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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차' 없는 세종로가 '진짜 세종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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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차' 없는 세종로가 '진짜 세종로'다

[열려라, 광화문광장!②] 세종로 일대의 공간적 의미와 가치

2005년 7월 12일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주대한민국 미합중국대사관 청사 이전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간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로써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미 대사관 청사가 용산구 용산동으로 옮겨가고, 세종로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렸다. 그런데 세종로는 어떤 길인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비각(*)에서 세종로 1번지 광화문에 이르는 가로(街路)로 길이 0.6㎞, 너비 100m이며 수도 서울과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상징하는 중심도로이다. 왕복 16차선으로, 일반국도 제48호선이다. 남쪽으로 태평로(太平路)와 이어지고 새문안길·종로·사직로와 교차한다. 도로 가운데를 지하철 5호선이 가로지르고 3호선과 1호선이 가까이 있다. (…) 역사적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건설할 때 너비 58자[尺] 규모로 뚫은 대로로서, 정부 관서인 6조(六曹)와 한성부 등의 주요 관아가 길 양쪽에 있다 하여 '육조앞' 또는 '육조거리'라 불렀다. (…)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옛 중앙청 정문에서 황토현 사거리까지의 길이 500m 구간을 도로로 지정한 뒤 세종의 시호를 따서 세종로라는 명칭을 붙였다. 도로 너비도 일제강점기에는 53m로 축소되었다가 1952년 3월 25일 현재의 너비로 확정되었으며, 1984년 11월 7일 가로명 제정시 세종로 사거리에서 중앙청까지로 기점 및 종점을 변경하고 길이도 현재와 같이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세종로')

'나라의 중심'이 겪었던 수난들

세종로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중심성'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이러한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인 세종로는 나라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때에 '도로원표'(道路元標) 제도가 도입되면서 세종로는 나라의 실제 지리적 중심이 되었다. 모든 거리의 기점이 되는 도로원표는 1914년에 현재의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1935년에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전'(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殿) 안으로 옮겨졌고, 1997년에 태평로로 옮겨졌다.

세종로의 '중심성'은 그 '역사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건설할 때 세종로를 나라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일제는 경복궁과 광화문을 훼손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종로를 크게 훼손했다. 본래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광화문과 세종로는 일직선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설하고(1925년) 그것과 마주보도록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총독부 청사를 건설하면서(1926년) 세종로를 '조선신궁'을 향하도록 개수했다. 이러한 일제의 '문화침략정책'으로 말미암아 세종로는 근정전-광화문 축에서 동쪽으로 5도 정도 어긋나게 되었다. 이어서 일제는 광화문을 부숴 없애려다가 큰 반대에 부딪혀서 그렇게는 못하고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의 북쪽으로 이전했다(1927년).

광화문은 한국전쟁 때에 그만 문루가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박정희는 1968년에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목조건물인 문루를 시멘트로 만들었으며, 그나마 원래의 자리에서 13m 뒤로 물러난 자리에 세우고, 또한 망가진 세종로와 일직선을 이루게 했다. 이로써 박정희가 쓴 현판을 이마에 붙인 '사이비 광화문'이 사라진 '조선신궁'을 향하고 서 있게 되었던 것이다.

통치와 감시의 거리로 전락한 세종로
▲ 세종로에 자리잡은 미국대사관. 이 앞에는 24시간 작동하는 감시카메라와 전경들의 '인의 장막'으로 인해 지나가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연합뉴스

세종로의 '중심성'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그 '역사성'을 가능한 한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종로를 다시 원래의 '육조거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세종로는 이미 너무나 많이 변형되었다. 되살릴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되살리되 사회의 변화를 올바로 반영해서 세종로의 가치를 잘 살려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래 왕조의 공간적 중심이었던 세종로가 대한민국의 수립과 함께 민주공화국의 공간적 중심으로 변모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했지만,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독재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사실을 고스란히 반영해서 세종로는 오랫동안 '시민의 거리'가 아니라 '통치의 거리'이자 '감시의 거리'였다.

세종로가 이렇게 되었던 이유는 두가지였다. 첫째, 이곳은 최고 통치자의 공간인 청와대로 나아가는 커다란 길목이었다. 따라서 역대의 독재자들은 시민들이 세종로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독재자들은 세종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애썼다. 예컨대 박정희 시대에는 세종로 네거리에 커다란 아치를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글씨로 온갖 계도성 표어를 써 붙여 놓고는 했다.

둘째, 미 대사관이 청와대와 지척인 세종로에 자리잡았다. 세계 어디서나 미 대사관은 삼엄한 경계의 대상이다. 미국 정부는 미 대사관 옆으로 지나가는 모든 시민들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전경들이 '인의 장막'을 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 대사관의 담장 밖으로 수십개의 가로등형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이 때문에 지금 세종로는 극히 불쾌한 거리이다.

'닭장차'와 이순신 동상 없는 '시민의 거리'로

이제 세종로는 민주공화국을 상징하는 '시민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민주화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구조적 조건이다. 또한 미 대사관의 이전은 그 자체로 민주화의 한 성과이면서 세종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물리적 조건이다. 이제 세종로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보할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곳으로 변모해야 한다. 참으로 거리의 흉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칙칙한 모습의 전경들과 '닭장차'들은 세종로에서 모두 사라져야 한다.

