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만 연대 연대 하면 뭐해. 성명서에 이름 하나 올리고 얼굴 잠깐 내미는 연대로 어떻게 세상을 바꿔?"
"걔넨 무슨 정파, 안 봐도 비디오다 이런식으로 딱지 붙이고 등 돌리면서…"
"운동에 매가리가 없어. 활력도 꿈도 없는 것 같아."
진보의 위기, 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사회단체들은 저마다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한다. 지난해 많은 단체들이 주력했던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나 한미 FTA 반대 운동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들의 독보적인 지지율은 진보의 위기 상황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다.
오는 30일부터 4일간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인 '사회운동포럼'(http://www.smf.or.kr)은 운동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운동진영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해야 한다는 '현장 활동가'들의 본격적인 시도다. 인권운동사랑방, 사회진보연대, 문화연대 등 20여 개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주축이 돼 준비하고 있다.
포럼 내 주제는 이들이 갖고 있는 고민만큼이나 다양하다. △지역운동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 양식 △사회공공성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등 참가자들의 공동의제부터 △반빈곤포럼 △주거권운동 △이주노동자 운동 △에이즈 인권운동 △사회운동과 정당 등 10여 개의 운동주제별 워크숍까지 다양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포럼의 제안자는 국내에서 대표적인 인권활동가로 잘 알려진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활동가. 그는 어떤 계기로 이번 포럼을 구상했을까?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에서 박래군 사회운동포럼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운동의 위기 제일 심각하게 느끼는 활동가들이 모였다"
<프레시안>:사회운동포럼을 제안하게 된 계기는?
박래군: 진보 운동의 위기는 몇년동안 얘기돼 왔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었던 상황이다. 위기감을 제일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현장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대안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올해 초에 했다. 마침 사회진보연대가 그런 고민을 갖고 있어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이후 운동 사회에서 제안에 동의하는 20여 개의 단체들이 모이게 됐다.
<프레시안>: 주로 어떤 이들이 참여하고 있나?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사회진보연대, 문화연대, 민주노총 서울본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5개 단체가 제안단체다.
이미 한국진보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진보적 단체들의 모임틀이 있다. 이번 포럼 준비에 참여하는 단체들은 주로 이 둘에 안들어가는 '비주류'들이더라. 굉장히 '좌파적'이기도 하고 소규모이기도 하고... 운동사회의 비주류들이 모여서 운동질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보자는 게 사회운동포럼인 듯하다.
그런데 이번 포럼의 특징은 단체가 아닌 활동가 개인들이 주축이 됐다는 점이다. 각 토론별, 의제별 기획단이 있고 그곳 코디네이터들로 구성된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준비 중이다.
<프레시안>: 이미 진보적인 그룹 내에서는 포럼, 워크숍 등이 많이 개최되고 있다. 진보 성향의 연구자들 중심의 맑스 꼬뮤날레, 세계사회포럼과 유사한 형식으로 몇년 전 조직된 한국사회포럼, 다함께 주최의 맑시즘2007 등이 있다. '사회운동포럼'이 갖고 있는 차별점은?
박래군: 한번 논의하고 끝내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번 포럼은 질적으로 다르다. 참여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5월부터 전략과제별, 공동의제별로 자발적인 기획단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
본 행사기간에는 참여자 전원이 함께 사회운동의 현실을 분석하고 위기를 진단해보는 '사회운동 대토론회', 지역운동, 사회공공성,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등 현재 사회운동 단위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공동의제들을 논의하는 '열쇠말 토론' 등을 통해 마지막날 '사회운동 총회'를 열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는 포럼 이후 활동방향에 관한 공동행동전략과제를 합의하고 선언할 계획이다.
그렇다고 이번 포럼을 한국사회포럼의 대항포럼으로 생각하는 건 문제다. 한국사회포럼은 명확한 주제의식을 갖고 간다기보단 현재 한국 사회의 의제들을 한번 끌어 모아보자는 다른 차원의 목표가 있다. 그래서 다양하고 많은 논의가 있지만 축적이 안되고 실종돼 버린다. 그건 운동적으로 별 의미가 없지 않나.
"기능적인 연대, 대리하는 운동은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사회운동포럼의 주제를 '소통, 연대, 변혁'으로 잡은 까닭은.
