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대로 먹으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우리는 달랐다!"

세상을 바꾸는 '식탁 혁명', 로컬푸드 <6>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미 FTA의 효과를 놓고 팽팽히 맞서는 찬반 양측 모두 한미 FTA로 한국 농업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한미 FTA 찬성 측은 어차피 농업의 몰락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굳이 농업에 매달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식이다. 대다수 대선 후보도 이런 인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상태대로라면 소농의 '퇴출'은 시간문제다. 아니 이미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다. 현재 농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40대 이하의 비율은 1970년대 35%에서 2003년 3.5%로 급감했다. 2013년경에는 1% 미만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25%에 불과한 먹을거리 자급률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이 땅에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이 하찮게 여겨지는 상황 한 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진행된다. 먹을거리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006년의 '불량 급식' 파동과 같은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하는 일이 계속 반복된다. 값 싸고 질 낮은 중국산 먹을거리로 식탁이 점령된 지는 오래다.

그 영향인지 '참살이(웰빙)'를 내세운 값비싼 먹을거리가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를 유혹해 주머니를 열게 한다. 먹을거리 산업은 매년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국내 먹을거리 산업은 2001년 26조 원에서 2005년 36조 원으로 30% 가까이 늘었다. 온갖 먹을거리 유행을 전하는 언론은 이런 상황을 부추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먹을거리 양극화'가 도래했다. 구매력이 없는 소비자는 값싼 먹을거리로 겨우 배만 채우는 실정이다. 치명적인 전염병에 감염될 위험이 크다는 경고에도 미국산 쇠고기를 주저 없이 집어 든다. 그 결과는 끔찍하다. 빈부 격차가 다음 세대의 건강 상태로 이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은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극복하고자 '로컬푸드(local food·지역 먹을거리)'에 주목했다.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매개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결돼 먹을거리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초국적기업을 견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농업의 회생과 먹을거리를 둘러싼 문제를 해결할 단초가 제공되리라는 판단 때문이다(☞관련 기사 : "지역 먹을거리? 바로 이런 거야!" ).

이미 2004년부터 지역 먹을거리에 관심을 가지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국내의 다양한 실천에 주목해온 데 이어 앞으로 8회에 걸쳐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는 지역 먹을거리 실천의 현장을 보여줄 예정이다. 지역 먹을거리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을 함께 고민하면서 한국의 상황에 맞는 대안을 찾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재단의 취재 지원을 통해 진행되었다. 또 취재 과정에서 허남혁 로컬푸드시스템학회 간사, 한재각 민주노동당 녹색정치사업단 집행위원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편집자>

① "세상에 '믿고' 먹을 게 없다고? 이걸 먹어라!"

② "빈 땅을 찾아라! 텃밭을 일궈라! 도시가 바뀐다"

③ "우리 아이 급식, 언제까지 이대로 둘 건가요?"

④ "'이윤에 굶주린 자'들을 굶겨 죽여라"

⑤ "이것은 '유행'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⑦ "'착한' 먹을거리, 과연 착하기만 할까?"

⑧ "대구의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회사원 김 아무개 씨는 오늘도 점심을 앞두고 고민이 시작된다. "오늘은 뭐 먹을래요?" 출출한 배를 움켜쥐고 동료와 늘 같은 질문을 주고받지만 싸고 질 높은, 만족스러운 그 '한 끼'를 고르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간 스무 살부터 늘 반복되는 '빈곤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저녁 회식? 마찬가지다.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빈번히 터지는 중국산 먹을거리 사고는 한국인의 먹을거리 선택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누가 걱정 없이 먹을 만한 좋은 음식 안 갖다주나' 바라보지만 소용없는 일. 한국의 수많은 '김 아무개 씨'는 오늘도 사내 식당, 학교 식당, 회사 주변 식당에서 불만 섞인 숟가락을 놀린다.

3년 전, 미국 한 대학에서 식당을 이용하던 학생들이 스스로 먹을거리를 바꾸겠다며 일어섰다. 이제 이곳에서는 학교 식당에 공급되는 먹을거리를 지역 먹을거리로 전환하는 일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바로 미국 내 '농장에서 대학까지'(farm-to-college)' 운동을 이끄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UCSC) 이야기다.

