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항선을 타지 않는 이상, 한반도를 벗어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북의 휴전선을 뛰어넘는 월북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삼면이 바다인 남한은 고립된 섬에 가까웠다.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환멸의 땅을 뒤로 하고 밀항을 감행하기도 했고, 해외에서 귀국을 거부한 채 망명객 신분으로 독재정권과 싸운 이들도 있었다. 재독 음악가 윤이상, 철학자 송두율, 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 소설가 황석영 등이 군부독재 시절에는 정치적 망명객이었다.
유년시절의 나도 폐쇄적인 한반도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처음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맛보았을 때, 그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에서 온 미각(味覺)이었다. 제주도 관광을 다녀온 삼촌이 자신의 여행을 자랑하기 위해 사온 선물이었건만, 그 때 먹은 바나나와 파인애플은 머나먼 외국을 상상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열대 과일이 자극하는 낯선 단맛은 혀끝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웠고, 조그만 돌하루방의 형상은 이스터 섬에 있다는 모아이상(Moais像)을 연상시켰다. 그것이 남쪽의 끝인 제주도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제주도는 내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되었다. 나의 공간적 상상력의 한계는 중국도, 일본도, 유럽도 아닌 제주도였던 것이다. 폐쇄된 공간은 이렇듯 개인의 상상력에까지 영향을 미쳐 왜소한 인간형을 조형해 낸다. 어찌되었든 그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제주도가 보통 사람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해외(海外)이지 않았던가.
그 시절, 한국사회는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였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용 말은 오직 앞만 보고 질주한다. 여권과 비자가 특권층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지던 시절의 한국사회는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였다. 여권과 비자로 외부출입이 통제된 공간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조국 근대화'을 이뤄냈고, 비약적 발전이라는 '고도성장'의 경주로를 질주했다. 심지어는 해외에 있는 이들을 불온시하기 위해 재일조선인 문인과 교류한 작가들을 싸잡아 '문인간첩단 사건'을 만드는가 하면,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확대·조작해 내기까지 했다. 한반도에 갇혀 있는 사람들만 몰랐을 뿐, 국제 사회는 박정희·전두환을 폭압적인 독재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여권'은 일종의 'VIP 쯩' 같은 것이었다. 오직 선택받은 특권층만이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를 통과할 수 있었고, 이 쯩을 소지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윗선'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1983년 이전까지는 무역 관련 업무를 하는 선택받은 사람이 '상용여권'을 소지할 수 있었고, 외교관이나 국가공무원이 해외 파견을 나갈 때 '공용여권'을 사용했다. 젊은이들이 여권을 소지하는 경우는 '유학여권'이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시피 했다.
한국 사회에서 '관광목적의 여권 발급'을 최초로 시행된 때가 1983년이었다. 그것도 만 50세 이상으로 200만원의 관광 예치금을 1년 이상 은행에 예치한 사람에 한해 발급했을 정도다. 당시의 물가지표에 비춰보았을 때, 50세 이상의 특권층에게만 해외 여행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었다. 50세 미만의 청장년층은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노년에 접어들어야만 '포상휴가'처럼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다. 장유유서의 전통은 해외여행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니, 한국사회는 실제로 동방예의지국이었던 셈이다.
부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세력은 외부를 오염된 세계로 묘사하고, 내부의 순결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자신의 권력 아래에 있음으로써 안정을 구가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 말경까지 해외여행은 외부의 바이러스를 묻혀 오는 '이적 행위'처럼 간주됐다. 게다가 동서가 대립하고 있는 양극체제 아래서 해외 여행은 사회주의권과 대면하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었다. 분단과 냉전의 그림자는 이렇듯 짙은 음영을 드리웠던 것이다.
식민지 2등 국민에서 민주화의 주체로 - 여행자유화 조치
1987년, 6월항쟁의 거대한 물결이 남한에 몰아쳤다. 민주화란 그런 것이었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 국가가 해외에서도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자유롭게 다른 나라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국가에 험담할 수도 있는 것. 가장 기초적인 민주화였다. 그렇다고 1987년에 바로 해외여행의 자유가 쟁취된 것은 아니었다. 1987년까지만 해도 연령제한이 45세 이상으로 낮춰지는 부분적 성과만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다시 1988년 1월에는 40세 이상으로 조정됐고, 드디어 그해 7월에는 30세로 낮춰지면서 방문횟수를 연 2회로 한정한다는 규정이 폐지됐다.
