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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낳은 영웅, 시대를 초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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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낳은 영웅, 시대를 초월하다

[별을 쏘다⑬] 몸으로 역사를 쓴 선수 박철순

박순철과 박철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70년대 말 박순철이라는 야구선수가 있었다. 실업팀 롯데에서 잠시 뛰던 이 왼손잡이 일루수를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오로지 TV중계 중의 해프닝 하나 때문이다.

박순철 선수가 타석에 오르자, 해설자는 그 선수가 '연세대 재학 중 공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복학을 하는 대신 롯데에 입단한 선수'라고 정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중계를 보다가 나는 거의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해설자가 착각한 사람은 야수가 아니라 투수였고, 왼손잡이가 아니라 오른손잡이였다. 롯데에 입단하는 대신 연대에 복학을 했고,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박순철이 아니라 박철순이었다.

해설자조차 헷갈릴 만큼 박철순은 그다지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다. 내가 그를 알았던 이유는 연대 앞을 지나 고등학교를 등하교하고 있었다는 것, 이광은과 신언호가 있던 연대 야구팀을 무지무지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공군 야구팀에서 맹활약 중이던 박철순이 어서 빨리 복학해 연대 야구팀이 막강해지기를 오매불망 바라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내 기대와는 달리 그는 복학 후 1년 만에 연대를 떠났지만.

그의 인생은 소설책이자 현미경이다
▲ 박철순 선수 ⓒ연합뉴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대통령이 한때의 충복의 총에 횡사하고, 이어 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철순은 내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고, 필자는 그새 대학생이 됐다. 캠퍼스는 돌멩이와 취루탄으로 만신창이였고, 그 대신 여의도에서는 '국풍'이라는 사이비 대학축제가 열려 이용이라는 스타를 만들어냈다. 캠퍼스 밖은 여전히 희뿌연 회색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컬러TV의 등장은 어둠에 천박한 화려함을 덧칠했다. 그리고… 박철순이 돌아왔다.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영웅으로 돌아왔다. 희망조차 사치스러웠던 사회 분위기에서 서부극 총잡이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카타르시스였고, 프로스포츠라는 대중용 근육이완제를 처방한 후 초조하게 약효를 기다리던 정권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으며, 조악한 색깔을 입히기에 전전긍긍하던 TV에게는 비로소 컬러TV를 컬러TV답게 만들어준 은인이었다. 그를 그저 야구를 잘한 야구영웅으로 기억할 수만은 없다. 그는 그 시대를 만들고 상징했던, 그러면서도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던 역사자료다. 80년대 초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돋보기다.

그리고 또 시간이 갔다. 미국 메이저리그 팀 일년 경기 수의 반도 안 되는 80경기에서 24승을 올렸던 영웅 박철순은 다시는 10승조차 올리지 못했다. 허리를 다치고, 타구에 맞아 쓰러졌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항명사건의 주범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이혼의 아픔과 재혼의 작은 행복을 겪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생겼든, 그는 다시 일어나 공 대신 희망을 던졌다. 전능한 영웅의 자리에서 살짝 내려와 억울하게 고통받는 약자의 표상이 됐다.

환호와 시기가 존경과 동정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다른 의미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언론이 붙여준 그의 별명, 불사조. 그는 후에 "고칠 수 있는 것을 고쳤고 재기할 수 있었으니까 재기했을 뿐이다. (…) 불사조는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호칭이다"라고 말했지만, 좌절과 극복으로 점철된 그의 야구인생이야말로 그를 그저 야구를 잘한 야구영웅으로 기억할 수만은 없는 또 다른 이유다. 그는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절정과 나락을 다 경험하고 결국은 소박한 해피엔딩을 만들어낸, 그래서 수 만 명의 삶을 압축해서 대신 보여주는 소설책이다. 시대를 초월해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 좌절과 극복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훌륭한 현미경이다.

그래서 박철순은 역사성을 지닌 특정 시대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인간 삶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적 영웅이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선수였는지, 최동원이나 선동렬, 박찬호보다 나은 투수였는지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쉽게 판단할 일이 못되는 듯하다. 대신 나는 그가 가진 역사성과 보편성에 주목한다. 그를 통해 시대를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인간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평범한 야구팬, 아니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느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박찬호·박세리 스토리의 프롤로그, 마이너리그 진출

박철순이 갖는 시대적 의미는 거의 80년대 초반에 국한된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를 다면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그가 미국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금 1만 불, 월봉 700불짜리 계약을 맺은 때는 1980년 1월이었다. 1979년에 열렸던 한·미 대학야구 친선대회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본 미국 스카우터의 작품이었다. 지금은 웬만한 대학생들도 재학 중에 한번쯤은 다녀오는 미국이지만, 대학생의 해외 연수가 허용된 해가 1981년임을 기억한다면 당시의 미국이 얼마나 먼 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구체적인 한 국가가 아니었다. 자유와 기회를 상징하는 상상의 공간이었다. 혹은 커튼 뒤에서 손가락 까딱거림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공포의 빅브라더였다. 그는 그 곳에 갔다. MLB의 세계화전략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세계화 기계가 작동되기 시작함을 알려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구한말 이후 100년 가까이 구원자로 각인되어 온 미국은 이제 세계자본주의의 일부 혹은 '큰 시장'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철순처럼 꽤 괜찮은 상품이라면 한번쯤 팔아볼 수도 있는 매력적인 시장이었다.

