그은 거고 이제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회창 씨에게도 거품이 있다고 보고요. 제가 주목하는 건 오히려 정동영 씨와 문국현 씨의 지지율 변화예요. 정동영 씨가 계속 정체상태에 머물고, 문국현 씨가 약진하는 모습이 나타나면 기대의 집중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거죠.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에도 변화무쌍하니까요. 그럼 문국현 씨는 어떠냐, 이런 질문이 나오면 골치 아픈데(웃음). 결국은 기대인거죠. 어쨌든 준비된 패배가 아니라 한나라당을 패배시키는, 삼진아웃시키는 가능성을 놓지 못하겠어요.
프레시안 : 문국현 씨가 내세우는 가치나 그가 현재까지 보여준 걸로 추론되는 실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홍세화 : 참 어렵습니다. 사람은 놀음을 같이 해봐야 안다는데(웃음). 내가 그 분을 알 기회는 없었죠. 그러나 뭔가 기대해볼 만하다는 면에서 단어 하나를 떠올려보면 '품격'이라는 겁니다. 다른 어떤 후보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품격'이라는 게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문 후보의 정치철학이나 내공은 검증되지 않았고 지금 검증할 수도 없지만 '품격'이라는 데 이끌리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그 분의 공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죠. 그러나 공약이야 노무현 대통령도 화려하지 않았습니까. 다 '사기'여서 문제였죠. 문 후보의 정치철학이나 공약이 제 기준에서 미흡하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내놓은 공약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지는 않는 품격 같은 것에 기대를 걸고 싶은 면도 없지 않죠, 솔직히.
"민노당, 이래서야 무슨 수권능력이 생기겠나"
프레시안 : 권영길 후보가 고전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소통의 중요성을 각별히 강조하시는데요. 지난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소통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어떤가요.
홍세화 : 우선 민노당이 위기를 맞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지난 총선에서 열 분이 국회에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막 떴죠. 당시 민노당이 가장 먼저 한 게 기자실을 크게 만든 겁니다. 홍보를 제대로 하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있었다고 봅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진보정당을 잘 모르면서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책개발도 열심히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당원 상대의 정치에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외연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당원을 대상으로 한 정치에 비하면 아주 적었죠.
비근한 예로 2012년 집권을 말하면서도 지역구에 전혀 힘을 기울이지 않았고 정책개발도 미흡했습니다. 저는 비례대표제가 당의 초기 약진에는 기여했지만 나중에는 독약이 됐다고 봅니다. 당의 지도부가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한데, 민중을 보지 않고 당원만 바라보게 됐습니다. 말은 안 해도 비례대표 의석을 바라보는 거죠. 그러는 동안 민중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노력이나 의지는 실종됐어요. 또 그렇게 내부정치에 몰두하다 보니 정파의 문제에서도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정파의 우두머리는 비례대표로 선출되는 데만 매몰되고요.
프레시안 : 비정규직에 비례 2, 3번을 주자고 제안하셨는데요. 당내 반응은 어떤가요. (인터뷰 뒤인 17일 민주노동당은 중앙위원회에서 비정규직을 비례대표 2번에 할당키로 결정했다.)
홍세화 : 잘 모르겠어요. 곧 토론회도 한다고 하는데, 저야 얼마 전에 <레디앙>에 기고한 대로, 말로만 비정규직 얘기하지 말고 선언적이라도 비례대표 2, 3번 줘야한다, 4번부터는 전략공천 해야 한다, 8번까지는 2004년에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당 지도부들은 넘볼 게 못된다, 당 지도부가 역할을 했다면 9번부터 자격이 있는 거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죠. 평당원 주제에 마구…(웃음).
