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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선망'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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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선망'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도정일 교수 "문화 성숙에 이토록 게으른 나라는 한국뿐"

'민주화'로 대표되는 정치발전과 '잘 먹고 잘 살자'로 대표되는 경제발전.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인을 사로잡아온 화두이자 사회 담론을 끌어 온 두 개의 수레바퀴다. 그러면 문화는 한국 사회 안에서 어디쯤 있을까? 세 번째 바퀴쯤 되는 걸까. 없어도 그만인 '장식품'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17일 서울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둘 다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도정일 교수는 "문화는 정치, 경제와 떼어놓고 논할 수 없다"라며 "오히려 형식적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어느 정도 달성한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는 '민주주의 문화'의 부재에 있다"고 진단했다. (☞ 강연 전문 보기)

이번 강연은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이해 <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연속 강연의 여섯 번째 순서로 마련됐다.

여건종 숙명여대 교수와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이 토론자로 나섰으며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민주주의 문화 성숙'에 바쳤어야 할 20년, 그러나…
▲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프레시안

도정일 교수는 한국 사회가 일제 강점기 이후 1987년 6월 항쟁까지 많은 희생이 따르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충분한 준비 없이, 문화적 토대 없이 홍두깨처럼 찾아온 민주주의'에 대한 대가였다.

도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6월 항쟁 이후 20년은 사회의 기본적인 토양으로 민주주의 문화를 성숙시키는데 바쳤어야 할 소중한 20년"이라며 "그러나 사회도, 정부도 그 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 관련 기사: "6월 항쟁은 한 차례 불꽃놀이였나?")

도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정치와 경재를 지탱하는 기본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즉 문화를 '특정 시기에 한 사회 안에서 우세하게 발현하는 가치, 태도, 신념, 지향점, 정신상태, 전제조건'라고 정의내렸을 때 도 교수는 "정치, 경제, 사회발전을 모두 저해하거나 촉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문화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문화의 중요성을 알아챈 사회 주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 교수는 민주주의 문화가 성숙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정부의 정책 부재 △언론과 매체의 타락 △교육의 역할 방기 △긍정적 가치를 제시하고 옹호하지 못한 진보 진영을 꼽으며 "민주주의 문화를 이루는 데 이토록 투자를 게을리 하는 사회는 한국 밖에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도 교수는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공포의 문화'와 '선망의 문화'라고 지적했다. 고용 불안과 비정규직의 일반화, 실직의 위험으로 인해 사람들은 "언제든 사회적 열패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공포의 정신상태에 갇힌다. 반면 언론이 부추기는 성공, 소비, 풍요의 신화는 여성들의 '성형중독' 현상을 낳으며 '선망의 문화'를 확산시킨다.

도 교수는 "지금 사회는 인간의 발전과 시장의 가치를 놓고 벌이는 '문화 전쟁(culture war)'의 단계에 들어와 있다"며 " '돈' 외에는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없을 정도로 경제가치에 매몰돼 있는 가치 전도 사회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발전의 가치, 민주주의 문화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사회적 이성의 마비'로 나타났다"
▲ 여건종 숙명여대 교수 ⓒ프레시안

이날 토론에 나선 여건종 교수는 "근대화 과정에서 문화적 민주화가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아직도 미완성 상태에 있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이식, 해방 이후 시작된 압축 성장 과정에서 밑으로부터 시민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여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문화는 무엇보다도 밑에서부터 주체를 형성해나가는 것과 관련돼 있다"며 "계몽된 대중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민주화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여 교수는 "도 선생님이 지적한 대로 시장 전체주의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며 "부정적 징후로 포착한 공포와 선망의 문화는 정확하게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이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 교수는 "결국 지금 한국 사회의 문화는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거나 공포를 통해 동원하면서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시키고 자본주의를 재생산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며 "그 결과는 사회적 이성의 마비"라고 지적했다.

"문화운동이 강조했던 '삶의 질'은 변질돼 버리고…"

정희섭 소장은 지난 20년간 문화운동의 행적을 돌이켜 봤을 때 도 교수의 지적이 더욱 따갑게 다가온다고 밝혔다.

정희섭 소장은 "지난 20년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문화운동가 사이에서는 여성, 환경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비해서 문화운동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며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른 분야를 끌고가는 가치라는 인식을 확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 ⓒ프레시안

정 소장은 "그러나 문화운동이 출발하던 당시 시대적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며 "정치적 민주화가 해결되지 않으면 문화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화운동가들은 '문화운동' 보다는 '문화를 수단으로 한 정치적 운동'을 해왔다"고 지적했다.

정 소장은 "이제 문화운동도 문화가 목표이자 원리가 되는 운동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며 "그러나 그 동력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라는 대목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라고 밝혔다.

정 소장은 "문화가 중요하다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오고 '삶의 질'의 중요성도 많이 언급됐다"며 "그러나 IMF를 거치면서 '삶의 질'은 일자리 확보 또는 값비싼 공연 관람처럼 철저히 양극화돼 버리거나 문화산업 담론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정 소장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끊임없는 공포와 선망에서 벗어나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 진정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앞으로 문화운동이 해나갈 수 있는 긍정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듯 하다"고 밝혔다.

"'공포와 선망'으로부터의 해방, 시장 전체주의에 맞선 '대안' 될 수도"

이에 대해 도정일 교수는 "우리 사회와 문화가 위기에 처하게 된 가장 심각한 요인은 두 토론자가 지적한 대로 무지막지하게 비인간화, 엄청난 경쟁, 비인간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시장 전체주의"라며 "심지어 다수의 사람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내면화하는 지금 이를 교정할 방법은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도 교수는 "정 소장의 지적처럼 사람들을 시장의 논리로 포섭하는 심리에서 해방되는 과제는 문화가 할 수 있는 한가지 일이 될 수 있다"며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특정의 방법으로 몰고가 고통스럽게 하는 공포, 선망의 문화를 직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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