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민주화 20년, 경제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타협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민주화 20년, 경제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타협

민주화 20년: 우리는 왜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나?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나라는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사소하게는 읽고 싶은 책 읽고 하고 싶은 말 하면서 살 수 있는 것부터, 정당들이 대통령 후보 선출에 국민경선제도를 도입하는 일, 과거에는 아예 사회적 아젠다에서 배제되었던 환경, 소수자 인권 등의 문제가 일상적으로 논의되는 것 등, 지금은 우리가 당연시하지만 20년 전에는 상상하기도 힘 들었던 일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지난 20년이 얼마나 긍정적이었던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적대적 인수합병이 자유화되면서 기업들의 경영권이 불안해지고 주주들의 배당요구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상장기업들은 '주가 관리'를 위해 투자를 줄여서라도 당장 높은 이익을 내고 배당을 많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주식시장은 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기구가 아니라 자금을 뽑아가는 기구로 전락하였다.
  
  자본 자유화로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자본 지배가 증가하고, 금융규제가 완화되면서 금융기관들이 위험성이 높은 기업금융보다는 소비자 금융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특히 중소기업이 투자자금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더해, 대기업들이 단기적 이익을 올리기 위해 하청단가를 무리하게 내리기 시작하면서, 중소기업들은 이윤에 압박을 받고 투자능력이 더 약화되었다. 주식시장의 '단기주의'가 상장된 대기업뿐이 아니라 상장되지 않은 중소기업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 기업들은 사상최대의 현금을 쌓아두고 이제는 미국보다도 낮은 부채비율을 가지고 있는 '건전 경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경제적 투자는 예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외환위기 때까지 국민소득 대비 13-4% 대에 이르렀던 설비투자는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1998년에는 8.4%까지 떨어졌다가 2000년 12.8%로 회복되는가 싶더니, 2001년 11% 로 떨어진 이후 계속 하락을 거듭하여, 작년에는 외환위기 이전의 절반 수준인 7.4%까지 떨어졌다. 한국은행에 의하면 올 해는 6%대로 떨어질 것이 우려된다고 한다.
  
