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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위의 실패한 '성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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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셸 위의 실패한 '성 대결'

[별을 쏘다·18] '천만달러 천재 소녀'의 신화. 그 이면

새삼 감탄하고야 마는 그녀의 궤적

'천만달러 소녀', '한국계 천재 골프 소녀', '여자 타이거우즈', '성 대결 골퍼'…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답게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어느 새 '신화'라 불리는 그녀. 바로 '미셸 위'다.

그는 2000년 USGA 아마추어 챔피언쉽 최연소 예선통과를 시작으로 제니K 윌슨 인비테이셔널 우승(2001년), 하와이 여자 스트로크플레이 챔피언쉽 우승(2001년), 하와이주오픈 여자부 우승(2002년), US 여자아마추어프블릭링크스 챔피언쉽 우승(2003년), 최연소 커티스컵 미국 국가대표 선발(2004년), 라우레우스 스포츠상 신인상 등을 거머쥐며 단숨에 골프계의 '천재 소녀'로 급부상했다.

골프의 본 고장 미국에서부터 천재성을 검증받은 이 소녀는 '한국계'라는 점에서 한국 팬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으며, 이제는 그녀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골프 성(性) 대결"로 인해 성적과 무관하게 뉴스거리를 양산하는 스타로 자리 잡았다. 미셸 위는 LPGA를 장악한 많은 한국 여성 골퍼들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한국 내에서 확보했고, 언제나 수많은 화제를 양산하는 그녀의 궤적은 스포츠 마케팅을 통해 새로운 신화가 됐다.

미셸 위는 지난해 LPGA 성적이 매우 저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입은 연간 1900만 달러에 이른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매년 선정해 발표하는 '명사 파워 100'에서는 한국계로는 유일하게 70위를 차지했다. 그가 프로로 전향한 후 지난 1년 7개월 동안 기부한 금액만 138만 달러라고 하니, 결코 평범하지 않은 '화제의 스타'임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최근 미셸 위의 LPGA '기권'을 둘러 싼 골프계의 소란함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화제의 스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미셸 위가 최근 열린 LPGA 투어 긴 트리뷰트 1라운드, LPGA 메이저 대회 US여자오픈 2라운드에서 기권하면서, 미셸 위를 둘러 싼 진정성, 정신력 등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골프 미디어, 전문가는 물론 '골프의 여왕' 애니카 소렌스탐까지 미셸 위 비판에 나서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 내용의 적절성과 무관하게 그녀의 스타성, 아니 상품 가치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척 봐도 '아메리칸'인 그녀에게 따라다니는 '한국계' 꼬리표
▲ 지난해 5월 '2006 SK 텔레콤 오픈 골프대회'에 참가해 성 대결을 펼친 미셸 위 ⓒ뉴시스

꾸준하게 저조한, 그러나 변함없는 상품가치를 자랑하는 미셸 위. 하지만 이 화제의 '천만달러 천재 소녀'를 보고 있으면, 스포츠 스타에 대한 호기심 이전에 언제나 불편함이 고개를 든다. 아니 반복된 불편함이 미셸 위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미셸 위라는 스포츠 상품에 대한 소비문화의 이중성을 집요하게 추적하게 한다.

먼저 미셸 위 신화는 '만유인력의 법칙' 만큼이나 스포츠에서는 보편적인 배타적 혈통주의(정확하게 말하면 민족적 우월주의에 대한 욕망), 그것도 한국"계"라는 모호한 수식어를 통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민족적 동질성을 강요한다.

"척" 봐도 어설픈 한국어보다 영어가 훨씬 잘 어울리고, 국적도 미국이며, 표정까지 "아메리칸 스탠다드"인 그녀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한국계' 꼬리표. 한국 언론이 언제나 들이미는 이 꼬리표 덕분에 우리는 골프에 무관심해도, 미셸 위와 위성미가 같은 사람인지 몰라도, 미셸 위가 인간적으로 자기 스타일이 아니어도 언제나 미셸 위의 편에 설 것을 강요당한다.

