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호러팬들은 국내에서 호러영화가 제작된다는 뉴스가 뜰 때마다 번번이 '이번엔 혹시?'라는 기대를 갖고, 영화가 개봉된 후에는 '그럼 그렇지!'라는 실망의 탄식을 내뱉는 것이 일상사처럼 돼버렸다. <가위>에서 시작해 <폰>, <분신사바>, 그리고 <아파트>까지 줄곧 호러영화만을 만드는 안병기 감독에 대한 기대와 지지는 전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미워도 다시 한 번'에 가깝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으면서 신인감독과 신인여배우를 배출해내는 장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고괴담> 시리즈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이수연 감독의 <4인용 식탁>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호러영화는 매년 만들어지지만 매년 이렇다 할 성과를 남기지 못하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올해에도 수많은 호러영화들이 대기하고 있고 그중 일부는 이미 개봉도 했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왜 한국의 호러영화는 이토록 호러팬들에게 언제나 절대적인 실망 혹은 절반의 만족밖에 주지 못하는 것일까? 호러팬들이 너무 까다롭게 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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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트 ⓒ프레시안무비 |
지난 주말에 개봉한 영국산 저예산 호러영화 <디센트>는 호러영화에 있어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는 영화다. <디센트>는 동굴탐험을 갔다가 그곳에 갇힌 6명의 여자 주인공들이 괴생명체의 공격을 받으며 한 명씩 죽어나가는 과정을 쫓아간다. 6명의 주인공 중 주요인물 3명의 래프팅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시작 5분만에 이들의 성격과 이들 간의 비밀과 갈등의 실마리는 물론, 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주인공의 상처까지 제시한다. 영화는 이들이 미국의 애팔래치아 산맥 근처에 모여 6명의 팀이 되어 동굴에 탐험을 하러 들어가기까지 각각 캐릭터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빠르게 제시하며, 이들이 일단 동굴에 들어간 이후 동굴이라는 갇힌 공간 특유의 폐소공포를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쇼커 장면(사운드 효과 등으로 깜짝깜짝 놀래키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는 것이 살짝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요소 하나 없이 이것만으로 밀어부친다는 느낌은 없어 다른 한국영화에서처럼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주인공들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은 주어진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에서다. 한국영화에서 종종 저지르는 오류, 즉 지루한 설명조의 대사를 읊으며 '말'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없다. 맥락없이 고어 장면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디센트>의 고어 장면은 수위가 꽤 높긴 하지만, 충분히 '이유있는' 난도질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주인공들이 괴생명체와 맞서 싸우면서 잔혹하게 그들을 처치하는 장면에서는, 피와 살이 튀는 고어 장면 그 자체에 호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절대절명의 극한의 상태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사람이 그토록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서늘한 공포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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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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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영화가 따라야 할 룰은 의외로 간단하다. 철저하게 고어 장면 그 자체에 집중해서 장르적 관습에 기대던가. 아니면 필요한 설명을 적절한 영상과 사운드 효과를 통해 주는 것이다. 전자는 호러 장르를 오랫동안 지지해온 특정 장르 컬트 팬들에게 어필하는 방법이며, 후자는 좀더 대중적으로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이다. 물론 전통적인 호러 팬들이라 해서 전자만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호러를 지지하는 팬층일수록 탄탄한 드라마와 설득력있는 공포를 주는 호러영화를 언제나 간절히 바란다. 다만 그들은 일반 관객들이 간과하는 다른 요소들 역시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좀더 섬세하게 고려하는 것뿐이다. 훌륭한 호러영화일수록 외연의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내포된 이야기는 보다 복잡한 사회상을 은유하는 것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6, 70년대를 풍미한 호러영화들은 당시 냉전체계 혹은 새로운 세대들의 반항에 대한 사회 무의식적인 공포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주요 인물이 모두 여성인 <디센트>에서, 여성들이 활발하게 사회에 진출하게 된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현대 여성들이 경쟁과 양육강식, 그리고 고도의 정치를 필요로 하는 세련된 처세술을 요구하는 소위 '남자들의 룰'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충 및 이에 대한 공포와, 이러한 여성들의 성공적인 진출 이면에서 상대적으로 남성들 및 전업주부들의 입지 축소에 대한 공포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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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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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을 앞두고 있는 <므이>를 연출한 김태경 감독은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귀신만 나왔다 하면 모두들 안일하게 '사다코'라고 비난한다면서 관객 및 평론가들에게 이미 익숙한 용어로 자리잡은 '사다코의 망령'이라는 말에 아쉬움을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포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블로그를 운영중인 블로거 Arborday씨는 자신의 블로그(http://arborday.egloos.com)에서 이 말에 반박하며 사다코와 국산 처녀귀신의 차이를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사다코는 제대로 걷지 못해 느릿느릿 기기만 하며 지겨울 정도로 관절을 꺾어댄다. 그러나 전통적인 한국의 여자귀신들은 "공중제비를 돌기도 하며 날아다니기도 하는 잽싼 아낙네들"이다. 실제로 <극락도 살인사건>이 개봉했을 때, 많은 이들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이 사다코의 망령을 답습하지 않았다며 지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진정으로, 한국의 여자귀신들은 눈을 까뒤집지도 않으며, 그토록 느릿느릿 움직이지 않는다. 공중제비와 날기도 그렇거니와,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물 위를, 땅위를 소리없이 순식간에 이동한다. 미친 듯 도망가던 희생자는 멀리 도망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바로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너무나 빠른) 귀신을 보며 다시 한번 혼비백산하기 마련이다. <여고괴담> 1편에서 그 유명한 점프컷은 바로 한국 여자귀신의 이러한 특성을 지극히 영화적으로 표현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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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도 살인사건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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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어두운 면을 짚어내는 호러영화는 주류 질서를 재현하고 반복하는 메이저 영화들과 달리 언제나 사람들이 쉽게 말하기 꺼려하는 소재와 주제들을 다뤄왔고, 많은 경우 저예산을 가지고도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있는 고찰과 창의력 넘치는 창작 정신, 그리고 다양한 층위를 가진 재치의 유머로 한계상황을 돌파해왔다. 탄탄한 드라마는 비밀의 사연만 덕지덕지 붙인다고 획득되는 것도 아니며, 팔다리와 오장육부를 마구 난도질한다고 호러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호러영화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어장면이 주는 '불편감'은 다른 요소와 훌륭히 결합될 때 '호러'가 되는 것이지, 맥락없는 고어 장면 그 자체가 곧 '호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호러영화들은 상당수가 호러영화에 대해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올해도 충무로에는 호러를 표방하는 영화가 벌써 세 편이 개봉했고 더 많은 호러영화들이 개봉대기중이지만 이제껏 개봉한 '호러영화'들 모두 호러에 대한 오해들에 기반해 있는 '가짜' 호러영화들이다. 오히려 자신의 장르가 호러라는 의식을 가지지 않은 채 스릴로로 자리매김했었던 <극락도 살인사건>이 가장 높은 지지를 얻은 호러영화라는 사실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호러영화에 대해 어떤 오해와 어떤 무지를 가지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내주는 하나의 징표일지도 모른다. 부디 아직 개봉 이전인 영화들에서 절망을 배가시켜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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