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러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던 곳에서도 그 카랑카랑하고도, 똑부러진 목소리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2004년 5.18 광주민주항쟁 26주년 기념식장.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은 대통령 참석 행사라는 이유로 기념식 참석자들을 상대로 경찰이 검문검색을 하자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항의했다. 일국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검문검색을 하겠다니, 가뜩이나 평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독설'을 쏟아내던 전 의원은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경찰은 어쩔 수 없다면서 양해를 구하고 몇몇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검문검색을 계속했지만, 전 의원의 기세에 좌중은 기가 죽었었다.
전여옥 의원. 그의 정치경력은 짧지만 화려하다. 2004년 3월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정계에 화려하게 입문해 그 해 4월 비례대표로 초선의원이 됐다. 특유의 독설로 한나라당 대변인을 하면서 숱한 설화(舌禍)를 낳았지만 동시에 "한나라당 최고의 전사"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는 전투력을 인정받아 그는 무려 1년 9개월이나 한나라당 대변인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또 지난 2006년 7월 전당대회에서 초선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전 의원이 언제부터인가 주춤하게 됐다.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당내 경선이 본격화되면서부터다. 사실상 박근혜 전 대표의 후광으로 최고위원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전 의원은 대표적인 친박근혜 의원으로 분류됐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4월 26일 4월 재보선 패배를 책임지고 당 지도부가 총 사퇴할 것을 요구하면서 스스로 최고위원직을 던지자마자 박 전 대표 측을 비난하는 발언을 해 충격을 줬다. 그는 "(박 전 대표의) 주변 의원들이 무슨 종교집단같다", "(박 전 대표 측은) 이명박은 악(惡)이고 박근혜는 선(善)'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등 매우 강도 높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전 의원은 이어 '중립지대'를 자처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박근혜-이명박 두 대선 후보의 검증공방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다. 그는 지난 7일 <조선일보> 주말판(Why)에 기고한 "'적보다 더 미운 내편' 李와 朴"이라는 글에서 "이들에게는 단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치열한 '권력의지'이다. 그 치열함은 남녀 차이도 없고 나이 차이도 없다. 정권교체의 동지애도 없을 뿐더러 '적보다 더 미운 내 편'이 되고 말았다"고 두 후보를 비난했다. 그는 또 "검증공방은 '물귀신작전'이 될 수 있다"면서 "나아가 한나라당의 '비명횡사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전 의원이 '중립지대'에서 '입 바른 소리'를 하고 있어도, 그의 뛰어난 전투력 때문인지 이명박 캠프 영입설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었다. 그는 지난 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표 측으로부터 '이명박 저격수'가 돼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폭로해 이같은 의혹을 부추겼다. 그가 왜 박 전 대표와 갈라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해명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가 최근 이 전 시장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유럽출장에 동행한 것도 화제에 올랐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현재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 전 의원은 자신만의 '독설'과 '전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대선 본선 게임이 어서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재도약을 꾀하고 있던 그에게 엄청난 악재가 터졌다. 그의 정치 생명, 아니 더 나아가 그가 평생 쌓아온 많은 것들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름을 알리고,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더 나아가 상당한 부도 축적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 책 <일본은 없다>(푸른숲 펴냄. 1997년)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서울 중앙지법은 11일 전 의원이 <일본은 없다> 표절 논란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오마이뉴스>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특히 "원고는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일본에 대한 책을 출간하려고 자료를 수집하고 취재한 내용을 정리해 초고를 작성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지인으로부터 들은 취재내용 및 아이디어, 그로부터 건네받은 초고의 내용 등을 무단으로 사용하거나 인용해 <일본은 없다>의 일부분을 작성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무단 도용 사실을 인정했다. 오랫동안 떠돌았던 <일본의 없다>의 '표절설'이 법원에서 일부 인정된 것이다.
KBS 기자 출신의 인기 작가이면서 잘 나가던 정치인으로 상승가도를 달리던 전여옥 의원. 그가 스스로 판 웅덩이에 빠졌다. 게다가 이는 남의 것을 빼앗아 사적 이익을 취했다는,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을 만한 일이다. 제아무리 맷집과 말발이 좋은 전 의원이라도 빠져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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