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법의 시행이 얼마 안 돼서 제도 효과를 평가하기에는 좀 이르긴 합니다만 도급 근로자가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점은 보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청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는 것은 학계의 일반적 의견입니다. 따라서 도급 근로자도 분명히 비정규직에 속하는데 차별을 두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이 아니다. 1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동부 국감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한 질의 내용이다.
박근혜 전 대표의 이 같은 주장은 노동계의 주장과 완벽히 닮아있어 국정감사를 지켜보던 이들을 놀라게 했다.
노동계 목소리 대변해 준 박근혜의 국감 '활약'
경선 패배 이후 대선 예비후보에서 국회의원으로 돌아간 박근혜 전 대표는 이날 노동부 국정감사에서 특유의 조용 조용한 목소리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을 몰아갔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날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정규직화보다는 재계약 대신 다른 근로자로 대체하거나 도급화(외주화, 아웃소싱)하는 경우가 많다"며 노동계의 우려를 이 장관에게 대신 전달하며 말을 뗐다.
이어 박 전 대표는 도급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현행 비정규직법의 차별시정제도의 대상으로 포함시켜 도급인 소속 근로자, 즉 원청의 정규직과 비교해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의 경우에는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도급 근로자는 현재 정부의 통계에서도 비정규직으로 분류되지 않고 있다. 원청이 아닌 도급업체의 정규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영계의 주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슷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과의 차별을 금지하도록 한 현행 비정규직법의 차별시정제도에도 포함시킬 수 없다는 것이 정부와 경영계의 입장이다.
반면 노동계는 도급 근로자도 원청의 간접 고용 노동자로 도급계약 관계에 따라 고용이 불안한 처지이며 임금 등 근로조건이 비정규직 수준으로 열악한 만큼 비정규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이날 발언은 노동계의 '외로운'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
박 전 대표는 또 "도급 근로자의 근로조건과 관련해 원청 업체와 협의할 수 있는 채널이 필요한 것은 아니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이 역시 박 전 대표의 말을 듣던 이상수 장관의 얼굴에서는 당혹스러움이 한껏 묻어났을 만큼 '과격한' 발언이었다. 박 전 대표는 '협의 채널'이라는 '톤 다운'된 표현을 사용했지만 바꿔 말하면 노동계가 주장하는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발언이었기 때문.
이것이 이명박과 박근혜의 차이?
박 전 대표의 이날 발언은 기존의 한나라당의 기본적인 입장과도 아주 다른 주장이었다. 도급 노동자의 분류 등과 관련해 한나라당이 명확한 당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당보다 더 왼쪽에 있다는 현 정부조차도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쉽게 수용하기 어려울 만큼 진도가 나가 있다.
당연히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도 차이점을 보였다. 도급 근로자와 같은 소위 '전문 용어'를 써 가면서 오랜만에 국회로 돌아와 만만찮은 내공을 자랑한 박 전 대표와 달리 이명박 후보는 이날도 매경 지식포럼에 참석해 "친시장 친경제 지도자가 나와 파란불이 켜져야 투자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서 "(집권 시) 불법 파업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법을 집행할 것"이라는 수준의 발언에 그쳤다.
또 현재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인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과 관련해서도 이 후보가 "법으로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으며 사회적 합의로 풀어야 한다"는 수준의 '공자님 말씀'에 머물고 있는 반면 박 전 대표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어가며 보완책 마련의 시급성을 이상수 장관의 면전에서 강조했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공세'에 이상수 장관은 "적절한 말씀", "좋은 제안", "옳은 지적" 등의 표현을 써가며 "고려하겠다"고 대답했다.
비정규직 문제만 놓고 보자면 어느 대선 후보보다 '진보적'인 박 전 대표의 발언을 접하면서 이 놀라운 노동관이 2년 간 대표를 맡은 당의 노동 정책에는 단 한 줄도 투영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스쳤다. 이날 박 전 대표가 '써 주는 대로 읽은 게' 아니라 과연 자신의 소신을 펼친 것이라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놀라운 견해를 이 후보에게도 전달해 줬으면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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