해외여행의 측면에서 볼 때, 1989년 1월 1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이 날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가 시행됐다. 해방 이전까지 '일본제국주의의 2등 국민'으로서 일본·만주·대만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시기에서, 장장 44년여만에 다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결집돼 쟁취된 성과이니 더욱 기념할 만하다.
1980년대까지의 이러한 폐쇄적 성향은 한국사회의 아픈 상처로 남아 지금까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폐쇄적 민족주의는 타자(이방인)에 대한 편협한 인식을 고착화시켰고, 이주노동자와 같은 내부의 이방인에 대해 공격적 성향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도록 유도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 세력의 집권은 '규율과 통제'를 중시하는 군대식 병영체제로 한국사회를 이끌려고 했다. 닫힌 공간에서는 통제가 용이하고, 열린 공간에서는 규율이 확립되기 어렵다. 권력자는 언제나 닫힌 공간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억압받는 이들의 꿈은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고, 저 너머의 자유를 열망하는 것이다. 자유는 피마저도 감내하는 자발적 적극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에게, 자유는 오직 유일한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와 혁명에는 항상 피의 냄새가 나는 것이리라.
닫힌 공간은 인간의 감성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 생활하는 생명체는 공격적 성향을 갖기 쉽다. 그 공격성은 생존에 대한 본능적 갈망에서 나온 것이기에 자기 밖의 타자에게 위협적 성격을 띤다. 공간적 억압은 오직 원초적 본능에 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마련이다. 무한 경쟁, 그 속에서 특정 타자에 대한 집단적 공격성은 무자비한 면모를 지닌다. 폐쇄된 공간에 대한 공포가 한국사회에서는 오히려 관용의 정신을 훼손하고, 타자와 융합하는 다원주의적 가치형성을 저해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 상처는 무의식적 방어기제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치유하기가 쉽지 않다. 닫힌 공간에 대한 공포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인의 해외여행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일컬어 역사적 무의식의 폭력적 발현이라고 하면 어떨까.
해외여행은 '불온한 무엇'이던 그때
대학생들에게 '해외 어학연수' 등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조치' 이후부터였다. 그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성과였고, 1980년대 중후반의 3저 호황(저금리, 저유가, 저물가)으로 인한 효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으로 '세계화'의 거센 물결이 한반도에도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의 수에 비해 한국인의 해외방문이 적절하게 통제되던 것이 1988년대까지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불균형은 1988년 국제여행수지 흑자가 19억1000만달러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2006년 국제여행수지는 적자가 129억2000만달러에 달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에도 남한의 폐쇄적 체제는 여전히 강고했다. 모든 해외여행자를 대상으로 소양교육이 이뤄졌고, 그 교육의 중요한 주체도 보수우익 단체인 '자유총연맹'이었다. 신원조사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나 연좌제에 걸려 있는 이들은 여권발급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정부기관이 주도적으로 나서 대학생들의 해외여행을 주선하던 때가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연방(소련)이 해체되자 교육부는 각 대학의 학생회 간부들에게 해외견학을 주선했다. 1991년 겨울에 내게도 똑 같은 중국방문 제안이 들어왔었다. 경비는 교육부와 각 대학이 제공하기에 무료였고, 또래의 대학생들이 함께 간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권 견학'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분명했기에 대학 자치활동 간부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 때의 분위기는 '누가 감히 독 묻은 과일을 먹으려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20여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에는 지도교수와 교직원 이외에 신분이 모호한 참관인까지 포함돼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참관인은 안기부 직원이었다고 한다. 나는 부당한 특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중국 방문 제안을 거부했다. 그 때는 갈등이 있었을지언정, 지극히 온당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빈 자리는 누군가에 의해 채워졌고, 넓은 세계를 보고 온 동료들은 흥분된 목소리를 중국의 풍광을 묘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땐 정말 그들이 부러웠다.
1992년 즈음까지만 해도 여전히 해외여행은 불온한 냄새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무엇이었다. 그래서 국가기구는 소양교육을 지속하려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안기부 직원까지 감시요원으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그런 국가기구의 강력한 통제가 완화된 것도 1992년 6월경이었으니, 변혁은 항상 지난한 시간을 통과한 이후에야 그 과실을 수확할 수 있는 듯하다. 이 즈음에야 소양교육이 폐지되고, 신원조회도 간소화됐다.