미셸 위를 쫓아가는 한국 언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미셸 위는 더 이상 '골프 선수'가 아니다. 그저 '한국인'일 뿐이다. 물론 스포츠 채널은 어느새 <지구촌 한국인>으로 변해있다.

그 혈통주의는 우리의 유대와 무슨 상관일까

미셸 위의 신체를 둘러 싼 혈통주의, 민족주의의 불편함은 그 무분별하게 강요되는 동질성뿐만 아니라 지극히 이중적, 차별적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더 불편하다. 프리미어리그, 메이저리그 등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들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물론, 미셸 위, 하인스 워드 등 한국계 스타들을 향한 혈통주의, 민족주의의 욕망은 결코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혈통주의와 민족주의는 언제나 잔인할 만큼 배제적이다.

미셸 위와 하인스 워드에 대한 단일민족의 혈통성은 결코 수많은 재외동포 문제로 일관되게 전달되지 않으며, 심지어 이들의 신체와 스포츠 문화를 통해 확산되는 다문화주의, 글로벌화 역시 한국내의 이주여성, 이주노동자, 혼혈인 등의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언제나 과장되어 보이는 한국"계"라는 혈통의 끈은 '천만달러 천재 소녀, '슈퍼볼 MVP' 등만을 연결할 뿐, 언제나 조선족, 이주여성, 이주노동자 등의 혈통 앞에서는 매끈하게 절단되기 때문이다. 과잉되고 배타적인 혈통주의는 결코 혈통 간, 공동체 간의 호혜와 유대를 (재)생산하지 않으며, 구조적이고 선택적인 차별만을 확대할 뿐이다.

심지어 우리는 지구적 차원의 스포츠 자본을 통해 모순되어 보이는 '글로벌화(또는 다문화주의)'와 '혈통주의(또는 민족주의)'조차 새로운 상품으로 탄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이 스포츠 중계권을 판매하기 위한 것이든, 티셔츠를 비롯한 스타 상품의 판매를 위한 것이든, 혈통주의와 민족주의는 스포츠 자본의 마케팅 속에서 적절하게 동기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상품화된다. 그래서 미셸 위의 신체에 각인된 한국"계"라는 혈통주의, 민족주의는 더욱 더 반갑지 않다.

'성 대결'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스타성

미셸 위의 신화가 또 다른 불편함을 낳는 지점은 바로 '강요된 여성성'이다. 미셸 위의 신체에는 혈통주의의 의리만큼이나 강요된 여성성이 주는 불편함이 각인되어 있다. 미셸 위는 여성의 이름으로 성 대결을 외치고 있지만, 그녀의 게임에는 자본주의 남성 가부장제의 시선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미셸 위가 화제의 스타로 자리 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성 대결 골퍼'라는 점이다. 미셸 위는 성적과 무관하게 남자 대회에 참가하고, 남성 골퍼들과 당당하게 맞선다는 이유로 언제나 화제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성 대결'은 미셸 위라는 스타의 정체성 그 자체이며, 미셸 위 신화가 가지는 가장 큰 상품성임에 분명하다.

미셸 위는 183㎝, 70㎏의 신체적 조건, 그리고 평균 300야드 비거리의 장타력 등을 바탕으로 13세 때인 2004년 PGA 투어 소니오픈을 시작으로 남성 골퍼들과의 대결을 펼쳐왔다. 대부분 컷오프 탈락하는 등 최근 남자대회 참가 성적이 매우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미셸 위의 남자대회 참가는 그 자체로 화제의 대상이었으며, 중요한 마케팅 전략이었음에 분명하다.