박래군: 올해는 그중에서도 소통에 방점을 찍었다. 소통이 잘 되면 운동의 절반은 성공한다고 본다. 운동과 운동간, 주체와 주체간, 운동과 대중간 소통 모두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운동이 막힌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생각이다. 민주적인 소통 과정을 거치는 속에서 서로간 신뢰도 생기고, 그 기반 위에서 연대도 모색하게 되는 거 아닌가.
이제껏 운동과 운동간의 연대는 사안별 연대였다. 어떤 사안이 터지면 대책위원회나 공동행동 등 부분적이고 일면적인 연대를 구성했다. 그러다보니 기능적인 연대가 일어나게 된다. 최근 연대를 통해서 승리한 경험들이 전무하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도 활력이 없고, 자신감도 없고, 관성화된 운동, 투쟁을 해오고 있다.
운동단체간 누가 무슨 제안을 하면 일단 의도부터 의심한다. 연대사업도 그렇다. 작년 한미 FTA 반대 투쟁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아니라는게 드러났지만, 진보운동 진영의 전선체를 만든다는 몇몇 단체의 조직적인 과제가 있다보니 소규모 운동조직들은 결국 거기에 들러리 서는거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되고…이런 것들을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
운동하겠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전망을 너무 좁게 갖는 점도 극복해야 한다. 반대에만 익숙하면 안된다. 민족을 강조하면 계급을 강조하게 되는데, 사실 민족과 계급이 분리되는게 아니지 않나. 자꾸 자기 정파, 자기 영역 안에서만 보게 되니까 시야가 자꾸 좁아지고, 좁은 시야 속에서 고민하는 건 뻔한 거다.
<프레시안>: 그렇다면 현재 운동의 위기를 '소통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는 건가?
박래군: 그렇다. 한 예로, 시민운동은 시민을 조직하지 못했다. 한때 환경운동연합 회원이 10만 명, 참여연대가 1만 명이 넘었지만 그건 회원이 아니다. 만약 참여연대의 회원 중 절반이 움직이는 회원이라고 해도 엄청난 동력이 될 거다. 그렇지만 아니지 않나. 허상이다. 시민들을 교육을 하고, 의식을 높이고, 구체적인 실천 활동에 회원들을 끌어내고 그렇게 해온게 아니라 대신 활동가들이 그걸 대리했다. 겉보기에는 굉장히 그럴싸한 운동이었지만 대중과는 멀어져간거다.
노동운동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는 노조원들이 정말 움직였다. 그러나 지금 이랜드 사태를 보면 노조간부들은 농성에 참석해도 다른 노조원들은 없다. 농성을 하는 이들 중 이랜드 조합원이 5분의 1을 차지하면 다른 노조원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대다수다.
노동운동, 시민운동 모두 대중들을 동력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운동과 멀어졌다. 운동 전문가들이 대리하는 운동이 돼 버렸다. 대중이 주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정책적 대안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자꾸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힘이 약해지는 건 당연하다. 운동이 그런 관성에 빠져있다.
"투쟁의 객관적 조건은 무르익어가는데 운동은 지리멸렬"
<프레시안>: 이 같은 운동의 위기를 일각에서는 진보의 위기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박래군: 사실 노무현 정부가 진보의 개념을 많이 타락시켰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라고 하면 '노무현식 진보'가 많이 퍼져있는 거 같다. 이른바 자유주의 세력까지 진보로 보는 거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진보는 한미 FTA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느냐, 미국의 군사기지 패권전략에 반대하느냐, 평화체제를 지향하느냐를 두고 따져야 한다.
1987년 6월항쟁 20년, 노동자대투쟁 20년, IMF 10년…그 과정에서 운동이 변혁성 자체를 많이 상실하고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정책적 대응, 사안적 대응을 하는 것에 머물러 왔다. 그 틀을 깨서 좀 더 진보적인 의제를 주도해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사람들은 전부 정권과 권력에 편입해 들어갔다. 민주주의에 관한 자신의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전부다. 사실 이건 노동자나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사회경제적 질서까지 바꿔내려는 열망을 배신해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계속 자유주의 세력이 아닌 운동 진영은 소외되고 배제됐다.
<프레시안>: 지적했듯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심화되고 있다. 운동 진영, 또는 보수 진영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변하고 있는 사회상이 운동을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닌지.