박철순의 마이너리그 진출을 세계화와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 오버라고 생각되는가? 아니다. 90년대 후반 박찬호와 박세리는 국내 스포츠팬들의 시야를 세계(미국)로 돌리는 한편 세계(미국) 스포츠 시장의 관심을 동아시아 작은 나라에게 돌려놓았다. 80년의 박철순은 박찬호, 박세리 스토리의 프롤로그 역할을 했다.

1982년 그의 표효 뒤에는 역사의 우울함이 숨어 있었다
▲ 1982년 코리안시리즈 당시 박철순 선수 ⓒ연합뉴스

1982년 코리안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끝나는 순간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치켜 올린 박철순의 모습은 한국 프로야구 25년 역사에서 가장 많이 반복 노출된 이미지 중 하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지만, 그 뒤에는 여러 종류의 우울함이 숨어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사람들의 관심을 탈정치화시키고자 여러 정책을 만들어냈다. 언론이 통폐합됐고, 프로야구와 축구, 씨름이 시작됐으며, 준비도 덜 된 상태에서 컬러TV방송이 덜컥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 성공 이후 급작스럽게 TV방송을 시작했던 역사의 반복이었다.

어설프게, 하지만 분명한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야구. 그 한가운데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백인천과 미국에서 날아온 박철순이 있었다. 이 둘의 존재가 없었다면 프로야구는 유니폼을 갈아입은 실업야구로 끝날 수 있었고, 결국은 실패한 정치 프로젝트로 평가될 수도 있었다. 하기야 억눌린 시민들 입장에서는 프로야구가 거대한 지배전략의 일부임을 구태여 알 필요 없었다. 어차피 무언가를 통해 발산할 필요가 있었다. 박철순은 이들에게 환호할 대상을 만들어준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82년 한국 야구의 마지막 페이지였던 박철순의 포효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같은 해 첫 페이지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개막전 시구였음도 기억한다.

프로야구는 문화를 자본과 시장에 직통으로 연결한 상품이었다. 영화 한 편을 자동차 몇 만 대에 비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됐지만,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두 말할 나위 없는 '상품'으로 간주되고 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프로야구의 시작 즈음이었으리라. TV 연기자들도 상품성 대신 연차에 따른 호봉으로 보수를 받던 시절이었다. 박철순은 (비록 내수용이었지만) 국가적 문화상품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부담스러울 만큼 크지는 않으면서도 '늘씬하게 빠진' 체격, 그리고 '본토' 야구의 경험자였다는 신화성까지 덧붙여진 최고급 상품이었다. 연예인이 딴따라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바뀌고 스타급 운동선수의 사생활 하나하나마저 뉴스의 표적(뉴스도 또 다른 종류의 문화상품이다)이 되어버린 (대중)문화시장의 변혁 앞머리에는 박철순이라는 히트상품이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지나간 30년을 읽는다

그렇다고 해서 박철순을 둘러싼 역사가 모두 정치나 경제적인 국면만은 아니었다. 그는 스포츠계의 역사도 말한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사에는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되는 기록들이 몇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82년 김성한이 세운 10승 10홈런이야말로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희귀한 기록이라 생각한다. 백인천의 타율(0.412)도 당분간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록이 바로 박철순의 22연승이다 (어쩌면 전반기 40게임 동안의 18승이 더 깨지기 어려운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원년에 세워진 이 세 가지 기록은 어쩌면 다소 엉성했던 당시의 야구 수준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준이 낮았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야구계를 보여준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웅 박철순이 무지막지한 등판으로 인해 결국 디스크로 쓰러졌다는 것 또한 당시 야구계의 후진성을 웅변한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1994년 OB선수단 항명사태도 한국 체육계의 뿌리 깊은 암초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린 사건이었다. 감독의 폭언과 구타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주동자였던 영웅 박철순에게 한동안 멍에가 되었던 이 사건은 사실상 현재까지도 계속 진행 중이다. 박철순 본인이 나중에 코치가 되어 2군 선수들을 자신이 당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다루다가 문제가 되었으니. 2007년까지도 대학 체육학과의 단체 기합과 구타는 여전히 뉴스거리다.

'사료 박철순'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미국과 세계화를, 전체주의와 우민화정책을, 억압과 분출을, 문화상품과 (대중)문화산업을, 그리고 한국 야구와 체육계의 발전과 답보를 말해준다. 우리는 그를 통해 지나간 30년을 읽는다.