  투자가 없으니 일자리도 잘 생기지 않고, 기업들이 단기 이윤을 높이는데 주력하게 되면서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도 비정규적의 비율이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비정규직 비율이 OECD 최고 수준으로 솟아올랐다. 이에 더해, '사오정', '오륙도'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정규직도 고용이 전에 없이 불안해졌다. 고용이 불안해지니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자제하고 저축을 늘리면서 이것이 내수부진으로 이어져 투자의욕을 더 꺾는 악순환 기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복지제도가 조금 확대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하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아직도 국제적 기준으로 보아 창피한 수준이다), 사회 관념적으로는 민주화 전보다도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덜 한 '잔인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민주화 이후에 도리어, 시장이 아무리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와도 정치권력이 독재적으로 강제한 일이 아니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장주의적 논리가 더 심하게 관철되고 있다. '진보성'을 내세우며,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100년 전 일제와 협력한 친일파의 죄를 물어 재산환수까지 한다는 '정의로운' 정부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당장 힘들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 대해서는 자유무역 협정이니 노동시장 유연화니 하는 시장논리를 내세우며 더 양보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보수 언론에서 '좌파 정권'이라고 욕 먹는 정부가 어떤 면에서는 과거 군부정권들보다도 불평등 문제에 대해 둔감하다. 과거 군부 정권들이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을 막는다며 억제한 지나친 임금 격차, 사치품 수입, 조기 유학 등 행동에 대해서 민주정부들이 더 관대한 태도를 보여 왔다. 불평등을 강화하는 정책을 쓰는 것을 넘어,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왜 민주화 이후 '경제 민주화'는 더 퇴보하였는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민주화 이후에 점점 '보통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지고 있는가 – 다시 말해서 왜 '경제 민주화'는 도리어 더 퇴보했는가 –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니 민주국가에서는 다수가 원하는, 다수를 위하는 경제 정책이 채택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파멸시킬 것이라며 민주주의를 반대했다), 따라서 다수를 탄압하는 독재를 타도했는데 불평등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졌다는 역설적인 결과는 우리 민주화 과정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우선 들 수 잇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재정권이 경제분야에서는 지극히 개입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이고 심지어는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서구의 경우 민주주의를 원하는 세력들이 정부 개입의 확대를 외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 민주화의 두 번째 역사적 특수성은 그것이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기세를 떨치는 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같은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이 여러 가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해결책이 별 성찰 없이 '정답' 내지는 최소한 '대세'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재벌문제이다.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을 사회적 필요에 따라 규제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일환임은 누구나 다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 민주화 시대에 재벌문제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주주자본주의적 시각에서 재벌 총수 가족들에 대한 '소액주주' 권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진보' 세력마저도, 기업의 주주들 사이에서 '1주 1표'의 원리의 관철시키는 것을 기업 의사결정의 '민주화'로 보고, 주주권의 강화를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주주권 강화는 민주주의의 '1인 1표'의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1원 1표'의 논리에 기초한 것으로,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종업원, 지역사회, 하청업체, 국민 전체 등 주주를 제외한 다른 이해당사자 집단들은 아예 '투표권'이 없는 것이 기업이다. 따라서 재벌문제가 진정으로 민주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려면, 그들의 경영에 여타 이해당사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문제,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어떤 재벌 정책이 대다수 국민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가 우리 논의의 초점이 되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서 소위 '진보' 세력이 (정확한 돈의 출처도 알 길이 없는) 국제금융자본이 투명성, 심지어는 도덕성을 들먹이면서 재벌을 공격하는데 지원군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은 것은, 민주화가 단순히 독재시대에 강한 권한을 가졌던 행정부나 재벌 총수 가족들과 같은 집단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의 민주화가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위해서 채택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바탕한 대항세력의 강화라는 민주주의적 수단이 아니라, 정부 개입 자체의 축소와 주주권 강화라는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따라서 민주주의의 이상에 어긋나는, 수단들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민주주의 하에서 군부독재 때보다 정치적 자유는 비교가 안 되게 늘어났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생활이 불안해지고 사회는 더 불평등하며 잔인해지는 역설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반목하는 집단들이 서로 자신의 영역에서는 시장 논리의 제약을 원하면서 상대방의 경우에는 시장논리를 강하게 적용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약화시키고 싶어하는 상황이다. 자본가들은 시장논리를 수정하여 경영권 방어장치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농산물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이나 노동자 권익 보호를 원하는 노조는 자기 이익을 위해 시장원리를 해치는 집단으로 비난하고 있다. 반대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일반 국민들은 자신들의 생계 문제가 걸린 영역에서는 시장원리의 확대에 반대하여 보호무역과 정부규제의 지속을 원하면서, 금융자본가들이 시장원리에 따라 재벌 총수 가족들을 압박하는 데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 결과는 서로 힘을 약화시키고 공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어 '1원1표'의 시장주의 원리가 극단적으로 관철되면, 결국 우리나라는 돈을 많이 가진 국제금융자본의 뜻대로 개조될 수 밖에 없다. 이미 약간씩 조짐이 보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자본가들이 생산적 투자를 포기하고 자신들도 금융자본화 하게 되면, 일반 국민은 더 피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반목하는 집단들이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고, 서로의 힘을 강화시키면서 균형을 맞출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대타협이다. 반목하는 집단들이 시장원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일정 정도 시장의 논리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미래, 특히 보통 사람들의 미래는 암울하다.
  