박래군: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인정하고 편입돼 살겠다고 하면 몰라도, 사실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진행되면 될수록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게 무조건 생존권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가진 않겠지만 국가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심화시킬 때 문제는 더 커진다.
국가가 폭력화 되는 거다. 예를 들어 한미 FTA 반대 시위를 하려는 농민들을 경찰이 집 앞에서부터 막아버리지 않나.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면서 민주주의를 폭력적으로 부정해가는 정부는 '법을 통해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원래 법의 지배를 통해 민주주의 원리를 확립하는 방식인데 이제는 법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리를 부정하고 있다. 예전에 집회의 자유를 억압할 때 독재자의 결정에 따라 움직였지만 이제는 법을 통해서 그걸 막아버린다. 벌금 얼마, 구속 얼마 그런 식이다. 특히 민중들의 저항에 그런 억압이 집중돼 있다.
이런 상황이 바뀌겠나. 민중들은 자신들의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싸울 수밖에 없다. 또 미국의 군사패권전략이 한반도에서 유지되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투쟁의 객관적인 조건들은 무르익어가는데 운동이 지리멸렬한 꼴이다.
"운동의 기초인 지역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프레시안>: 사회운동포럼은 그런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구상하고 있나.
박래군: 현재 포럼을 준비하는 20여 개 정도의 기획단이 있다. 네다섯명부터 10명 이상 참여하고 있는 기획단도 있어 총 70~80명이 참여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소중한 논의들이 이뤄지고 있다. 학자들, 연구자들의 붕뜬 논의가 아닌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논의다. 예를 들어 생태 기획단의 논의 가운데서는 노동운동, 문화운동,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생태를 어떻게 고민할 것인지를 서로 주고받는다.
인권, 노동, 평화, 여성운동 등 각 영역에서 한 사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서로 확인하고 자극하게 된다. 얘기하다보니 용어나 개념 하나도 다르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를 들어 서로 쓰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개념이 다르다. 이런걸 하나로 모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런 소통이 이뤄진다는 면에서 사실 사회운동포럼이 이뤄지는 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포럼 자리에서 총체적으로 토론을 해보자는 거다. 그렇게 되면 붕뜬 대안이 아닌 실천적이고 내용있는 대안, 성과가 나올거라 본다. 그 결과가 네트워크, 혹은 연대체 어떤 것이 될지 모르겠지만.
<프레시안>: 이번 사회운동포럼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요 의제 중 지역운동이 있다. 이유는?
박래군: 아무리 갈길이 멀어도 밑에서부터 튼튼하게 만들어가지 않으면 위기를 맞은 운동은 소멸돼갈 수밖에 없다. 지역에 뿌리내리면서 공동체 운동을 했던 이들이 꽤 있다. 문제는 진보진영과 엮여지지 않는거다. 운동의 주체들이 지역적인 사고를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 중심, 중앙, 이슈, 언론, 정책 중심적인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풀뿌리 운동은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같이 해나가는, 진짜 어려운 운동을 해야 한다.
서울에 연대운동이란게 없다. 서울 단체들은 자기들이 전부 중앙단체인 줄 안다. '서울도 지역'이라는 생각으로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자는 것이다. 마포 등에 모범적 사례들이 있다.
사실 예전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이 참 단순했다. 상부를 장악하고 있는 독재세력만 메치면 다 될 줄 알았던 거다. 그런데 1995년부터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 이후 한나라당과 결합한 토호세력들이 지역 행정을 장악하고 있다. 지역에서는 자본권력과 토호세력들에게 유리한 난개발만 하게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운동에는 왕도가 없다. 기초를 하나하나 만들어가면서 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프레시안>: 사회운동포럼 이후의 활동계획은?
박래군: 사회운동포럼 끝난 뒤로는 계속 만나고 다니려 한다. 진보적인 실험들을 곳곳에서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는데 안 꿰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사회운동포럼은 서울 지역에서만 하지만 내년에는 전국 단위로 할 수도 있다고 본다. 곳곳에 중심이 있다면 하나의 중앙, 중심은 없어도 된다고 본다.
* 사회운동포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홈페이지(www.smf.or.kr)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행사의 취지에 동의하는 이들은 1만 원 이상의 조직위원비를 내면 포럼의 준비과정 동안 조직위원으로도 참여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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