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번
"아빠 이 글씨는 무슨 글씨야"
"음- 그것은 글씨가 아니란다"
성북동 심우장의 봄은
북향의 마당 어귀에 쌓인 눈 더미 속에 있었다.
만해와 그 유일한 혈손 어린 한영숙과의 대화다.
가갸 거겨만 배운 그의 딸 한영숙이 처음 보는, 괴상한
일본글을 보고 묻는 말에 대한 만해의 대답이다.
참으로 친절한 아버지다.
"아빠 선생님 한테 야단 맞었어요, 선생님이
이름표를 잘못 썼다고 일본글로 써야 한다며 고쳐 줬어요"
"아가 그것은 글씨가 아니라고 하지 않더냐"
친절한 아버지와 그의 딸은 이 짓을
1944년, 6월 29일 그가 죽을 때 까지 했다고 한다.
냉돌방에서 그가 죽을 때 까지가 아니라,
아마 저승에서 조차 그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히라가나를 보고 그의 딸아이에게
그것은 글씨가 아니라고 가르친 만해,
친절한 아버지의 투박한 한글 이름표를
소학교 선생이 일본글로 고쳐오면
다시 한글로 고쳐 달아 준 만해,
어찌 글씨뿐이겠는가.
글씨 속에는 민족이 살아 있고
슬픈 내 조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과 혼이 서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에다가와 조선학교여
너희 영원함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더냐.
이상번 시인은 1954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1990년 <우리시대 젊은 시인들>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대구참여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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