대형 급식업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눈 뜬 학생들'

▲ 대학 내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은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UCSC 학생들은 급식업체 소덱소를 쫓아냈고, 또 다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도 함께 요구했다. ⓒ프레시안

한적한 해변도시 주택가 사이에 자리 잡은 산타크루즈 대학은 교문부터 차로 5분을 달려도 아무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캠퍼스였다. 이 대학 사람들이 학교 식당을 이용하는 빈도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이곳 학교 식당은 하루 8000끼를 공급하고 있다.

'농장에서 대학까지' 프로젝트를 이끈 주요 공로자 중 한 명인 낸시 베일 씨. 그는 이 대학 내 '농업생태학 및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연구소'(CASFS) 직원이다. 그는 "30년간 UCSC의 식당을 운영했던 급식업체 소덱소(Sodexho)와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던 건 직원도, 교수도 아닌 학생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소덱소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의 학교, 회사, 병원 6000여 곳의 급식 위탁 운영을 맡은 미국 최대 급식업체다. 2004년 UCSC 학생단체 '노동자와의 연대를 위한 모임'은 소덱소의 열악한 노동조건 현실을 고발하며 '소덱소를 몰아내자(Dump Sodexho)'라는 이름으로 서명 운동을 벌였다. 6개월 뒤 UCSC 행정 당국은 마침내 소덱소와의 30년 계약을 해지했다.

지역 먹을거리가 학교로 들어오는 물꼬가 트인 것이 바로 이때였다. 학교는 식당 직원들을 직접 고용하고 식품업체와 직접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사실 소덱소와 계약을 맺고 있을 당시에도 먹을거리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기 농업을 연구하는 모임(SOS)' 소속 학생은 2003년에도 학교 식당 관계자들을 만나 지속 가능한 먹을거리 체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UCSC 식당을 장악하고 있던 소덱소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이런 노력을 번번이 헛되게 만들었다.

유기 농업, 지역 먹을거리, 그리고 '노동환경'이 구매조건

소덱소를 쫓아낸 학생들은 이후 본격적인 대안 마련에 들어갔다. 노동·건강·환경적 측면에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한 먹을거리 체계 구축이 관건이었다. 베일 씨는 "새로 임명된 학교식당 지배인 스콧 베를린 씨는 학생, 교직원, 지역 농민, 지역단체 대표들이 함께 만든 실무위원회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며 "이는 '농장에서 대학까지' 프로그램 정착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 UCSC 캠퍼스 내 식당들은 이제 '지역 먹을거리'와 '유기 농업'을 우선원칙으로 먹을거리를 구매한다. 학생, 조리사, 지역농민 모두 만족스런 평가를 내리고 있다. ⓒ프레시안

실무위원회 회의에서 UCSC 식당의 기본 구매방침이 정해졌다. 산타크루즈 반경 250마일(375㎞) 이내에서 생산된 지역 먹을거리를 우선 구입해야 하며 유기 농업으로 재배된 먹을거리를 구입해야 했다. 여기에 농장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할 것, 건강보험 및 복지시설 등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는 조건이 더해졌다.

이제 UCSC 캠퍼스 내에 있는 5개의 학교식당은 모두 인근 7개의 농장에서 유기 농업으로 생산한 지역 먹을거리를 취급한다. 2005년 식당 매출의 5%를 차지했던 지역 먹을거리는 2006년 15%를 넘었고 2007년 6월에는 20%를 차지했다. 나머지 80%는 산타크루즈 지역 유통업체인 레드야드(Ledyard)가 공급하고 있다.

이렇게 구축된 체계는 학생, 식당, 농민 모두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식당직원 드윗 콜린 씨는 "오랫동안 신선한 먹을거리를 기다려온 조리사들은 정말 기뻐한다"며 "새롭고 건강한 요리를 접하는 학생들이 만족하는 것은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UCSC에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테렌스 웰치 씨 역시 "농민들은 실무위원회를 통해 소비자인 학생과 직원들과 접촉할 기회를 얻고 이를 농사에 반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전했다.