프레시안 : 선생께서는 지역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민주노동당에겐 계급정치 역시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노동당을 떠받치는 골간이 민주노총과 전농 같은 대중조직인데요. 이들 조직이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대표성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대중을 폭넓게 포괄하지 있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민주노총 위기론도 나오는 것일 테고요. 민주노동당이 보다 폭넓게 노동자, 농민과 소통하려면 민주노총과 전농에만 기대는 활동방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홍세화 : 어렵죠. 민주노총은 잘 아시다시피 대기업 노조 중심입니다. 한국 산업구조의 영향 때문이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으로 인해 노조 조직률 같은 게 대기업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죠. 이건 일종의 한계인데, 이 한계를 뚫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한계를 뚫고 나가기 위해서도 지역 기반의 활동이 모색돼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포지역위원회와 문화연대, 마포지역 단체들이 '민중의 집'을 해보자고 해서 저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민중들이 만나서 문화적 프로그램을 향유하고 같이 교육도 하는 공간을 모색해보자는 취지죠.
제가 또 강조하고 싶은 건 학습입니다. 학습을 너무 안 합니다. 우리 사회 노동자들은 노동자 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반노동자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려면 다른 것보다 학습을 해야 하는데 공부를 안 합니다. 대충 다 알고 있다고 믿는 거죠. 아까 2004년 총선 끝나고 기자실 크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것보다 연수공간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는 거죠. 학습도 안 하는 당이 무슨 진보정당이냐,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평당원은 평당원대로 학습과정이 있어야 하고 간부는 간부대로 학습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진보정당이 자기 나름의 역할을 하려면 유럽의 정당처럼 지적인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게 섀도우 캐비닛하고도 연결돼야 하는 건데 그런 게 없습니다. 이래가지고야 무슨 수권정당의 가능성이 있겠느냐, 그런 생각도 드는 겁니다.
학교교육의 민주주의가 관건
프레시안 : 선생의 칼럼에는 이 시대의 지배적 정서를 나타내는 말로 '불안'이라는 어휘가 자주 등장합니다. 얼마 전 '이 땅의 교사는 분노를 모르는가' 칼럼에서 "20 대 80으로 양극화된 사회,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각개약진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회에서 구성원을 지배하는 것은 불안"이라는 통찰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불안이 깊어질수록 "사회구조를 혁파하려는" 노력보다는 "로또복권에 매달리듯 엷은 가능성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는" 경향이 강해지는 듯 합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홍세화 :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은 주체적으로 형성된 게 아니고 주입된 의식인데, 의식화의 주체는 학교권력을 장악한 국가권력과 대중매체를 장악한 자본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학교매체와 대중매체의 조합에 지나지 않은 의식세계를 갖고 있으면서 그걸 고집하는 거죠. 이런 것을 보게 해 주는 게 교육입니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의식세계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학교 교육의 민주주의를 관철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가령 교장제도만 해도 일제 때 시작된 건데 아직 그대로 관철되고 있어요.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을 형성하는 게 아니죠. 일제 때 타율적인 질서의식을 의식화했던 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학교에 주목하고 교육 문제에 주목하는 거죠.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사회비판의식을 형성할 수 있을까. 그건 학교 교육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대중매체를 통해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특별한 계기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학교 교육과 대중 매체를 통해 형성한 자기의식에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계기가 된 게 70년대 이후에는 주로 선배였습니다. 선배가 책을 같이 읽자고 하면 선후배간이라는 특수한 인격적 관계 때문에 내치지 못하고 따라갔던 거죠. 그렇게 실제 책을 읽어 보고 나서 '아 이게 아니네' 하면서 그때까지 형성한 의식을 벗어내는 것이 가능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 선배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의 현장이 더욱 중요하게 된 거죠. 학교 현장 자체가 비판적 안목을 키워줄 수 있는 곳이 돼야 하는 상황입니다. 과거처럼 따로 교정할 거처와 기회가 없는 거죠. 진보세력보다 냉전보수세력이 학교의 중요성과 전교조의 역할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를 약화시키고 주변화 시키는 데 집요한 겁니다.