어찌됐든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의 최대 수혜자는 대학생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과 복학생들이었다. 병역 미필자 남학생은 1991년 12월에 와서야 '해외나들이'의 조그만 자유가 부여됐다. 병역미필자가 해외연수나 배낭여행을 하려면 '해외연수기관의 장이 발행하는 초청장이나 연수허가서'가 있어야만 했지만, 1991년 이후 '소속학교의 총학장의 추천서'만으로도 여행이 가능해졌다.
병역미필자에 대한 규제는 분단현실이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대학생들에게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도 병역미필자의 '어학연수'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심하다. 관계법령이 개정되기 이전인 1997년 이전까지만 해도 병역미필자는 2개월 이상 해외에 머물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1년까지 머물 수 있도록 돼 있다. 그렇다보니, 1997년 즈음까지 대학생들의 해외여행은 '배낭여행' 위주였다.
배낭 하나 달랑 맨 대학생들 - 자발적 거지체험
내가 첫 해외여행을 떠난 것도 석사과정 때인 1997년이었다. 친구와 단 둘이서 배낭여행을 메고 1991년에 자발적으로 참가를 포기했던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배낭여행이 힘든 곳이었다. 그래서 북경-서안-청도로 이어지는 여정은 실수의 연속이었다. 서툰 중국어에 영어를 섞어가며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불편한 교통편 때문에 차편을 놓치고 낯선 도시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 때 서안외사학원 영어과 4학년생이었던 우샤오진(吳小琴)과의 만남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녀는 우리가 이틀을 허비하고도 끊지 못했던 청도행 기차표를 끊어주면서, 날카로운 충고를 했었다. 당시의 일기장에는 우샤오진의 충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다음에 중국을 방문할 때는 중국어를 공부해 오고, 중국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어서 와요. 그리고 중국역사도 공부하고요. 그리고 당신은 중국문학에 관심을 갖고 중국어로 중국문학이 많이 읽었으면 해요."
나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타국의 이방인에게 당당히 한국어와 한국 역사에 대해 공부하라고 충고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타자와 나를 같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당당함을 갖고 있는가. 여행지에서 만난 현지인은 이렇듯 내게 폭풍우와 같은 충격을 가했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자에게 당당한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우샤오진이 내게 남긴 메시지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은 해외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극기훈련이었다. 유레일 패스를 끊고 유럽으로 향한 대학생들은 국경을 별다른 제지없이 통과하는 열차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고, 시간의 켜가 겹쳐져 있는 유럽의 문화유산에서 상대적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 속에서 잠을 자고, 식빵에 고추장을 발라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강행군 속에서도 그들의 감수성은 예민하게 빛났다.
내가 유럽 현지에서 한국 대학생들의 천태만상을 직접 목격한 것은 2002년이었다. 준비하는 것만큼 보는 것이 여행이고, 태도에 따라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 이상을 보는 것이 배낭여행이다. 대학생들은 대부분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국가를 방문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한국 국적의 보헤미안이 되어 유럽 각국을 '찍고, 찍고, 또 찍는' 강행군을 지속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적극적이면서 패기 넘치는 배낭여행객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파리의 한국인 민박집에서 만났던 몇몇 대학생들의 행태는 부정적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날씨가 덥다고 민박집에 박혀 있으려고만 했고, 명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에 관한 정보에만 귀를 기울였다. 배낭여행의 형식을 빌어 쇼핑관광을 온 그 젊은이들에게 느낀 실망감은 아직도 서늘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배낭여행을 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다른 세상에 감탄하고, 한국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사회운영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현지에서 직접 몸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한 체험의 성과는 때로는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적 감정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의 표출로 전환되기도 한다. 결국, 한국 사회를 떠나야 한국 사회가 객관화될 수 있다.
배낭여행은 젊은이들이 다른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성과였다. 그 여행이 해외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노숙체험이나 거지체험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고생을 자처한 젊은이들의 국제적 감각은 어떤 식으로든 한국 사회가 세계체제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닫힌 감성에서 열린 지성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은 스스로 알을 깨는 자의 역할을 했다. 배낭여행 이후 긍정·부정을 떠나서 해외어학연수나 해외유학이 보다 활성화되었다. 배낭여행은 고액을 쏟아 붓는 '패키지 관광여행'과도 다르고, 금력을 과시하는 싹쓸이 쇼핑관광과도 다르다. 젊은이들의 도전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사서 고생하는 배낭여행객의 도전정신'은 장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학연수와 영어 식민지 - 영어 광풍
1997년 이후 대학생들의 해외 나들이는 배낭여행에서 급격히 '어학연수'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어학연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1997년에 병역미필자의 해외 장기체류가 가능해지도록 관계법령이 바뀌면서 어학연수자가 급증했다.