물론 시민들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곳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이 너도나도 무조건 목소리를 높이는 방식으로 세종로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세종로는 '시민의 거리'가 아니라 '난민의 거리'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세종로가 명실상부한 '시민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순신 동상을 하루빨리 현대미술관으로 옮겨야 한다. 이 동상은 박정희의 지시로 당시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조각가 김세중이 제작해서 1968년 4월 27일에 건립되었다. 그 동안 이 동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들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오른손으로 칼을 쥐고 있다거나, 칼이 비례에 맞지 않게 너무 크다거나, 이순신 장군의 표정이 너무 어둡다거나, 또한 이순신 장군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절의 인물로 표상하기 위해 세종로에 이렇듯 무서운 모습의 동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2004년 2월 16일에 이 동상을 부근의 '열린시민마당'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포기되고 말았다. 이것은 대단히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세종로 네거리에서 광화문, 경복궁, 백악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현대미술관에 전시되고 평가되는 것이 옳다.

미술관, 음악당, 도서관, 박물관이 있는 '문화의 거리'로
▲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시 중심가(civic center). 이곳에는 시청을 비롯해 공립 도서관, 미술 박물관, 오페라하우스, 심포니홀, 극장 등이 모여있다. ⓒ프레시안

이제 세종로는 '문화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세종로의 북쪽에는 경복궁이 자리잡고 있고, 서쪽에는 정부종합청사와 외교부 청사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에는 문화관광부와 미 대사관과 정보통신부와 교보빌딩이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미 대사관이 이전하고 행정도시가 완공되면, 미 대사관과 각종 정부 청사들은 문화시설로 전용되어야 한다.

특히 문화관광부(2000평)와 미 대사관(2000평)은 미국의 차관으로 건설되어 1961년에 완공된 것으로 중요하게 보존되어야 하는 건물들이다. 이 건물들은 예컨대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진국의 도심에는 미술관, 음악당, 도서관, 박물관 등의 4대 문화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다. 도심은 시민들이 가장 쉽고,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그곳에 이러한 문화시설들을 설치해서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문화생활을 하고, 그 결과 사회의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한 숙고의 산물이다. 우리도 이런 정책을 펼쳐야 한다. 정부종합청사를 8층 정도로 축소해서 도서관으로 활용하고, 문화관광부와 미 대사관과 정보통신부를 미술관이나 영상관 등으로 활용하면, 세종로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문화적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작은 것'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회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마치 독버섯처럼 없애기 어려운 친일과 독재의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대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는 시비가 하나 서 있다. '자유시'의 개척자로 알려진 주요한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시비이다. 그런데 주요한은 대표적인 친일문인이었다. 그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인데, 여기서 고이치(紘一)란 일본의 건국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뜻하며, 이 말 자체는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뜻이지만 실은 '천하가 천황의 것'이라는 뜻으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핵심적 이념으로 강력하게 활용되었던 것이다. 주요한은 문인협회, 문인보국회, 임전보국단, 언론보국회, 대의당, 대화동맹 등 수많은 부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했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해서 장렬히 전사할 것을 적극 촉구했다. 그런데 이런 자의 시비가 세종로에 버젓이 건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야 세종로는 '친일 문화의 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연결된 광장이 되도록
▲ 세종로의 변화는 인사동, 삼청동, 효자동, 사직동, 태평로 등 주변 지역의 변화와 함께 연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진은 철거된 광화문 자리 앞뒤로 보이는 경복궁 및 삼청동, 세종로 일대 ⓒ연합뉴스

세종로는 문화적으로 인사동, 삼청동, 효자동, 사직동, 태평로 등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세종로의 변화는 이러한 주변 지역의 변화와 함께 연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세종로의 변화는 시간적으로 연속, 공간적으로 연계라는 '연결의 사고'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세종로는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사실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없으며, 현재가 없이는 미래도 없다. 일제와 독재의 참담한 역사를 지나며 멋대로 훼손된 과거를 올바로 되살리는 것은 결국 현재와 미래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 문화자산이다. 따라서 문화경제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시간적 연속을 올바로 이해하고 구현하고 보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 세종로는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실질적 문화공간이지만 여기서 나아가 주변의 여러 공간들을 이어주는 상징적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종로 자체에 대한 선적(線的) 사고를 넘어서 주변의 공간들을 아우르는 면적(面的)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종로의 문화적 개혁은 인사동, 삼청동, 효자동, 사직동, 태평로 등의 문화적 개혁과 반드시 공간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결의 사고'에서 특히 주목할 곳은 삼청동의 기무사 터(5300평)와 국국병원 터(3000평)와 미 대사관 직원숙소(1만 평) 터이다. 두 곳은 사실상 붙어 있는 곳인데, 모두 각별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무사 터에는 정독도서관에 있는 종친부 건물을 다시 옮겨야 하며, 국군병원은 아주 중요한 근대 건축물로서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앞의 삼청로 아래에 갇혀 있는 중학천도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 대사관 직원숙소 터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몇 해 전에 삼성이 이곳을 매입해서 문화센터를 지으려고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면 이 엄청난 숲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은 무엇보다 숲으로 보존되면서 향유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올바른 발전을 위해 시민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 '비각'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다. '전'은 왕의 건물이고, '각'은 높은 신하의 건물이다. '비각'은 일제가 '비전'을 낮춰 부른 것이다. 이런 잘못을 '백과사전'에서조차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을 정도로 일제의 영향은 뿌리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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