미셸 위를 둘러 싼 많은 화제 중에서 대부분은 이러한 성 대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미셸 위 남자대회 포기, 여자대회에만 전념"이라는 헤드라인은 주기적으로 언론에 등장했으며, "미셸 위, 스모선수에게도 기 안 죽어" 등과 같은 성 대결 중심의 스포츠 마케팅은 그녀의 스타덤에 있어 중요한 구성 요소임에 분명하다.

심지어 그녀의 남자대회 참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남성 골퍼들이나 언론, 그리고 안티 사이트 등도 그녀의 스타성과 성 대결의 상품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해주는 과정임에 분명하다.

미셸 위의 '성 대결', 즐거운 반란이 아닌 이유
▲ 미셸 위의 성 대결은 언제나 강조되는 '소녀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너무나 안전한 도발인 동시에 상품화된 여성성(남성 가부장제의 관음, 관리의 시선이 내재된)이라는 점에서 예고된 실패다. ⓒ뉴시스

미셸 위의 '성 대결', 그녀의 '성 장벽에 대한 도전'은 주류 남성들에게는 "도전하는 여성의 도발적 여성성"을 상품화하고, 주류 여성에게는 "도전하는 여성에 대한 로망(여성의 승리 판타지)"을 동시에 상품화하는 이중 전략이다.

많은 주류 남성들은 미셸 위라는 잘 포장된 여성 스타의 성적 도전 속에서 순종적인 것만이 아닌 도발적인 여성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충족하며(동시에 그 좌절을 즐기며), 많은 주류 여성들은 남성 권력에 대한 여성 스타의 도전을 바라보며 대리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셸 위의 성 대결은 그것이 '강요된 여성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함을 드러낸다. 물론 자본주의의 남성 가부장제 질서, 그것도 남성 권력의 직접적인 물질성과 육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포츠 영역에서 성 장벽에 대한 여성의 도전은 그것 자체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정한 의미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결과와 무관하게, 남성 가부장제 구조에 대한 도전, 남성 권력이 기획하고 구조화한 질서 자체를 거부하는 과정 자체가 돼야 한다. 그 과정 역시 지극히 위협적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여성성의 (재)생산과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미셸 위의 성 대결은 언제나 강조되는 '소녀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너무나 안전한 도발인 동시에 상품화된 여성성(남성 가부장제의 관음, 관리의 시선이 내재된)이라는 점에서 예고된 실패다.

다시 말해 남성 질서에 대한 미셸 위의 도전은 '골프장'이라는 찻잔 속의 태풍(성공할지라도)이라는 점, 그녀의 사회성(골프장 밖의 활동)이 스포츠의 과잉된 남성성(나아가 남성 가부장제의 실체)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 이 모든 과정이 남성 권력의 시선이 적극적으로 투영된 여성성으로 재현된다는 점 등에서 즐거운 반란이 아니라 불편한 상품화로 귀결된다.

남성의 이중적, 다층적 시선에서 강요된 여성성의 역할 모델에서, 남성 가부장제 구조에서 허용된 게임의 룰 속에서 미셸 위의 신체는 언제나 남성 권력의 시선으로 포획된다.

그가 자유로워지길 기대한다

최근 미셸 위는 여러 모로 위기에 빠진 듯하다. 투어 성적 부진에서부터 시작하여 기권으로 인한 진정성의 문제, 그리고 신화를 둘러 싼 거품 논란에 이르기까지, 프로 스포츠 선수로서의 존재 가치를 미셸 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도달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미셸 위가 프로 스포츠 선수로서의 존재 가치만이 아니라 '강요된 혈통주의와 여성성'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다소 낭만적일지라도 미셸 위가 더 이상 천만 달러짜리 천재 소녀가 아니라 여성 골퍼로서 존재할 수 있기를, 한국"계"가 아니어도 사랑받을 수 있는 골퍼가 될 수 있기를, 남자대회 참가만이 아니라 애니카 소렌스탐과 연대해 프로 스포츠의 성 차별과 거침없이 싸울 수 있기를 상상해본다. 물론 이것은 미셸 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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