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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이주노동자들, 식당 가위와 일회용 면도기로 치른 삭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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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이주노동자들, 식당 가위와 일회용 면도기로 치른 삭발식

석원정의 '우리 안의 아시아' <35> 단속에 &#51922;기던 그들, '버마 민주화' 위해 서울 거리에 나서다

버마! 버마! 버마!

버마의 유혈사태로 인하여 소란한 지난 몇 주였다.

애초에는 기름값 인상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대정부항의시위가 민주항쟁으로 변모해가면서 제2의 '8888'(1988년 8월 8일 버마 민주화 항쟁)을 연상하게 한 2007년 버마 민중항쟁의 촉발제는 시위진압대가 승려에게 저지른 폭행이었다고 한다. 종교적인 심성을 가진 순한 버마인들이 드디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 1988년 8월 8일 버마 민주화 항쟁 관련 기사

버마 사람들에게 8월이 특별한 이유…한국의 5·18, 버마의 8888
'8888항쟁' 참가자 네 명의 삶
2007 버마 민주화시위, 1988년과 무엇이 다른가?

승려에 대한 깊은 존경심

평소에도 버마사람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자국 불교에 대한 자부심과 승려에 대한 존경심이 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버마사람들의 승려에 대한 경외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들은 승려가 있는 붉은 색 승복조차도 일반인들은 함부로 걸치거나 흉내를 내서는 안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우리 단체에서 2004년에 버마 문화이해 수업을 위해 현지에서 물품을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 버마의 승복이 있었다. 한국의 승려들은 온몸을 가리는 재색 승복을 입는데 비해 버마의 승려들이 입는 어깨를 드러내는 붉은색 승복이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승복을 구입해서보니 그것은 옷이라기보다 길다란 천이었다. 그 천을 마치 샤리처럼 둘둘 몸에 두르는 것이었다. 구입한 승복을 보면서 당시 강사를 맡은 버마 이주노동자에게 승려처럼 몸에 두르고 학생들에게 출연하는 것이 어떨까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 말을 듣자마자 펄쩍 뛰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불경스럽다는 것이다. 그토록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니 혹시 학교에 가지고 갔다가 철없는 아이들이 만지다가 떨어뜨려 밟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수업에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버마 문화이해수업을 하면서도 그 승복은 한번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책장 한 켠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러다가 2년쯤 지나 의정부의 절에 있다는 버마 스님 입으시라고 보내 드렸다.

버마 남성들은 누구나 한 번씩 승려 생활을 경험한다

버마는 옛날부터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때면 가장 먼저 절을 세우고 절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버마인들 중 남자들은 누구나 어렸을 때 승려의 생활을 해보아야 한다고 한다.

동자승이라고들 표현하던데 나이 어린 남자아이들이 가족과 친지, 동네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절로 들어가 며칠간 스님의 생활을 한다고 한다.

스님 생활을 하는 기간은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 듯해서 어떤 버마인은 1주일간 있었다고 하고 어떤 버마인은 한달간 있으면서 낮에는 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다시 절로 가서 지내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님의 생활이 잘 맞고 본인이 강력히 희망하기도 하면 그대로 스님의 생활을 계속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동자승의 생활에 대해 물어봐주면 버마인들은 대체로 좋아한다. 많은 버마인들이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스님의 생활이 자신에게는 아주 잘 맞았고 그대로 스님이 될까 생각도 했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머님(버마인들을 이해하는 데 어머니는 중요한 키워드이다!)이 극구 만류하여서 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인 셈인데,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그 생활은 현실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들의 이런 태도들은 한국에서도 대체로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14년 동안 있었다는 어떤 버마인은 귀국하면 그 동안 저축해놓은 돈으로 절을 세우고 싶다는 희망을 밝히기도 했다. 그 친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이 사용하는 책상위에 어머님이 모셔놓은 불상이 있었고, 아침이면 어머님은 불상 앞에서 불경을 읊음으로써 아들을 깨우곤 했다는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어떤 버마인은 한국에서 하루 12시간씩, 휴일도 없이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버마에 있는 절에 고스란히 기탁하기도 하였다. 버마인들 중에는 가끔 이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의정부에 있는 어떤 작은 절에는 버마 승려가 기거하고 있는데 새해나 부처님 오신날이면 버마인들이 모여들어 예불을 올리기도 하는데 버마에 있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든지 등 길흉사가 생겼을 때에도 이 절에서 명복을 빌기도 하고 기탁을 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뭔가 간절히 기원할 일이 있을 때면 그러는 것 같다.

단속 때문에 숨도 크게 못 쉬던 그들, 사발통문 돌려 모이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음으로 양으로 불교적 생활태도를 공통적으로 학습해오고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시켜온 사람들이니 이들이 승려에 대해 경외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 이들이 이번 버마의 유혈사태를 접하고 울분을 참지 못하는 것이 꼭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9월 30일에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버마이주노동자들이 100여명 정도 서울시 한남동 버마대사관 앞에 운집하였다. 불과 이틀전에 사발통문을 돌려서 열린 집회였는데, 모두가 불법체류자들이어서 평소에는 단속이 무서워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날의 집회에는 군부정권의 수장의 사진을 불태우는 퍼포먼스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두 명의 버마인들의 삭발도 있었다. 항쟁 초기에 버마 현지의 친지들로부터 급보를 전달받다가 버마 정부가 모든 통신망을 끊음으로써 이제는 소식조차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뭔가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버마 이주노동자들, 고국 민주화 염원하며 삭발

그런데 그 삭발식은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가끔 행하는 삭발식과는 달랐다. 무대에서, 의자에 앉아, 하얀 천을 길게 늘어뜨리고, 이발도구를 사용하여, 운동가요가 비장하게 깔리는, 그런 삭발식이 아니었다.

그냥 땅바닥에서, 쭈그리고 앉아, 동료가, 식당에서 (고기 자를 때) 쓰는 가위로 긴 머리카락을 슥슥 잘라내고 일회용 면도기로 미는, 그래서 꼭 머리통에서 피가 흐를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주는 무지막지한 삭발식이었다.
▲ 땅바닥에 앉아 식당 가위와 일회용 면도기로 삭발식을 진행하는 버마 노동자들. 비장하기보다 참혹한 풍경이다. ⓒ석원정

그 삭발식은 비장하기보다 참혹하게 여겨졌는데, 그게 역설적으로 버마 민주화항쟁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버마인들의 목숨을 건 민중항쟁에 온 세계가 관심을 갖고 있고, 한국의 각계각층이 안타까움을 갖고 돕고 싶어하고 이번에는 그들의 민주화항쟁이 성공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절을 급습하여 승려들을 수백 명씩 연행하고, 평화적인 시위대에게 발포하고, 사체를 불태우고, 그 와중에 부상자도 화장시켜버리고 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버마상황을 좀더 깊숙이 알고 있는 이들의 예측이 '부정적'이라는 것과, 그 부정적인 예측이 현실화되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찌하면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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