  현재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한 축에는 아직도 우리경제의 핵심부를 아직도 장악하고 있는 재벌 그룹들이 서고, 다른 한 축에는 '국민들'로 요약되는 그 외의 여러 집단들이 서야 할 것이다. 물론 더 노동운동이 발달한 나라라면 '다른 축'의 주체는 노조가 되겠지만, 노조의 조직률도 매우 낮고 노조의 정당성도 약한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그것은 정치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 (새마을 운동에서와 같은 강제적인, 그리고 외환 위기 직후 '국민 금 모으기 운동'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자발적인) '국민 동원'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국민' 이라는 범주는 충분히 현실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다.
  
  구체적인 내용은 더 깊은 토론과 타협을 통해 정해 나아가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대타협의 기본적인 줄기는 재벌들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고 그 대가로 국민들이 더 적극적인 투자, 고용창출, 노사관계에 대한 전향적 접근, 그리고 복지국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더 단순화시켜 이야기하자면 재벌의 경영권 보호와 복지국가를 맞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문제를 중심으로 필자가 생각하는 사회적 대타협의 내용을 설명해 보겠다.
  
  재벌문제를 보는 시각
  
  고성장 시대를 통해 우리 재벌기업들은 단시간에 급격하게 덩치가 커졌기 때문에 총수 가족의 지분이 매우 작고, 따라서 상속세, 증여세를 제대로 내면서 2세, 3세가 경영권을 승계하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최근까지는 지주회사가 금지되어 있어서 복잡한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구조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 졌다. 또 자본시장 개방 및 자유화 전에는 적대적 인수, 합병이 제도적으로 힘들었고 덩치 큰 외국 금융자본도 못 들어왔기 때문에 내부지분 (가족지분 및 순환출자분)이 낮아도 경영권을 방어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변칙 증여, 상속 없이는 경영권 승계뿐 아니라 그룹 자체의 유지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기업집단보다 독립기업이 더 좋다고 믿는 사람들은 재벌 2세, 3세의 탈세를 처벌하여 그룹 구조가 해체되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룹 구조 없이 후진국에서 기업이 계속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다각화를 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은 힘들다. 삼성은 설탕이나 양복지를 판 돈을 가지고 반도체에 진출한 것이고, 현대는 건설에서 번 돈으로 자동차를 키운 것이다. 핀란드의 노키아도 벌목, 고무, 전선 등에서 번 돈을 17년 동안 이윤도 못 내는 전자업체에 부어 넣어 세계 최고의 이동전화 회사를 키워낸 것이다. 앞으로 현대나 삼성이 자동차나 전자에서 번 돈을 가지고 새로이 진출할 사업이 분명히 생길 것이다.
  
