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0번째 유월이 돌아왔습니다. 형과 나는 같은 해 대학을 들어가 87년, 21살의 나이 때 뜨거운 유월의 햇살아래 아스팔트 위에 서 있었을 겁니다.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니. 나나 형은 어느 사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라는 이름의 중년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육체 곳곳에 이상징후가 나타나고, 단순 열정보다 작업의 수준을 우려하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나이입니다. 흘러버린 세월 이상으로 먼 여행을 한 느낌입니다. 이제 출발지점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나가 아닌 듯합니다. 과연 무엇이 변한 것일까요?
오늘의 평온한 풍경, 당신의 소식에 작은 금이 갔습니다
스무번째 6.10을 부산에서 맞았습니다. 영광도서갤러리에서 초대개인전을 마친 오늘(10일)이 마침 그 날이었습니다. 작품들을 포장해 택배회사를 통해 서울로 보내고 부산역으로 왔습니다. 역 광장은 많은 인파로 번잡했습니다. 6월 항쟁 20주년 행사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축제 같았습니다. 부산 지역의 수많은 민주단체들이 저마다 부스를 차리고 다양한 사회 이슈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민주 박람회' 같은 분위기입니다. 노동, 문화, 통일, 주한미군문제, 환경문제 등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관련 성과들과 미완의 숙제들이 파노라마를 이룹니다.
역 광장의 풍경을 보면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날의 살벌함도, 그날의 격정도 사라졌습니다. 오늘의 풍경은 참 편안하고 평화롭습니다. 당시 "우리에게도 군사독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 과연 올까"하던 고민들마저 새삼스러울 뿐입니다. 현실은 당시의 고통마저도 중화시키나 봅니다. 전경에게 두들겨 맞던 기억, 엄동설한 서대문구치소에서 곱은 손을 부비던 기억, 어느 날 아침 공안경찰에게 끌려가 사라진 동지들의 기억이 이제 그리 아프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늘 내가 누리는 평온함이 그 고통과 교환한 대가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평온함에 조그마한 금이 가버렸습니다. 형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는 소식 이후로 말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끌려간 가장은 어떤 심정일까"
사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함께 운동조직을 꾸려 본 일도, 사진 작업을 함께 한 일도, 하다못해 술을 함께 나눠 본 일도 없습니다. 그저 멀리서 서로의 작업을 알고 있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형은 청년 시절의 열정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사진을 작업했고, 나는 운동의 진부함과 권태로움으로부터 도피해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의 사진 주제는 더 이상 포개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작년이던가요? 도봉산 아래서 열린 보건의료노조서울본부의 간부교육에서 우리 둘은 사진 강사로 처음 만났습니다. 동갑내기라기에는 좀 머리가 많이 벗겨졌더군요. 내 강의 보다 먼저 시작한 형의 사진 슬라이드 강의를 맨 뒷자리에 앉아 들었습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사진관이 맘에 들더군요. 아니 그건 차라리 형의 철학이자 세계관을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아! 이 사람 지난 스물한 해 만만찮게 살아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강의가 끝나고 그 먼 강화까지 밤을 달려 가야 한다기에 굳은 악수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형의 구속 사실을 신문지면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날 나는 오래 전부터 알던 몇몇의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괜찮냐고. '구속된 다큐작가 L씨가 너 아니냐'고. 나이도 같으니 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날 아침 두 아이는 학교에 가고, 막내를 안고 밥을 먹이는 아내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보안법으로 끌려간 가장은 어떤 심정일까.
변치 않은 것은 국가보안법이고, 변한 것은 그 법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게 된 나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고통받는 것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 입니다. 6월 그날로부터 스무 해가 지나 역 광장 앞에서 '민주 박람회'를 하는 사회에서 아직도 사상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집니다.
변화한 우리의 삶이 그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최초의 사진가(!)를 구명하기 위해 우리 사진계가 한 일이 별로 없어 미안한 마음 글로나마 전합니다. 서명운동이다, 모금운동이다, 석방촉구 집회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고통에 비해 "너무나 한가로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합니다. 어쩌면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치열함이 사라져 버린 요즘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작동한다는 아이러니가 나를 더 무력하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단식을 끝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잘 했습니다. 더 이상 몸을 부수지 마세요. 밥 잘 먹고 건강 찾기 바랍니다. 그래야 싸웁니다. 변화하지 않은 국가보안법을 변화하지 않은 싸움으론 부술 수 없습니다. 변치 않은 것이 자랑이고, 변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변화한 우리의 삶이 그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겁니다.
잠 못 드는 무쇠막 언덕에서, 이상엽
이상엽 작가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작가. 다큐멘터리사진 웹진 이미지프레스(http://imagepress.net)의 운영자로 있다.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1년 월간 <사회평론 길>에서 글을 쓰면서 늦게 사진을 시작했다. 초기 운동적이며 사회비판적 사진을 추구했다. 1997년 시험적인 인터넷 사진매거진 <다큐네트>를 창간했고, 1999년 다큐멘터리 사진웹진 <이미지프레스>를 창간했다. 2001년 사진집 <아이들에게 전쟁 없는 미래를> 이후 <이상엽의 실크로드 탐사>, <그 곳에 가면 우리가 잊어버린 표정이 있다>, <중국 1997~2006> 등의 개인 저서와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1, 2>, <이미지프레스 무크 1, 2>를 기획하고 저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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