"캠퍼스를 바꾼 학생은 사회도 바꿀 수 있다"

UCSC '농장에서 학교까지'의 성공사례는 곧 다른 지역 캘리포니아 주립대 학생들을 자극했다. 2004년 10개 주립 대학 학생대표는 연맹을 결성하고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행정 당국이 지역 먹을거리, 그리고 사회정의에 맞는 먹을거리를 구입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대학이 이전까지 먹을거리 구입기준으로 삼지 않았던 '노동조건'도 구매 기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소덱소 퇴치 운동을 이끌었던 학생이자 현재 '농장에서 대학까지'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팀 갈라누 씨. ⓒ프레시안

학생시절 소덱소 퇴치 운동을 주도했던 팀 갈라누 씨는 "2004년 다른 10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며 "이제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중 소덱소에 급식을 맡긴 학교는 데이비스 캠퍼스(UC Davis) 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는 "캘리포니아 전역에 있는 200곳 이상의 대학 캠퍼스가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며 "재학생 수만 통털어 100만 명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캘리포니아뿐만 아니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힘입어 '농장에서 대학까지'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하루 1만 4000여 끼를 공급하는 메사추세츠 대학 식당, 5200여 끼를 공급하는 미들버리 대학 식당 역시 최근 '지역 먹을거리 유통망'을 구축했다.

위스콘신 대학 역시 지난 2000년 12월 미국 공립대로서는 처음으로 유기 농업으로 재배한 지역 먹을거리를 구내식당 메뉴에 추가했다. 이 대학의 6개 캠퍼스는 이제 지역 농민으로부터 직접 먹을거리를 구매하고 있다. 2005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전역 99개 사립대, 27개 공립대가 '농장에서 대학까지' 프로그램 도입에 성공했다. 이중 40% 이상 대학에서 학생들이 프로그램 구축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갈라누 씨는 "학교 행정부가 학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기는 쉽다"며 "그러나 '학생들과 같이 하겠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부분은 바로 이것"이라며 "학생들은 캠퍼스를 바꾸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꾸고 또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계속)

'신선하고 건강한 먹을거리'에는 인기가 따른다

'농장에서 대학까지' 운동의 확산에는 이미 미국 내에서 활성화된 농민장터, 지역 사회 지원 농업(CSA) 프로그램 등 다른 형태의 지역 먹을거리 운동이 큰 도움이 됐다. 자체 대학농장을 통해 지역 사회 지원 농업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UCSC 학생들이 지역 먹을거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 먹을거리'를 주요 경영가치로 내세우는 외식업체와 급식업체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 또한 이 운동과 맞물려 톡톡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 구글 본사 식당 '카페150'. 인근 회사 직원들도 찾아올 만큼 인기가 높다. ⓒ프레시안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급식업체 '보나페티(Bon Appetite)'는 이 지역 내 먹을거리 전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매주 100만 끼 이상을 야후, 오라클, 이베이, 아디다스 등 400여 곳이 넘는 식당에 공급하는 대형 급식업체인 이곳의 기본 경영방침은 식당마다 주방장들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식단을 짜고 직접 요리를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다. 이런 방침을 통해 각 주방장이 지역 먹을거리 구매에 사용하는 액수는 연간 3000만 달러(약 300억 원)에 이른다.

지난 2000년 보나페티는 각 지역 식당에서 150마일(240㎞) 이내에서 나온 지역 먹을거리를 20% 수준으로 사용한다는 기준을 정했다. 특히 먹을거리가 풍부한 북서부 지역에는 이 비율을 80%로 정했다. 1년 중 하루는 '지역 먹을거리의 날'(eat local challenge)로 정해 보나페티가 운영하는 전 식당에서 100% 지역 먹을거리로 만든 요리를 공급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있는 인터넷 검색엔진 업체 구글(Google) 본사 사내식당도 주목할만한 사례다. 이곳 식당 이름은 '카페 150'. 반경 150마일(240km) 안에서 생산된 신선한 먹을거리만 취급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소문이 퍼지면서 실리콘밸리 내 다른 업체 직원들까지 이 식당으로 몰리자 기업들은 '점심을 먹으며 교환하는 첨단 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역 먹을거리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고 한다.

1971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문을 연 '쉐파니즈'(Chez Panisse)는 빌 클린턴과 달라이 라마가 다녀가기도 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식당이자 '유기농 지역 먹을거리'를 취급하는 식당이다. 이곳 설립자이자 요리사인 엘리스 워터 씨는 미국에서 지역 먹을거리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역 먹을거리의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그가 강조하는 '요리의 기본'은 "가능한 한 가장 신선하고 가장 건강한 먹을거리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