  그러면 기업집단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재벌의 탈세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한 가지 예이지만,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그룹구조가 와해될 우려가 있는 재벌기업에 국민연금이나 국영은행들이 '국민 주주'로 참여해 일단 그룹 구조를 유지해 주면서 재벌 2세, 3세들에게 (단기주의 경영을 막기 위해) 10년 내지 15년 동안 정도 유예기간을 주고, 그 기간이 지났을 때 경영성과가 안 좋다면 그들을 경영에서 손을 떼게 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재벌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는 과정에서 최근 복지국가 소사이어티가 주장한 대로 콘쩨른법을 만들어, 현재 법적 실체가 없는 재벌그룹의 권한과 의무를 명확히 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재벌들은 적대적 인수합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그룹구조를 유지하면서 장기적 시각에서 경영을 할 수 있고, 2세, 3세의 경영능력을 검증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재벌기업들이 더 장기적인 투자를 하고, 고용을 창출하고, 하청기업을 덜 쥐어짜는 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해진다. 물론 이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해진다고 재벌들이 꼭 그렇게 행동한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경영권을 보장해 주는 과정에서 명시적인 사회적 협약을 통해 투자, 고용창출, 노사관계 개선, 하청기업 지원, 복지국가 건설 등에 관해 재벌들의 의무를 명시해야 한다.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재벌들의 나쁜 행실을 지적하며 "그 나쁜 놈들을 왜 도와줘야 하느냐" 하며 필자를 질책하신다. 삼성 에버랜드 사건이 한창일 때 방금 이야기한 요지로 한 일간지에 정기 칼럼을 썼더니, 한 독자는 인터넷 댓글을 통해 필자가 외국에 오래 살다 보니 한국 물정을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삼성이 옛날에 사카린 밀수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평소에 독자의 댓글에 직접 반응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필자이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오해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다음 달 칼럼에 우리나라 재벌들의 도덕성 문제에 관해 글을 썼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재벌들은 나쁜 짓을 많이 했고, 아직도 많이 하고 있다. 필자가 외국에 20년 이상 살았지만, 삼성의 사카린 밀수 전력도 모르고 재벌의 장단점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벌들이 밉다고 옥죄어 그들이 망하거나 해체되었을 때 그들을 인수할 외국 자본들이 재벌들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서구의 기업들은 1960년대까지 수 백년 동안 원주민 살육, 영토 약탈, 식민지 수탈을 통해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설탕, 면화, 담배 등 노예를 써서 생산하던 원료를 썼던 기업들이 번 돈은 어떤 도덕적 기준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는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고 비난하지만, 세계 유수의 영국계 모 은행은 아편전쟁에 돈을 댔던 전력이 있다. 아편전쟁이 어떤 전쟁인가? 영국정부가 중국에 아편을 밀매하다가 중국 정부의 규제에 부딪치자 벌인, 제국주의적 침략치고도 뻔뻔스러운 전쟁이 아니었던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남미에서 활동하는 많은 미국 기업들은 심지어 군부 쿠데타까지 지원하면서 후진국 정치에 개입했다. 우리 재벌들이 부당하게 노조를 탄압한다고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많은 기업들은 핑커튼 등 사설 탐정단을 고용하여 파업을 진압하면서 파업하는 노동자를 쏴 죽이기까지 했다.
  
  역사적 얼룩뿐이 아니다. 지금도 엔론, 월드콤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규모의 회계부정도 많고, 부정부패에 연루된 회사도 많다. 특히 이들이 후진국에 진출하면 노동자 착취를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후진국의 민간요법을 훔쳐 약으로 만들어 특허를 내는 등 좋지 않은 짓을 더 많이 한다. 특히 문제가 많은 것은 사모펀드들인데, 이들 중 많은 수는 조세도피처에 위치하여 노골적으로 탈세를 하고 있으며, 지배구조도 불투명하다. 그러다 보니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돈 중에 부정한 돈이 있는지 아닌지 알 길도 없다.
  
  선진국 자본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본이 외국자본보다 더 도덕적, 혹은 덜 도덕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벌문제를 도덕성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거사까지 들추면 '깨끗한' 자본은 거의 없다. 따라서 도덕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하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물론 필자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불순한' 것이기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폐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고쳐서 최대한 다수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전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재벌이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것도, 재벌들이 꼭 예뻐서가 아니라, 재벌들은 우리 사회에 뿌리가 있고 국민들에게 명백한 역사적 빚을 지고 있기에 우리 사회의 다른 세력들과 '타협'을 할 동기도 더 강하고 그러한 압력에도 더 약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투쟁하는 입장에서 볼 때도, 재벌들은 그나마 이씨 가족, 정씨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실체가 있고, 과거에 국민들에게 진 빚, 잘 알려진 나쁜 행실의 기록 등 약점이 많아 싸우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재벌총수 가문들을 쫓아내고 국제금융자본이 우리 경제를 장악하게 되면, 우리는 뉴욕과 런던에 앉아 있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펀드매니저들과 싸워야 한다. 설사 불미스러운 일이 밝혀져도 이런 펀드들은 여차하면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국내여론에 별로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재벌 기업들은 총수 가족들 것만도 아니지만 주주들의 것만도 아니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보조를 받고, 그들이 신산업에 진출한 초기에는 보호무역을 통해 국민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좋지 않은 제품을 사서 쓰며 키워낸 국민들의 기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 문제를 탈세나 주주권 보호라는 좁은 시각이 아니라 국민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보는 시각
  