해외경험이 잦아지면서 관광이나 여행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문화적·지적 호기심이 고조되기 마련이다. 그 사회의 문화적 속살까지 경험하고 싶다면,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다고 각국의 현지어를 모두 습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 공용어로 일컬어지는 영어는 제국의 언어이기에 세계 각국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당대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언어는 영어다. 어느 순간부터 대학사회에서 영어는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 됐다.
교육정책의 변화도 해외 어학연수생 증가에 큰 몫을 했다. 1994년 초부터 김영삼 정부는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이른바 '세계화 담론'을 주창했다. 이후 '세계화=영어 어학능력'이라는 이상한 등식이 맹위를 떨쳤고, 기업들도 발벗고 나서 '외국유학·어학연수자'에게 채용시 가산점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객관적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 활용한다는 토익과 토플 점수는 대학 도서관을 영어학습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학생들의 '어학연수', 특히 '영어 어학연수'는 '비(非)제도적 제도'로 고착화됐다. 일종의 영어 강박증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현상은 결국 초등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되어 이제 '영어광풍'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지경이다. '기러기 아빠'의 고독한 생활도, '헬리콥터 엄마'의 치맛바람도 '제국의 언어'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했다.
한국사회의 영어중심주의는 18만7000여명의 해외 유학생중 10만800여 명이 영어권(미국·캐나다·호주 등)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체 유학생의 53.7%가 영어권에 체류하고 있는 것이다.(2004년 기준) 영어에 대한 학습 정도가 개인의 가치평가 기준으로 적용되는 한 대학생들의 어학연수는 계속적으로 팽창해 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외 어학연수만이 최선의 어학능력 개발인 것은 아니다. 나도 1997년에 중국 연변대학에 한 학기동안 교환연수생으로 있으면서 중국어 연수 코스를 수강한 적이 있다. 현지에서 언어를 배운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목적의식이 없으면 언어능력 향상은 더딜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어학연수 코스가 수강생들에게 줄 수 있는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강의실 밖의 언어를 습득하려는 이들의 언어능력 향상이 돋보였다. 언어는 문화와 함께 습득되는 것이고, 그 문화권에 대한 애정이 발현되지 않는 이상 '공허한 공부'로 맴돌 수밖에 없다.
언어는 사고체계와 연관돼 있기에 이데올로기적이다. 영어 너머에 있는 문화제국주의가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주체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암묵적 강제에 의해서라면 더욱 문제적이다. 해외 어학연수, 조기유학, 한국내의 영어 교육광풍 등은 모두 '세계화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이제 어학연수를 떠나는 대학생들도, 어학연수를 떠나도록 강요하는 기업들도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외국어능력'의 한계가 어디인지에 대해 재점검해야 한다.
토익 900점을 획득하기 위해 대학생활 전부를 투자해야 하는 사회는 얼마나 비정상적인가. 토익 900점을 맞고 취업한 회사에서 그가 고작 한다는 일이 일주일에 한 두번 외국 바이어에게 걸려온 전화를 담당자에게 바꿔주는 것이라면 얼마나 부조리한가. 어학연수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더라도, 어학연수로 인해 한국 대학교육이 담당하고 있는 교육기능이 '붕괴'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올빼미 투어 1박 3일 - 주5일 근무와 해외여행
2004년 7월, '주5일 근무제' 시행은 한국인의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여가시간이 확대됨에 따라 본격적인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주5일 근무제의 궁극적 목적인 삶의 질 향상은 개별 주체의 의지, 사회 인프라 구축, 어떤 식으로 자발적인 자기 개발의 가능성을 확대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패턴의 변화도 눈에 띄게 변화했다. 이제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전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현대사회의 사회의 쟁점이 됐다. 주5일 근무제 이후 일부에서는 '투잡(Two jobs)' 열풍이 불어 주말에 다른 수익사업을 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고, 국내외 여행 산업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해외여행에도 주5일 근무제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5년에 바로 해외여행 1천만명 시대에 돌입했고, 여행의 형태도 다양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주5일 근무제가 해외여행에 미친 직접적인 예가 '올빼미 투어'다. 올빼미 투어는 2004년부터 여행업계의 효자상품 역할을 하고 있다. 주중 근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 '금요일 저녁에 출발 - 월요일 새벽 도착' 일정인 올빼미 투어는 흔히 '1박 3일 해외여행'이라고도 지칭된다. 처음 도쿄를 중심으로 성장세를 보이다가, 홍콩·베이징·상하이·마카오 등으로 확장됐다. 심지어는 보따리 장사를 도와주는 불법행위를 해 여행자금을 벌면서 중국관광을 하는 부정적인 경우도 있다.
