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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 혹은 원초적인 '질투유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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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 혹은 원초적인 '질투유발자'들

[별을 쏘다·16] 한 여성이 바라본 그녀, 사라포바

나는 딱히 잘 하거나 좋아하는 스포츠가 없다. 신문을 봐도 스포츠 면을 먼저 읽거나 탐독하는 부류는 더더욱 아니다. 기실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스포츠스타도 없다. 하지만 운동을 좋아하며, '보는 것'보다 '하는 운동' 그 움직임 자체를 좋아한다.

언뜻 보면 대한민국 대개의 여성의 삶에 스포츠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방년 서른 초반, 스포츠에 그다지 관심 없는 내 스포츠인생에 전환점을 갖게 되는 몇 사건이 있었으니, 그 첫 번째는 바로 88올림픽, 두 번째는 별처럼 섬광을 번뜩이며 나타난 결정적 '그녀'다. '부록'으로는 교과서 밑에 깔고 보았던 학창시절의 <슬램덩크> 정도라고 하겠다.

1988년 그녀, 자신의 존재감을 맘껏 떨쳤던 그리피스 조이너

때는 바야흐로 호랑이가 마스코트 하던 시절, 1988년!

휴일에 복싱이나 야구를 즐겨보던 아버지와 채널 선택권을 두고 다투던 쟁탈의 나날. 혹은 더운 여름날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그 당시 한참이나 유행했던 매스게임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동작을 하면 호출되어 벌을 서곤 했던 징글징글한 체육시간의 기억. 인간 호돌이 호순이로 인해 엄청나게 인기몰이를 했던 굴렁쇠 굴리기 선발대회까지 '굴렁쇠 굴리듯' 가파르고 아슬아슬하게 지나쳐온 굴곡의 역사. 눈이 휘둥그레지던 폭죽과 함께 화면을 수놓았던 체조선수들의 몸짓, 인간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만 같은 높이뛰기 선수들, 중력의 법칙에 조소를 날리는듯한 역도 선수들의 지나친 근육들… 어쨌든 그것은 굉장한 볼거리였으며 시각적 충격이었다.

그 당시 "트랙의 패션모델"이라 불렸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를 기억하고 있는지? 그녀는 당대 칼루이스의 100m 세계기록 갱신과 더불어 육상계의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천편일률적인 국가 유니폼들 사이에서 빛나던 그녀의 그라운드 패션, 당시 그것은 도전이자 파격이었다.

88서울올림픽 여자육상 3관왕에 오른 조이너는 그녀가 세운 여자 육상 200m, 21초 34라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물리적인 기록보다도 결승선을 통과한 후 무릎을 꿇고 기도한 그녀의 독특한 세레모니, 그리고 경기 때마다 바뀌는 세련된 이미지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패션이나 이미지로, 그것도 자기주도적으로 운동선수가 주목받았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길게 길러 치장한 손톱(지금의 네일아트보다도 더 파격적인), 배꼽이 드러나는 유니폼, 화려한 꽃무늬와 얼룩무늬의 스타킹,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유니폼으로 운동선수의 기능적인 운동복을 개성표현의 도구로 적극 활용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맘껏 떨쳤던 조이너. 38세의 짧은 생을 심장마비로 마감한 그녀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들이다.

2007년, 우리는 조이너가 세운 아성을 너무나 쉽게 흡수해 버린 군상들을 흔하게 마주하게 된다. 운동선수인지 모델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은 너무나 많은 여성스포츠 스타들. 내가 그녀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루트도 트랙이나 경기장이 아닌, 거대 스포츠 회사의 광고를 통해서이니…

지하철 광고에서 만나게 된 결정적 그녀, 사라포바

그래서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 그녀.

그녀는 지하철 옆자리 승객의 몰래 넘겨본 신문지면에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왔다. 운명이고 필연이고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품을 새도 없이 온갖 정보가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난 그녀를 지하철의 거대한 광고판에서 다시 한 번 거대한 기럭지로 장렬하게 마주하게 됐다.
▲ 러시아 테니스 선수 마리아 사라포바 ⓒ로이터=뉴시스

본명 사라포바(Maria Yuryevna Sharapova). 키 188㎝, 체중 59㎏ 취미는 조금은 안 어울리는듯 한 우표수집. 2000 에디허 국제주니어 16세부 우승을 필두로 2003-4년 AIG 재팬 오픈 우승, 2004 윔블던 테니스대회 우승, 한국의 뭇 남성들을 숨 막히게 했던 2004 한솔코리아 오픈 우승, 2004 여자프로테니스투어 챔피언십 우승. 2005 팬 퍼시픽 오픈 우승, 2005 카타르 토탈 오픈 우승, 2005 러시아 테니스협회 올해의 여자선수상, 2006 여자프로테니스투어 퍼시픽라이프 오픈 여자 단식 우승, 2006 US오픈 테니스대회 여자 단식 우승, 한숨 돌리고 2006 러시아 테니스협회 올해의 여자선수상. 그리고 러시아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서 한국의 동계올림 유치 관계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2007년 유엔개발계획(UNDP) 친선대사 및 동계올림픽 유치 홍보대사.

너무나 화려한 경력들. 그리고 그런 경력들 보다 더 화려한 것은 바로 그녀의 완벽하게 서구적인 미모다. 다른 선수들이 그저 강인함만을 가졌다면 그녀는 적당히 강인하면서도 동시에 섹시하다. "사라포바는 왜 근육이 심하게 발달되지 않았나요?"라는 여성 팬들의 시기어린 질문에서 보이듯 나름 절제된 근육도 그녀의 인기의 한 부분이다. 의상이 사회적 지위의 표상을 넘어 개성표현과 정체성을 대표하는 패션으로 자리잡은 요즘 사라포바의 경기 내용의 질과 승패 보다는 그녀가 선물해 주는 테니스 코트 의상 선물세트 혹은 그녀이기에 가능한 시원시원한 비주얼과 에너지에 팬들은 현혹되며 열광한다.

