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쪽에서는 법 자체의 문제인 만큼 법을 재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목소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또한 존재한다. 이런 논란 속에 지난 13일 한국노총과 경총, 노동부가 비정규직법 안착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 합의문에는 "노·사·정은 비정규직보호법의 입법취지를 존중하여 부당한 계약해지 등으로 인해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용이 악화되지 않도록 성실히 노력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합의문 발표 이후 합의의 한 주체였던 한국노총(위원장 이용득)에 대해 민주노총(위원장 이석행)이 "비정규직법 재개정을 가로막으려는 제2의 노사정 야합"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이 담긴 성명을 내고, 이에 대해 한국노총이 다시 "(민주노총이) 분별없는 비방과 음해만 일삼는 것에 대해 더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비난 성명을 내면서 '이랜드 사태'가 양대 노총의 갈등까지 깊어지게 하고 있다.
하지만 양대 노총의 서로를 향한 '독설'과는 별개로, 당장 법 시행으로 해고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비정규직들을 생각할 때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진지한 사회적 고민은 절실한 시점이다. 과연 제2, 제3의 이랜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해법이 필요한지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시급한 상황인 것이다.
<프레시안>은 양대 노총 간의 갈등보다는, 비정규직법의 재개정이든, 다른 보완책의 마련이든 현재 고통받고 있는 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숨을 덜어줄 수 있는 해법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하에 박영삼 한국노총 기획조정실 본부장이 보내 온 글을 싣고자 한다. 이 글이 소모적인 감정 다툼을 넘어 진정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사회적 고민과 진지한 논쟁, 그리고 그를 통한 최선의 해법을 모색하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최초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된 지 15일로 보름을 맞았다. 차별금지와 정규직 전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편법적인 외주용역 전환에 맞선 이랜드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파업투쟁도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한쪽에서는 은행과 병원, 유통업체 등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최근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의 안도와 희망이 확인된다.
'이랜드 사태'로 쏟아져나오는 비정규직법 논란 속 법개정 논의가 불러올 역풍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갈지 정하지 않은 기업들이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벌써부터 법을 폐기하거나 다시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보수언론과 재계는 허점투성이 법률을 폐기하든가 차별금지와 기간제한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기간상한을 3년이나 5년으로 늘려야 한다는 말들도 나온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사유제한을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랜드 사태를 빌어 각자 자기 주장이 옳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 같은 논란의 와중에서 현행법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차피 개정될 법률로 치부하고 현행법의 차별금지나 정규직 전환 의무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는 사용자들이 늘어날 것이고 법의 권위가 떨어지는 만큼 감독와 처벌도 느슨해질 것이다. 외주용역 전환이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만 무방비 상태로 온갖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릴 것이다.
'사유제한', 과연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주장하는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하는 '사유제한 제도'의 도입은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또 사유를 제한하면 이랜드그룹 사태와 같은 문제는 더이상 발생하지 않을까?
우선 입법 가능성은 사회여론과 국회 상황, 선진국의 입법동향이 주된 변수이겠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다.
선진국 가운데 사유제한 제도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프랑스가 거의 유일하며 우리가 모범사례도 거론하던 독일은 2004년 이후 2년 미만 사유제한을 거둬들였다. 프랑스의 우파정부가 밀어붙인 최초고용계약법(CPE)이 대학생들의 저항으로 좌초되긴 했지만 빈민가 아랍계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 요구도 만만치 않다. 투쟁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실은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원론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유제한 규정이 없어서 도급용역 전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의 이랜드 사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2년 초과 시 정규직 전환 규정조차 지키지 않으려는 데 근본 원인이 있다. 이랜드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도 사유제한이 아니지 않은가? 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을 자신들의 명분 쌓기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른 제도적 보완을 통해 법의 실효성 높여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현재로서는 편법적인 도급용역 전환에 대한 보완입법이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고 판단된다. 직접고용과 간접고용으로 나뉘는 수많은 비정규직 유형 가운데 도급·용역에 대한 규제는 전무하다. 2005년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서도 이 문제는 최대 쟁점이었다. 새로운 규제입법이 절실히 필요하고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아울러 정부는 정규직 전환의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에 대해 고용보험료를 비롯한 사회 보험료를 감면하거나 세제상의 인센티브를 부과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300인 미만 기업에 대해서는 2008년 7월 이후 법이 시행될 예정이므로 검토할 시간도 부족하지 않다. 이 같은 방안은 현재의 비정규법안을 손대지 않고 다른 제도적 보완을 통해 법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이와 함께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을 노사정 모두 분명히 인식하고 스스로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 정책과 단체협상을 통해 법률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안정과 차별해소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3일 발표된 노사정 합의문은 아쉬운 대목이 없지 않지만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정당하게 평가돼야 한다. 사용자는 대량 계약해지를 자제하고 노조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의 문호가 활짝 열려 있는데도 매번 야합 운운하며 노사정 대화라면 무조건 히스테리부터 부리고 보는 행동양식부터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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