주5일 근무제의 긍정적인 효과는 가족 단위의 해외 여행 상품이 눈에 띄게 증가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가족단위의 여행으로는 유럽 미술관 순례 배낭여행에서, 해외 유적 답사 여행, 크루즈 여행 등이 이뤄지고 있다. 변화된 환경 속에서 가족적 유대를 재차 확인하는 가족단위 해외여행은 훈훈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해외 여행에 보편화됨에 따라 발생한 일상의 변화도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눈여겨 보지 않던 해외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환율변화에도 민감해졌다. 무비자 관광과 엔화의 초약세로 인해 2006-2007년도에는 일본 관광객이 사상유례가 없을 정도로 증가한 것도 바뀐 풍속도이다.
공간적 거리감이 현저히 줄어든 것도 해외 여행이 일상화된 것에 따른 효과이다. 자신이 간 적이 있는 공간이 외신난에 비춰지면 친근감을 느끼게 되거나, 자신이 한 때 머물렀던 국가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것도 공간적 거리감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더불어, 내부의 세계화도 만만치 않게 진행됐다. 한국인이 밖으로 나가는 만큼 외국인도 한국으로 대단위 규모로 유입되고 있다. 근 100만명에 육박하는 외국인이 한국 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단일 민족의 신화는 곳곳에 깨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여행 중에만 타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내에서 이방인들과 다문화주의적 융합을 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소비가 아닌 창조적 생산으로…한국 해외여행의 '과제'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해외여행과 관련한 소비패턴의 급격한 변화다. 직장인의 저축이 해외여행을 겨냥해 이뤄지기도 하고, 명풍 구입을 목적으로 도쿄와 홍콩으로 떠나는 이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국내 해외여행사의 급격한 성장도 주목할 만하다. 해외 여행은 이미 산업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고, 한국 사회의 중요한 소비문화로 정착 중이다. 하지만, 해외여행이 무분별한 소비문화로 정착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문학평론가 손종업은 멘딜로(A.A. Mendilow)의 <시간과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번역해 소개한 바 있다.
"공장들이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수많은 새로운 장치들(appliances)을 만들어내는 반면에 유흥산업들은 단지 시간을 죽이기 위한 향락 산업에 막대한 돈을 소비하는 모순을 만들어낸다."
주5일 근무제도 같은 모순에 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집약적인 노동시간에 고동의 노동강도를 버티면서 획득한 자본을 해외에서 향락 산업에 탕진한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힘겹게 생산하고 손쉽게 소비하는 일상문화에는 성찰할 부분은 많다. 주5일 근무제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가 바로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궁극적 목표는 '삶의 질적 향상'이라고 했을 때, 자기 실현에 기반하지 않은 여행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행과 관광을 구분해 사고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은 정신적 모험을 위한 도전 정신을 추구하고, 관광은 일상 탈피를 위한 멋진 휴식으로 규정할 수 있으리라. 여행은 이국의 타인들과 대화하고, 그 문화를 습득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자신을 만드는 행위이다. 이와 대비되는 관광은 호텔 등에 숙소를 정하고, 여흥과 오락, 쇼핑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관광도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 비록 이국 땅에서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모국어로 시끄럽게 떠들지라도, 국내에서의 억압된 생활에서 해방되는 충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이뤄지는 해외여행은 일종의 소비문화로 고착되는 경향이 있다. 여행사에서 정해주는 일정에 따라 피동적으로 움직이고, 값싼 패키지 여행에 자신을 내맡기며 항공기 사고 위험에 떨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가. 더구나 오로지 쇼핑을 위해 항공기와 국제 여객선박에 몸을 싣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고대 이탈리아 철학자 세네카는 "아무리 멀리 여행을 떠나도 결국 만나는 것은 자신"이라고 했다. 여행은 궁극적으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귀착돼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 여행은 소비가 아니라 창조적 생산으로 전화됨으로써, 한국사회의 정신적 성장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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