  재벌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는 대가로 우리 국민들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물론 자세한 내용은 더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투자, 고용창출, 노사관계 개선, 하청기업 지원, 복지국가 건설 등이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은 복지국가의 건설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복지국가는, 미국식으로 최저선 이하로 떨어지는 사람만 도와주는 '사회적 안전망' 개념의 선별적 복지국가가 아니라 유럽식으로 '모두가 참여하는' 복지국가이다. 모든 사람이 육아, 교육, 여가 등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를 공유하며, 모든 사람이 질병, 실업, 노령화 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인식하에서, 모든 사람이 능력이 있을 때 돈을 모았다가 필요할 때 찾아 쓰는 '전국민 보험'의 개념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은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장애인 등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도움을 받는 등 어느 정도의 재분배 요소는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미국식으로 잘 사는 사람에게 돈을 걷어 못 사는 사람을 도와주는 체제가 되면 중류층 이상에서 구조적인 반복지주의를 조장하게 되어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에 문제가 생긴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복지국가가 이야기만 나오면 최근 독일 등 유럽 일부 국가의 최근 저성장을 지적하면서 '복지병'을 걱정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1990년대 이전에는 복지국가가 작은 미국이 유럽 나라들보다 도리어 성장률이 낮았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성장률이 높아진 1990년대 이후에도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저성장을 한 것도 아니고, 핀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미국보다 성장이 빠른 유럽나라들이 많았다. 그리고 미국은 노동시간이 유럽 나라들보다 10-30% 높기 때문에, 노동시간 당 국민소득을 계산하면 미국에 유리한 구매력 기준으로 하여도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나라들이 소득이 더 높다. 독일은 1990년대 이후 성장률이 낮았지만, 이는 복지국가보다는 통일비용에 기인한 것이 크다 (지금도 독일은 구동독 지역에 국민소득 5%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주고 있다). 1990년대 이전에도 독일은 복지국가가 잘 발달되어 있었지만, 경제성장을 잘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지출은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올라가서 GDP 대비 7-8% 선이 되었지만, 이는 OECD 평균 24% (1998년) 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낮은 수준으로, '복지병'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물론 이 차이 중의 일부는 선진국의 고령화로 설명되지만, 같은 고령화 사회이면서도 일본은 그 비율이 15% 부근이고 스웨덴 등 북구는 30% 이상인 것을 보면 우리의 복지지출 수준이 낮은 것을 단순히 인구 연령구조로 설명할 수는 없다. 더욱이 우리의 복지지출 비율은 우리보다 소득도 낮고 인구도 훨씬 젊은 남미의 칠레 (11%), 브라질 (12%) 코스타 리카 (13%, 이상 모두 1996년 기준) 보다도 훨씬 낮다.
  
  물론 복지제도를 만들 때 조심스럽게 할 필요는 있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복지제도도 잘못 설계하면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형평성을 강조하되 선택의 자유와 개인의 특수성을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또 빈곤을 탈출하자마자 복지 혜택 감소, 세금 부담 등으로 경제적 부담이 급격히 높아지지 않도록 하여 빈민들이 소위 "복지의 덫" (welfare trap) 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복지제도를 노동자 재교육과 잘 연계하여 복지의 생산적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 등 북구제국의 복지제도는 단순히 실업자 생계를 돕기 위해 실업보험을 지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실업자를 재교육하고 취업을 알선하며, 필요 시에는 이주 보조금까지 지급한다. 재교육 받는 기간 중에는 실직 이전 임금의 80%까지 실업 수당을 지불한다. 그런 반면에 재교육 후 정부가 알선한 새 직장을 일정 회수 이상 거부하면 실업수당을 제한하여 복지제도의 남용을 막는다. 이러한 기제가 있기에 담세율이 세계 최고인 나라들이 실업률도 낮고, 성장률도 미국을 능가하며, 하다 못해 경영자의 시각에서 주로 평가하는 기업환경 지수 같은 데에서도 세계 최상위권에 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된 것이다.
  
