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이라부 센셰, 나도 좀 부탁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이라부 센셰, 나도 좀 부탁해

[최광희의 휘뚜루마뚜루 리뷰] 오쿠다 히데오 원작영화 <인 더 풀>

모처럼 종로를 어슬렁 거리다 스폰지 하우스에서 하고 있는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을 보러 갔다. 프로그램을 슬쩍 훒으니 왠 오다기리 죠 영화가 이리 많나 싶다. '차라리 오다기리 죠 영화제라고 하지 그래?' 괜한 질투심에 심통이 도진다. 오다기리라면, 턱에 난 점까지 사랑해 마지 않는, 그의 열혈 팬들이 쫙 깔렸으니 프로그래밍에 영향을 안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인디 영화라지만 흥행 안되면 가져다 트는게 무소용인 것이다.
뭘볼까, 시간도 많지 않아 딱 한 편만 볼 생각에 <인 더 풀>을 골랐다. 그런데 이 영화,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던 <공중그네>의 오쿠다 히데오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단다. 게다가 내용도 <공중그네>의 연장선에서 괴짜 신경과 의사 이라부가 주인공이라니 슬쩍 걱정이 앞섰다. 얼마전 그 책을 읽다가 도중에 던져 버렸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소설이 아니라 동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피소드와 인물 설정이 작위적이어서 크게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같은 작가의 소설로 <남쪽으로 튀어!>는 좀 나으려나 했는데, 역시 몇 장 읽다가 같은 이유로 놓아 버렸다(최근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일본 작가들 가운데서는, 일상에 천착하는 요시다 슈이치나 가쿠타 미쓰요 같은 작가들이 내 취향에는 맞는다. 장르 소설 작가 가운데서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괜찮았고).
인 더 풀 ⓒ프레시안무비

여하튼, <공중그네>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 책은 소설보다는 드라마로 보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몰라." 영화로 만들어진 <인 더 풀>도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선택한 셈이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 영화, 꽤 괜찮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라부를 등장시킨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문체나 서사에서 크게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인물 설정은 매우 드라마틱해서 차라리 영화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영화가 되고 나니 과연 독특한 휴먼 코미디로 완성이 됐다. 마츠오 스즈키가 연기한 영화 속의 이라부는 소설에서 묘사된대로 전혀 거구의 모습이 아니다. 더러 이라부의 겉모습이 소설과 다르다고 미스캐스팅이라고 주장하시는 관객들도 있던데, 영화가 소설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근거 없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힐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그가 재창조한 이라부를 즐기면 되고, 더 중요한 것은 장인의 수준을 보여주는 그의 과장된 코믹 연기가 역시 연극 무대에서 갈고 닦은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입증해 보인다는 점이다. '연기 잘하고 싶어 하는 꽃미남' 오다기리 죠는 그 이미지에는 참 안어울리게도 발기 상태가 지속되는 희한한 병을 앓는 30대 이혼남을 연기했다. 발기된 것을 숨기기 위해 어정쩡하게 걷는 그의 모습이 참 웃기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이치카와 미와코는 가스를 끄고 나왔는지, 전깃불은 켜 놓은 채 외출한 건지 늘 걱정이 태산이라 다시 집에 돌아가 확인을 해야 속이 풀리는, 강박증의 소유자다. 다나베 세이이치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수영에 집착하는데, 그러다 보니 수영을 하고 싶을 때 못한다는 또 다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인 더 풀 ⓒ프레시안무비

<인 더 풀>은 원작의 의도대로 현대인 또는 도시인의 신경증 또는 강박에 대한 블랙 코미디다. 강박은 모두들 껍데기 속에 스스로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인데, 곧잘 환자를 이끌고 병원을 벗어나는 이라부의 처방은 일견 괴팍스러워 보여도, 결국 일리가 있다. 껍데기를 벗기고 알맹이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오다기리, 넌 좀 화를 낼 필요가 있다. 바람 피우고 떠난 아내에게 결국 화를 내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화를 내라. 이치카와, 얘는 어렸을 때 자신의 실수로 친구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잠재적 걱정이 강박을 만들었다. 그러니 친구가 안죽고 잘 살고 있음을 확인하면 된다. 그렇다면 수영 강박에 걸린 다나베는? 이 대목에서만큼 감독은 처방의 몫을 관객에게 넘긴다. 앞서 두 사람에 대한 이라부의 처방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에게 어떤 실마리를 제공해줘야 할지 추론할 수 있다. 내 처방은 이렇다. 일상의 스트레스에 용감하게 대면하라고. 물 속으로 도피하지 말고, 땅 위에서 맞서라고 말이다. 덤으로, 영화를 통해 나 스스로의 강박증에 대한 처방까지 얻을 수 있었다면, <인 더 풀>은 꽤 괜찮은 영화가 아니겠는가. 사실 일본 인디 영화 페스티벌에 오다기리 영화만 있는 건 아니다. 오카다 준이치와 우에노 쥬리 영화도 있다.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이나 <신동>, <첫사랑>, <카모메 식당> 등 볼만한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이달 25일까지다. 색다르게 재미있는 영화를 볼 소중한 기회, 부디 놓치지 마시길.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