모두가 포기할 때 다시 돌아왔던 '영웅'

박철순이 갖는 보편적 영웅성은 1982년 이후 15년간 축적된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역사 속에 있었지만, 동시에 역사를 썼다. 200승도 2000안타도 아니었다. 그의 24승도 장명부의 30승과 최동원의 27승으로 대체되었다. 15년 동안 고작 76승을 올렸을 뿐인 투수를 '기록의 사나이' 운운하기는 낯간지럽다. 그가 쓴 역사는 야구기록지에 있지 않다. 그는 인생에 대해, 그리고 그 속의 좌절과 투혼과 행복에 대해 몸으로 역사를 썼다.

올드팬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의 첫 시련은 원년 우승 직후 허리디스크로 찾아왔다. 1년 가까운 재활이 이어졌지만, 83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 팬서비스로 출장했다가 송영운의 강한 타구에 허리를 맞고 다시 쓰러진다. 그 당시 야구장을 휘감았던 침묵과 탄식은 박철순을 기억할 때마다 떠오르는 몇몇 이미지 중 하나다. 휠체어와 술에 의지하던 시기를 거쳐 다시 일어섰지만 85년 9월 다시 허리부상. 모두가 포기했을 때 서른 살 그는 다시 돌아왔고 86년 5승과 87년 2승으로 기록지를 채웠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1988년 3월. 그는 CF 촬영 중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는다. 의사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했고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며 사람들이 기대를 버린 순간 그 혼자만 쓰러지기를 거부했다. 1990년 7월, 그는 해태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둔다. 1500일만이었다. 그리고 그 해부터 마흔이 될 때까지 6년 동안 매 해 90이닝 이상을 던지며 평균 7승 씩을 올린다. 1995년 OB가 13년만에 우승을 할 때, 원년 우승의 주역 박철순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9승 2패, 평균자책 4.47이라는 비교적 소박한 기록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마흔 살 박철순은 OB 우승의 당당한 주역이었다. 1997년 4월 29일, 42세의 박철순은 공식 은퇴식과 함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그 와중에 겪었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은퇴 후의 사업 실패와 대장암 투병은 부록으로 남기자.

그는 현실 재현의 신화였다
▲ 1997년 은퇴식 당시 무릎을 꿇고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있는 박철순 선수 ⓒ연합뉴스

95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이 확정되었을 때, TV 카메라는 박철순을 비췄다. 관중들은 '갑작스레' 박철순을 연호했다. 기록상으로는 평범한 중간계투 요원이었던 그를 불러낸 관중들의 눈에 박철순은 '야구선수'가 아니었다. 삶의 곡절을 이야기해주고 불운과 의지를 설명해준 소설가이자 학자였다. 그 날 동료 선수들의 어깨 위에 무등을 타고 운동장을 돌며 모자를 벗어 관중들에게 인사하던 박철순. 그의 이름이 조건반사처럼 불러오는 행복의 이미지다. '마이웨이'나 '에이스를 위하여' 노랫소리에 맞춰 천천히 마운드에 오르던 아우라 넘치는 모습이나 은퇴식 때 무릎을 꿇고 마운드에 입을 맞추던 중년 미남 투수의 모습도 입가에 미소를 띄게 만드는 박철순만의 이미지다.

사실 그는 교과서같은 삶을 살았던 역할모델(role model)은 아니었다. 자신의 회고담과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묶어보면, 술도 어지간하게 마셨고 도박도 좋아했으며 욱하는 성미로 자잘한 문제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억압적 지도방식에 나서서 반발했던 그였지만 그 자신 또한 후배 선수들에게 손을 대곤 했다. 분명 그는 70년대 방식을 버릴 수 없었던 90년대 선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대와 무관하게 존경받는 가치가 배어 있었다. 누구는 불굴의 의지로, 누구는 투혼으로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독기라 표현한다. 1년 동안 수퍼스타였다가 14년을 그저 그런 투수로 보냈지만, 그는 독기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의 역정에서 영웅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면 된다'식의 무식한 추진력도 아니고, 언제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천재성도 아니었다.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카리스마도 아니었다. 마치 순교자처럼 온갖 불운과 좌절을 겪었지만 감히 나라면 꿈꾸기 어려운 독기로 묵묵히 자기 자리를 되찾아온 박철순. 그는 사람들에게 '믿고 싶어 하는 신화'를 써줬다. 상징으로 가득 찬 그리스 신화나 단군신화가 아닌, 현실 재현의 신화였다.

다시 영웅을 부르며

조만간 우리는 다시 한 번 박철순을 만나게 된다. 10일 두산구단이 삼성전에 앞서 'Forever 21' 행사를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21은 박철순의 배번이다. 그가 시구를 하고 프로 원년 배터리였던 김경문 감독이 공을 받는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들 한다. 82년의 박철순도 시대가 만든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90년대의 신화로 재탄생하면서, 시대의 산물이 아닌 시대를 만드는 영웅이 됐다. 그리고 또 지나가버린 10년. 그 영웅이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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