여성 스포츠스타를 '종합선물세트'처럼 소비하는 사회

사라포바하면 떠오르는 것? 일단, 예쁘고 날씬하다. 이단, 운동을 잘한다(전문성이 뛰어나다). 삼단, 젊다.

어쩌면 이것은 현대여성에게 원하는 시대적 주문이며, 주술이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적 요구사항을 그녀는 테니스 코트에서 홀연 단신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 후반기에 연극 ·영화를 상품화하고 기업화하는 경향과 함께 발생한 스타시스템은 배우를 광고의 힘으로 일약 대스타로 조작해 내고, 인기를 높이기 위하여 극의 본질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스타에 의존하여 작품을 팔게 한다. 이 시스템은 한 사람의 특이한 재능을 초기에 급신장시킨다는 장점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부정적인 면이 많다.

스타 시스템은 현재까지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스타 시스템과 상업적 스포츠마케팅의 결합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어이없는 상업적 스포츠 마케팅의 영향이자 여성선수들의 몸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는 비인기 종목인 한국프로여자배구의 인기몰이를 위해 여자 선수들의 의상을 딱 붙은 유니폼으로 교체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신문지면으로 보았던 언니들의 모멸감의 눈물에 진심으로 공감한 적이 있다.

그 시대의 여성이 사회적·문화적으로 인식되는 시선과 마찬가지로 여성스포츠스타의 자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86년 아시안 게임에서 여자 800m, 1500m, 3000m 3관왕에 오른 뒤 인터뷰에서 "우유가 먹고 싶었어요"라는 한마디 말로 전 국민을 찡하게 했던, 라면만 먹고 연습했다던 일화로 일명 "라면소녀'로 회자된 임춘애 선수. 그녀로 대변되고 강요되던 시대의 미덕은 바로 송강호가 그리도 강조하던 헝그리 정신.

"엄마가 보고 싶으면 달릴꺼야"의 만화캐릭터, 이 악다문 소녀 '달려라 하니'로 대표되는 한(恨)의 스포츠, 가난극복과 한의 승화를 지나쳐 사람들은 이제 기록 갱신이나 역경을 딛고 일어난 승리자의 의미로의 스타가 아니라, 섹시아이콘, 패션아이콘의 이미지로 운동선수들을 바라보며, 소비한다. 사라포바의 팬들은 무료 다운로드로도 제공되고 있는 '마리아 샤라포바 괴성'을 포함한 그녀의 야성미,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갖지 못할 시원시원한 몸매, 그녀의 그라운드에서의 패션을 동경하며 동시에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함께 가져오는 이미지 까지를 종합선물세트로 묶어 소비하고 활용한다.

당당하게 운동하는 당신이 사라포바의 외모일 필요는 없다
▲ 지난 21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윔블던 대회 사전 파티에 참석한 사라포바 ⓒ로이터=뉴시스

우리나라에 테니스 열풍을 다시 불게 한데에는 '사라포바 언니'의 혁혁한 공이 있다. 패셔니스트들이 패션아이템으로 하나씩을 가지고 있을법한 멋내기용 테니스 스커트를 달랑 한 벌 가지고 있을 뿐인(물론 직접 운동하는 것을 즐기는 내가 언젠가 한번은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종목이 테니스이기도 했지만) 무수한 여성들을 테니스 코트장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한 장본인이 사라포바임을 이 자리를 빌어 실토하는 바이다.

동시에 그녀는 여성들이 스포츠를 한다고 했을 때 몸과 이미지로 소급되는 구도를 더욱 확고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에어로빅을 하고 싶지만 에어로빅복의 부담스러움을 견디어야 하고 날씬한 사람만이 수영복을 입어 주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 대학 교양체육으로 수강한 수강스키 과목에서 운동복이 '딱 붙은 옷'이라고 공표가 났을 때 은근히 좋아하던 남학생들과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우르르 폐강 신청을 했던 여대생들.

고등학교 시절 체육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스포츠는 폼이에요" 그렇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것이 바로 스포츠이거늘, 그 운동을 가장 극대화 할 수 있는 자세를 익히는 '폼을 잡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그런 류의 "폼"이 아니었음이 흰 수영복, 날씬한 여고생들만 '올 에이플러스'라는 황당한 수영점수를 통해 드러났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과연 개인적 취향의 차이이거나 이유이기만 할까?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사라포바를 의식하지 않고 테니스를 치는 것이다. 남이 봐주는 테니스 운동복이 예쁜 것이 중요 할 수 있고, 그 사이로 보이는 각선미 감상하는 사람들도 물론 없어지진 않겠지만 운동을 할 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스커트 자락을 살랑 날려주는 그 시원함만을, 스포츠 그 자체만을 즐기고 싶기도 하다.

흰 수영복을 입지 않아도 날씬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수영을 하고 테니스하는 당신이 사라포바의 외모일 필요는 없다. 등산을 가시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등산복이 후지다는 이유로 등산을 기피하지 않길 바래본다.

그대의 기럭지는 영원할 지라도 그대의 젊음은 언젠가는 사라질진대, 사라포바 언니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어갈 것이다. 빛나던 외모가 혹여 시들어 가더라도 기죽지 말고 계속 그 요상한 함성을 동반한 당신의 에너지를 코트에서 날려주길 바래본다.

그렇게 진심으로 바래보면서도 동시에 보내게 되는 질투어린 시선은 어쩔 수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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