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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기여입학제'는 찬성한다면서…"

[기자의 눈] '기회균등할당제'에 반발하는 언론의 '두 얼굴'

"공정해야 할 대입에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구 입학시킨다면 특혜"라고 한다. "저소득층 대입 특혜는 포퓰리즘이다"라는 제목의 27일자 <중앙일보> 사설 가운데 일부다.

이 사설은 교육부가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다문화가정 등 소외계층 학생에게 대학 문호를 넓히고 장학금을 지급해,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균등한 교육접근권을 확대하기 위한 제도"라고 밝힌 '기회균등할당제'를 저소득층 대입 '특혜'로 규정했다.

'저소득층 대입 특혜'는 비판, '부유층 대입 특혜'는 찬성

그런데 의문이 든다. 이처럼 '특혜'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신문이 다른 종류의 '특혜'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대입 정책에 관한 보도에서 이런 경우를 찾는다면 '기여입학제'에 관한 기사를 들 수 있다.

"공정해야 할 대입에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구 입학시킨다면 특혜"라며 분통을 터뜨린다면 "공정해야 할 대입에서 '부유하다'는 이유로 마구 입학시킨다면 특혜"라는 지적에도 공감할 법하다.

하지만 '기회균등할당제'를 특혜로 규정한 신문은 '기여입학제'에 대해서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오히려 지난 3월 28일자 <중앙일보>는 "기부금 입학도 당연히 허용해야 한다. 위화감 조성 운운할 일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 김영욱 <중앙일보> 경제전문기자가 쓴 "'참새 아빠` 까지 나오는 마당에…"라는 제목의 글 가운데 일부다.

그리고 틈만 나면 기여입학제를 금지한 '3불정책'을 비판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27일자 신문만 봐도 "가난한 수재 '용(龍)' 만들려면 평준화·3불 정책부터 깨야"라는 기사가 있다.

물론 이런 논조를 취한 것은 <중앙일보>만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한 주요 언론 대부분이 비슷했다.

'정원 외 입학' 비판하려면 '기여입학제'도 비판하라

다시 <중앙일보> 사설을 보자. "교육부는 대학 교육 여건을 개선하겠다며 정원 감축을 추진해 왔다. 그러면서 정원 외 학생은 대폭 늘리겠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신문들 역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옳은 지적이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무턱대고 대학에 진학하는 세태는 잘못이다. 그리고 과거 정권이 이런 그릇된 세태에 편승해 무조건 대학 정원을 늘리기만 해 온 것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이런 판단에 따라 대학 구조조정을 추진하던 교육당국이 갑작스레 실질적인 대학 입학생 증원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런데 대학 입학 정원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면, 정원 외 입학 인원은 줄이는 게 옳다. 따라서 기여입학제의 혜택을 입는 부유한 학생이나, '기회균등할당제'가 적용되는 가난한 학생이나 모두 정원 '외(外)'가 아닌 정원 '내(內)'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기회균등할당제'로 정원 외 입학생이 늘어나서 전체 대학 정원이 지나치게 확대된 상황"을 걱정한다면 "'기여입학제'로 정원 외 입학생이 늘어나는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우려에 대해 언급한 매체는 없었다.

대학은 어떤 학생을 뽑아야 하나…대도시 학생 걱정하는 <문화일보>

그런데 '기여입학제'와 '기회균등할당제' 모두 철저히 점수만으로 줄 세워 뽑던 과거 입시제도와는 다른 것이다. 학생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는 이런 제도는 과거 방식에 대해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탐탁치않을 수 있다. 또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기준이 다양해졌다는 점에서 반기는 이들도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대학 정원을 다시 줄여야 한다면 "'기여입학제'를 통해 들어올 부유한 학생과 '기회균등할당제'를 통해 들어올 가난한 학생 가운데 어떤 학생을 우선해서 뽑아야 하는가"라는 선택이다.

이런 선택에 대한 입장 없이 '대학 구조조정'과 '학생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는 입시 제도'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문화일보>가 솔직했다. 이 신문의 26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대도시 우수학생 역차별 우려"였다. '대도시 우수학생'의 자리를 '기회균등할당제'로 입학한 소외 계층 학생들이 차지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어쨌건 이 신문은 앞서의 선택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대학 안 가도 기회 많은 부유층, 언론조차 외면하는 농·어촌

그렇다면 <문화일보>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기회의 형평성' 문제다.

부유층 학생은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다른 기회가 많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장사를 할 수도 있다.

또 아무래도 다양한 문화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기에 대중문화 부문에서 재능을 개발하기도 쉽다. 그리고 굳이 고등교육을 원한다면 외국 유학을 가도 된다.

반면 소외계층 학생은 다르다. 몸과 머리 외에는 가진 게 없다. 따라서 장사를 벌일 만한 자본을 조달하기도 어렵다.

특히 농·어촌 지역 학생이 겪는 문화적 소외는 심각하다. 변변한 공연장마저 흔치 않다. 아예 <중앙일보>같은 신문은 주말판 창간 당시 서울 강남에만 주로 배포했다. 언론 접근의 기회마저 적은 셈이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에 노출될 기회도, 국제적인 감각을 기를 기회도 적다.

