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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발포, 최소한 계엄사 묵인하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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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5.18 발포, 최소한 계엄사 묵인하 자행"

군 과거사위 "전두환, 자위권 발동 강조"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위원장 이해동. 과거사위)가 24일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관심을 모았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발포 명령자를 밝혀내지는 못 했다. 다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군의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가 조사한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이라는 2군 사령부의 문서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부분에 수기(手記)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全 閣下(전 각하. 전두환): 硝兵(초병)에 대해 亂動時(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依據(의거) 자위권 발동 强調(강조)"

당시 회의는 주영복 국방부장관실에서 주 장관을 비롯해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진종채 2군 사령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이 참석하고 있었다. 정확한 회의 장소와 시간은 적혀 있지 않았으나, 5월 21일은 광주도청 앞에서 대대적인 발포가 시작된 날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지는 못 했다. 당시 발포 명령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고, 과거사위는 전두환 씨 등 관련자들의 진술을 청취하려 했으나 이들이 진술을 기피해 결국 이번 조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지 못 했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실명을 밝히지 못 했다"며 "진상보고서 작성 과정에서도 이를 밝힐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5.18 관련 단체들도 '발포 명령자'를 밝혀내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다만 과거사위는 당시 계엄군의 발포가 최소한 계엄 사령부의 묵인 하에 이뤄졌음을 짐작케 하는 정황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 ⓒ연합뉴스

발포…은폐…왜곡

당시 광주에서 처음 발포가 이뤄진 시점은 5월 19일. 과거사위에 따르면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선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모 대위는 시위대의 공격을 받자 M16소총을 발사했고, 당시 조선대부속고등학교 3학년이던 김영찬 군이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보안부대는 이 사건을 "특정 데모세력에 의해 무성 권총으로 사격,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키 위한 지능적인 수법"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소속 부대인 11공수여단은 상급부대에 어떠한 보고를 하지 않았고, 과거사위는 "발포 사실 은폐"로 판단했다.

이어 20일 밤에도 총격이 있었다. 광주역 경계 중이던 제3공수여단 16대대 정모 중사가 시위대 차량에 깔려 사망하자,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은 각 대대에 M16소총 실탄을 배부해 장착토록 지시했다. 당시 광주역에 투입됐던 이모 하사는 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지원 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이 역시 상급부대인 31사단 등에는 보고되지 않았다. 과거사위는 "제3공수여단의 차후 보고에는 '민간이 2명 사망, 5명 부상(폭도의 차량공격에 의한 자체 피해)'으로 적혀 있다"며 "제3공수여단의 발포와 구타로 인한 사상자가 폭도의 공격에 의한 자체 피해로 왜곡됐다"고 밝혔다.

또 31사단 등은 광주역 주변에서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를 받는 등 공수부대의 총격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별도의 조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사위는 "5.18보다 한 달여 전에 일어난 '사북사건'은 경찰력만으로 진압이 어려워지자 당시 11공수여단을 투입시켜 진압할 계획을 세웠는데, '총기 사용은 긴급시라도 총장 승인 후'라고 돼 있었다"며 "발포의 경우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는 중요 사안임에도 광주에서의 실탄분배와 발포는 공식적인 보고는 커녕, 책임을 묻지도 않고 오히려 일부 관련자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고 설명했다.

과거사위는 이어 "이는 현장에 투입된 장병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계엄사 당국의 암묵적 지원 아래 행해졌다고 추정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옥상에서 저격병 조준사격

이후 21일 오후 1시경 비극의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자행됐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중대장 이상 및 일부 하사관들에게 실탄이 분배됐고, 시위대가 밀고 들어는 장갑차에 11공수여단 무전병이 사망하자 집중 사격이 시작됐다. 당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계엄군 중 일부는 위협사격을 가했지만 일부는 조준사격을 했고, 특히 인근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에 저격병이 배치돼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에 대해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기 전에 시민들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고 진술했으나, 과거사위는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었다"고 밝혔다.

발포 외의 계엄군의 과격진압도 지금의 잣대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시위진압에 대한 경찰과 군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

5월 18일 각 공수부대로 지시된 2군사령관 강조사항을 보면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해 타격 및 체포"토록 돼 있다. 반면 같은 날 전남도경찰국장이 내린 지시는 "분산되는 자는 너무 추격 말 것. 부상자 발생치 않도록 할 것. 기타 학생은 연항할 것. 연행 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는 것이었다.

5월 18일 금남로에서 희생당한 김모 씨의 사례는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김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고,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김 씨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연행된 시민 술에 취한 채 칼로 찔러 죽여

5월 20일에는 공수부대의 곤봉이 훈련용에서 더 긴 진압용으로 바뀌었다. 곤봉에 의한 구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사위는 "면담한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대검 사용 사실을 모두 부인했으나, 사진 자료에서 대검을 착검한 장면이 있고 피해자들 중에 자상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며 "대검 사용을 짐작케 하는 자료들이 있다"고 밝혔다.

특히 과거사위가 면담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김순현 준장과 백남이 대령에 따르면, 5월 22일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했고, 부상자가 곧바로 헬기로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됐지만, 확인 결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준장은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으나, 자신에게도 대들었으며 술 냄새가 났다"고 증언했다. 술에 취한 공수부대원이 연행된 상태로 저항할 수 없는 시민을 칼로 사살한 셈이다.

과거사위는 이와 같은 조사결과 보고서 발표와 함께 ▲헌법 개정시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헌법 전문에 포함 ▲12.12, 5.17, 5.18 장병정신교육 및 인권교육 사례에 포함 ▲12.12 관련자 전원 서훈 박탈 ▲병사들이 작전내용 사전 고지받을 권리에 대한 연구 ▲신군부 집권 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 자료 공개 등을 국방부에 권고했다.

한편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가 25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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