"살아 있는 동안 무상교육, 무상의료만 가능해도 행복하겠다"
프레시안 : 교육문제가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최근 정동영 후보가 입시폐지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내신으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인데요.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입시폐지 공약을 갖고 있으면서도 '입시폐지'란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정 후보에게 선점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레디앙> 기사에 따르면 당 정책위의장이 "교육운동 일부에서 '입시 폐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유로 '입시폐지' 슬로건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홍세화 : 한심한 얘기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런 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게 참 답답합니다. 결국 입시폐지도 정동영 씨에게 내준 꼴이 된 거고요. 참 얘기하기 싫어요(웃음). 다만 정동영 씨 공약이 산뜻해 보이지만 내용이 없다는 건 분명한 거고요. 대학서열화를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입시폐지를 한들 사교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며 내신을 올리기 위한 엄청난 로비와 부패를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내건 건 산뜻했지만 내용은 반쪽짜리입니다.
프레시안 : 조금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했다는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입시폐지'라는 말이 대중에게 거부감을 줄까봐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봅니다.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격한 구호라고 판단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홍세화 : 너무 과격해서? 한국의 교육현실이 과격한 것을 요구하고 있죠.
프레시안 : 정동영 씨가 '입시폐지'를 들고 나온 것도 그래서겠죠. 실제 내용물보다 더 과격한 포장을 해가면서요.
홍세화 : 진보정당이 스스로 위축되는 면이 분명히 있죠.
프레시안 : 위축이 선택적으로 나타나서 문제인 것 같은데요.(웃음)
홍세화 : 선택적으로?(웃음)
프레시안 : 지금은 메인 슬로건이 아닙니다만, 권영길 후보가 처음에 들고 나온 게 '코리아연방공화국'이었습니다. 대중들의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았는데요. 차제에 진보진영의 대북정책 및 통일정책 전반에 대한 점검과 반성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대중과의 소통이란 기준에서 말이지요. 선생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홍세화 : 그건 말 안 할랍니다. 뻔히 아는 얘기를 왜 물어봐요?(웃음)
프레시안 : 민주노동당은 사회의 진보를 말하지만 정작 민주노동당 내부의 구조는 그리 진보적이지 않은 듯 합니다. 외려 사회 전반의 평균적 합리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느껴질 때가 많은데요. 각종 회계문제나 당직자들 급여문제, 당내 노조를 대하는 지도부의 태도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홍세화 : 어려운 질문 계속하시네(웃음).
프레시안 : 기존의 국가모델 가운데 선생께서 생각하는 바람직한 국가모델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요즘 사민주의 모델에 대한 얘기가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는데요.
홍세화 : 저야 물론 북유럽 사민주의죠. 일단 사민주의라도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 무상교육, 무상의료만 가능하다고 해도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상교육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겁니다. 얼마 전 칼럼에서도 썼지만, 무상교육에 의해 의사가 된다고 하면 한국의 의사들하고는 전혀 다른 멘탈리티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사회 비용으로 의사가 됐기 때문에 사회에 되돌려 준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의사뿐이겠습니까. 무상교육은 사회적 연대의 실현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알게 모르게 연대의식과 사회 환원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인간관계가 파괴될 때 더불어 사는 제도를 만드는 건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프레시안 : 선생께서는 올 초 칼럼에서 우리 사회의 물신주의적 가치관을 개탄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제도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사회적 세력관계로 보면 제도 변화라는 게 참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홍세화 : 쉽지 않죠.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죠. 집요해야 합니다. 집요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단순한 품성의 얘기가 아닙니다. 절대 포기해선 안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한꺼번에 바꾸는 것이 혁명인데, 지금 한국 자체의 역량으로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느냐, 어렵다고 봅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와 달리 정보의 흐름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강화된 지금 소수에 의한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해외에서 과거의 68 혁명과 같은 게 일어나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힘듭니다. 일부에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말하지만 남미만 해도 주변부여서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결국 다른 길은 없습니다. 기동전이건 진지전이건 전방위적으로 성실하게 해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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