다양한 기회를 누리는 쪽보다 기회가 적은 쪽에 상대적으로 우선적인 권리를 줘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교육에 중독된 학생, '학습 능력'이 온전할까

다른 하나는 '학습 능력'의 문제다.

대학은 원칙적으로 학문을 하는 곳이고, 따라서 학생을 뽑는 일차적인 기준은 학습 능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나친 사교육 탓에 시험 점수는 높지만 학습 능력은 떨어지는 학생이 많다.

따라서 '지나친 사교육'의 폐해를 덜 겪은 학생을 뽑는 게 학생 선발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소외 계층 학생에 대한 선발 폭을 확대해야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소위 '학원가의 스타 강사'였던 이범 씨는 종종 "'사교육 중독'이 학생들을 망친다"라고 이야기한다. "학생들의 사교육 의존이 지나쳐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을 키울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학생들의 스스로 공부하는 힘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사교육을 통해 부를 축적한 그가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사교육 전문가 역시 지나친 사교육의 폐해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입시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다른 강사 역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차라리 외우는 게 편해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 어려운 수학 문제를 놓고 한참동안 골똘히 궁리해서 답을 찾아내거나, 수학 공식을 직접 증명해보려고 도전하는 학생, 또는 교과서 속의 수학 개념을 곰곰이 곱씹어보는 학생이 과거보다 크게 줄었다는 이야기다.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혼자 차분히 생각하면서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너무 어린 시절부터 '문제 푸는 요령'을 연습하는 데만 길들여졌다는 설명이다.

'문제 푸는 요령' 익히느라 '생각하는 힘' 잃은 학생들, 대학에서도 과외 받아

이런 이야기는 대학에서도 나온다. 서울대 공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 모 씨는 얼마 전 학부생들의 전공 과목 시험 답안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험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았더라도, 시험지를 받아 놓고 열심히 궁리했더라면 풀 수 있었을 문제를 아예 포기한 경우가 많았던 것.

그는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생각하는 것은 귀찮아하는 학생이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추상적인 수학 개념을 자기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체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학원 강사가 떠먹여 주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데 지나치게 길들여졌기 때문인 듯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학생이 전공과목을 따라가기 위해 사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학점 경쟁이 치열해진 까닭이기도 하지만, 혼자 공부하는 능력 자체가 퇴화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풍경이다.(☞관련 기사 : 동갑내기 두 대학생의 너무 다른 하루 )

그리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능력이 없는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지 못 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학생들로 메워진 대학이 학문 탐구의 장이 되기 어려우리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 푸는 요령'만 연습해서 수능 점수를 높인 학생들을 많이 뽑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사교육을 통해 점수를 높인 학생과 혼자 공부하면서 실력을 쌓은 학생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도 잘못이다.

물론 어떤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며 공부한 학생'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별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교육을 덜 받은 학생이 이런 경우에 가까우리라는 것, 그리고 소외계층일수록 사교육을 덜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점만 고려해도 소외 계층 학생에 대한 선발 폭을 확대해야한다는 주장의 정당성은 확보된다.

ZEP 추진한 프랑스, "부유층에 대한 '적극적인 차별'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회균등할당제'를 둘러싼 이번 논란을 아예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의 계기로 삼자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문화일보>는 '대도시 우수 학생'에 대한 '역차별'을 우려했다. "그런데 이런 차별이 과연 나쁜가"라는 목소리다.

1980년대 초, 프랑스 미테랑 정부는 "가장 덜 가진 자에게 가장 많이 주자(Donner le plus a ceux qui ont le moins)"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런 구호와 함께 교육여건이 열악한 지역을 교육우선지역(Zone d'Education Prioritaire, ZEP)으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지원을 쏟아 부었다.

이런 정책이 부유층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당시 미테랑 정부는 "차별은 필요하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차별'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응수했다. '덜 가진 자'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적극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은 누구에게나 고른 기회를 부여하는 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설명이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한 축은 기회의 평등이며, 이미 불평등한 조건이 고착화된 사회에서 평등을 추구하려면 오히려 차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런 주장의 배경을 이룬다.

'역차별' 논란을 넘어 '평등을 위한 차별'을 이야기하자

그리고 이런 생각은 프랑스 사회에서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합의된 것이다. 지난 2002년 3월, <르몽드>는 ZEP 시행 20주년을 맞아 대통령 후보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극우파 후보인 르펜을 제외한 모든 후보가 교육 기회에 대한 '적극적인 차별'의 필요성을 지지했다.

오히려 ZEP지역에서 근무하는 교사에 대해서도 지원을 강화해야한다는 등 이런 '차별'을 전면화해야한다는 주장이 주를 이뤘다.

이런 사례를 떠올리면, '대도시 우수학생에 대한 역차별'을 우려하는 한국 언론의 보도는 씁쓸하기만 하다.

더 많은 기회를 누린 학생에 대한 '차별'은 당연하다. 이제 한국에서도 '평등을 위한 더욱 적극적인 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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