  효율적인 복지국가는 적극적인 개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흔히 복지국가는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믿는 사람이 많은데, 복지국가가 잘 되어 있으면 노동자들이 실직되어도 생계가 위협받지 않고 재교육을 통해 재취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잘 되어 있는 스웨덴, 핀란드, 네덜란드 등은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랑하는 미국보다도 보호무역주의가 약하다. 노동자들이 변화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공정 자동화율도 높고 기업의 구조조정도 상대적으로 쉽다 (스웨덴은 일본과 함께 노동자 1인당 산업 로봇의 댓수가 세계 최고이다). 이렇기 때문에 북구 국가들은 노조 조직율이 80%에 달하지만 '유연한' 노동시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구식의 복지국가를 하면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 대한 저항이 줄어들고 기업 복지비 부담을 줄일 수 있기에, 기업들도 더 유연하게 사업을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복지국가는 왜곡된 인적자원 배분을 교정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우리 나라는 지금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의사, 변호사, 공무원 등 고용 안정성이 높은 직장에만 비정상적으로 몰리고 있다. 이러한 이공계 기피 현상은 앞으로 기술혁신으로 승부해야 할 우리 경제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우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통해 고용불안이 해소되면 이러한 인적자원 배분의 왜곡이 많이 시정되어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브레이크가 있기에 속력을 내어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것처럼, 안전장치가 있을 때 개인들도 직업에 대해 더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대타협은 가능한가?
  
  필자의 이야기에 수긍하시는 분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에서 유럽식, 특히 북구식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겠냐며 회의를 표시한다. 우리나라는 집단 간의 갈등의 골이 너무 깊고, 노사 협력의 전통이 없으며, 조세저항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하루 아침에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점은 유럽 여러 나라들도 처음부터 조건이 좋아 복지국가를 하루 아침에 손쉽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단간의 대립과 갈등도 우리나라만큼 겪은 나라들이 많다. 핀란드는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에서 독립하면서 좌우내전을 치르고 정치적으로 두 쪽이 났던 나라이다. 스웨덴은 1920년대에는 세계에서 파업률이 제일 높았을 정도로 노사갈등이 심했던 나라이다. 삼성보다 훨씬 큰 발렌베리 재벌 때문에 재벌 문제도 우리나라보다 더 심각했던 나라이다.
  
  조세저항의 문제도 그렇다. 지금 스웨덴은 조세부담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나라 중에 하나이지만, 소득세를 1932년에야 도입한 나라이다. 소득세를 제일 먼저 도입한 영국 (1842년) 에 비하면 거의 한 세기, 하다 못 해 조세저항이 높기로 유명한 미국 (1913년) 에 비해도 20년이나 늦었던 나라이다. 세금을 걷어서 잘 쓰니 국민들이 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 스웨덴 국민들이 선천적으로 세금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스웨덴에서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인구 천만도 안 되는 나라에서 뭘 배우냐" 하고 비웃는다. 그러나 인구가 우리나라의 1/5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여서 스웨덴에서 못 배운다면, 반대로 우리 인구는 미국의 1/5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미국에서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미국도 스웨덴도 우리와 다른 나라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스웨덴이 우리와 비슷한 점이 훨씬 많은 나라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력과 군사력, 광활한 국토와 엄청난 자연자원, 끊임 없는 정복과 이민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 우리나라나 스웨덴과는 매우 다른 나라이다.
  
  역사적 조건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무게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이 세상 모든 나라가 아직도 원시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고를 수는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고르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대타협은 그 이름 그대로, 의식적으로 기존의 대립 틀을 깨고 새로운 합의점을 찾는 것이므로, 그를 구상하는 데에는 역사의 그림자보다는 미래의 비전에 대해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