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후보가 시대정신이라는 판단에서 지지를 선언하게 됐다."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지난 16일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지지 선언을 하면서 밝힌 이유다.
4.19 세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인 이 전 총재의 지지선언은 쏟아지는 부동산 관련 의혹으로 수세에 몰려 있는 이 전 시장 입장에선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이 전 시장은 "오늘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가장 보람된 날"이라며 "한국 정치에 있어서 깨끗하고 주관 있는 정치로 정치사에 획을 그었던 이 전 총재의 지지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노무현 편이었던 이기택도, 박근혜 편이었던 전여옥도...
하지만 이 전 총재가 '주관있는 정치인'이라는 이 전 시장의 평가는 매우 자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92년 대선 때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었다. 그러나 1997년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고, 그는 지난 2000년 4.13 총선 공천에서 이회창 전 총재가 자신을 떨어뜨리자 한나라당을 탈당했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자신의 모교인 부산상고 후배이자 과거 '꼬마 민주당'을 함께한 인연으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다.
그리고 5년 만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접고 다시 한나라당에 줄을 서면서 그가 내세운 명분이 '시대정신'이다.
이 전 시장에 대한 지지의 변으로 '시대정신'을 내세운 것은 이기택 전 총리만이 아니다. 지난 12일 이 전 시장 지지선언을 한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도 "21세기 시대정신은 이 전 시장"이라고 주장했다. 한때 박근혜 전 대표의 최측근으로 꼽혔던 그가 돌연 이 전 시장을 지지하고 나선 것도 시대정신 때문이다.
이명박의 시대정신은 '하면 된다'?
여기서 잠시 의문에 빠졌다. 한때 노무현을 지지했던 정치인도, 또 박근혜를 지지했던 정치인도 공감했다는 이 전 시장이 담보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이 전 시장은 지난 6월 한나라당 대선 경선 출마 기자회견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두 가지 큰 목표로 제시했다. 또 "정권교체를 바라는 모든 세력을 규합해 집권 기득권 세력의 정권 연장 기도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돼 있는, 당연한 말이다. 어느 정치세력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좀 더 나아가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이 전 시장의 비전도 이제까지 명확하게 드러난 게 없다. 지난 2월 '한국 외교의 창조적 재건과 비전'이라는 거창한 제목 하에 'MB 독트린'을 발표했지만 북한 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 정착 실현과 관련해 어떤 구체적인 로드맵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 전 시장은 당시 김정일을 '장기 독재자'라고 규정하면서 김정일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비전을 대신했었다.
'경제성장'과 관련해 이 전 시장은 '747 정책'을 제시한 바 있다. '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7% 경제성장은 박근혜 전 대표도 제시한 목표다. 앞서 5년 전 대선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도 7% 경제성장을 공약으로 제시했었다.
이 전 시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제성장을 꾀할 것인지에 대해 보여주지 못한다면, 박 전 대표나 노 대통령의 '성장론'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좀 더 비약하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적 성장담론과 어떤 차이가 있나. '경제성장' 역시 모든 대선 후보가 강조하고 있고 이 전 시장만의 차별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대정신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국면에서 가장 힘주어 말하고 있는 '정권교체'는 특정 정치세력과 그 지지자들의 목표는 될지언정 시대정신은 아니다.
이 전 시장의 대표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에 그의 시대정신이 담겨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울시장 재직 당시 일부 환경단체와 지역 상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계적 복원을 해낸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대운하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계천과 한반도 대운하는 다르다. 제대로 된 복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청계천은 없던 것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 대운하는 '대공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환경단체나 범여권 대선 후보 뿐 아니라 같은 한나라당 대선후보들마저 이 전 시장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뜯어 말리는 것이다.
아직 대선까지는 5개월 넘게 남아있다고 하지만 이 전 시장이 대선후보로서 제시하고 있는 '비전'은 모호하다. 한반도 평화, 정치개혁, 경제성장과 분배, 인권문제 등에 대한 그의 주장들은 '장밋빛 환상'이 아니면, 오히려 구태의연한 수준에 그쳤다.
"과거의 성공 빼고, 나머지는 묻지 마세요"?
지금 많은 유권자들이 이 전 시장을 지지하는 것은 그가 이뤄놓은 '성과'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말단직원에서 CEO를 거쳐 국회의원에서 서울시장까지 거침없이 달려온 그의 '성공신화'에 매료돼 있는 셈이다. 국민들이 현 노무현 정부의 무능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과거의 '성과'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성공이 곧 국가 경영의 성공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윤 추구를 최우선적 목표로 하는 기업 경영과 다양한 이해가 공존하는 국민 전체, 특히나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고려해야하는 국가 경영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국정 운영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감으로 따지자면 노무현 대통령도 이 전 시장 못지않다. 성공한 국정운영의 전제가 되는 것은 지도자와 그가 속한 정당이 가진 '철학'이다. 그들이 국정운영과 관련된 일관된 철학을 갖고 있고, 그 철학이 시대 요구에 부합한 것이어야 최소한의 성공이 담보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경선을 넘어 본선에서도 '1위' 자리를 고수하려면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보여줘야할 것이다.
한가지 더, 과거의 '성공'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자 경쟁 무기로 내세우려면 그 성공의 배경에 대해서도 숨기는 것이 없어야할 것이다. 정당한 방법, 합법적인 방법으로 성공한 것인지 검증에 투명하게 응해야 한다. 성과만 묻고, 나머지는 다른 당 후보와 경쟁에서 불리하니까 더 이상 들추지 말자는 태도로는 과거의 성과를 내세울 자격이 없다. 더 나아가 '대선후보는 엄격한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런 태도로 이 전 시장이 궁극적으로 매료시킬 수 있는 이들은 이기택 전 총재, 전여옥 의원 등 대선을 앞두고 '줄서기'하는 정치인들 뿐일 것이다. 지난해 지방선거 때 부인이 거액의 돈을 받아 한발 물러나 있던 김덕룡 의원도 곧 이 전 시장의 지지를 선언할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이 전 시장의 '시대정신'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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