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사례는 넘치고 또 넘친다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부당 영업 관행 피해자 증언대회'에서는 서로 다른 업종의 영업직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이 경험했던 '기막힌'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업체 간 심각한 과당경쟁에 따른 회사의 무리한 영업실적 강요와 그에 못 이긴 영업 사원 개인이 자기 돈으로 부족분을 채우거나, 팔지도 못한 물건 값을 대신 내는 일. 이런 일을 몇 개월 겪다 보면 회사를 다닐수록 월급을 받아 돈을 조금씩 모으기는 커녕 오히려 빚이 늘어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 (☞ 관련기사 보기 : "일할수록 개인 빚만 쌓이는 회사, 믿기세요?", "이 아들도 술 먹고 찜질방에서 자다가 그랬다고?")
이런 사례는 음료회사, 제과회사, 학습지, 제약회사 등에서 모두 찾을 수 있었다.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의 시작점에는 어디나 회사의 무리한 목표 강요가 자리 잡고 있었다.
"회사는 영업사원에게 절대 실현가능한 목표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 목표는 새 제품이나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사경영을 하려면 이 정도의 도전 목표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영업사원들의 근본 멍에는 바로 목표를 부여받는다는 것을 알고 입사한다는 데 있죠." (영진약품 영업직 황문규 씨)
이는 음료 영업직의 가판과 덤핑판매, 학습지 교사의 회비 대납, 제약회사 영업직의 '허위 주문서' 등으로 이어진다.
"집에 쌓인 약품만 3000만 원 어치입니다"
"현장에 일을 나가 오후가 되면 지점장의 전화가 걸려 와서 얼마나 팔았냐고 물어봅니다. '오늘 목표 못 채우면 들어오지 말라'는 등의 말과 함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면 그날 오후에는 도매상에서 다 못 판 제품을 가득 싣고 농기계 창고에 가져다 놓거나 자기 집이나 친척 집에다 음료수를 잔뜩 내려놓지요." (롯데칠성 음료영업직 김정일 씨)
"올곧게 열심히 일하면 뭐 합니까. 실적이 회사의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회사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비정석 영업'을 할 수밖에 없지요. 거래처, 즉 약국에서 필요로 하는 주문량 이상의 '허위 주문서'를 써달라고 하는 겁니다. 약국에 그 약이 도착하면 그걸 가져다가 집에 쌓아두거나 정상가격 이하로 다른 루트를 통해 처분하게 됩니다." (영진약품 황문규 씨)
황문규 씨는 "어떤 영업사원의 경우 집에 3000만 원 어치의 약품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고 털어놨다. 팔지도 못한 것을 팔았다고 신고하고 나면 그 판매금은 그대로 해당 영업직의 부담이 된다.
학습지 교사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만 두거나 잠시 중단하기로 한 회원의 변동사항을 관리자들이 승인을 안 해줘(홀딩) 그 돈을 교사가 내는 경우가 빈번하다. 전국학습지노조 이현숙 위원장은 "눈높이대교 동해지점에서는 가짜회원 600명의 회비 2000만 원 가량을 다 교사들이 부담한 사례도 있다"며 "급여에서 이런 돈이 공제되고 나면 한 달을 꼬박 일하고도 그달 월급이 오히려 마이너스 100만 원이 된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회사를 왜 안 그만두고 계속 다니냐고요?"
이들은 이런 부당 영업행위를 알리기 위해 각종 집회 및 활동을 벌이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왜 그런 불합리한 영업 관행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목표치를 그대로 받아 들이냐"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같은 질문에 대해 해태제과식품의 공호찬 씨는 "목표가 내려올 때 이의를 제기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목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오히려 가중치가 발생해요. 그도 아니면 영업구역에 대한 불이익이 돌아오고요. 대형마트 등이 있는 좋은 영업구역을 빼앗는 거죠. 영업구역 조정은 관리자들의 권한이니까 할 말이 없죠. 그러면 목표치는 더 달성하기가 어려워지고…."
이같은 일이 알려지자 인터넷 누리꾼들 가운데는 "그런 회사를 안 그만두고 계속 다니는 사람들이 문제 아니냐"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부족금 및 차액이 입사 당시 보증인으로 내세운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피해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하소연이다.
해태음료의 영업직 박모 씨는 "회사는 영업직 가운데 90% 이상이 미수 차액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근무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이를 당장은 문제 삼지 않지만 퇴직하려는 기미만 보이면 강력하게 대처한다"고 주장했다. "그만 두려고 하면 바로 자신과 보증인의 모든 재산을 가압류하는 것은 물론 횡령과 업무상 배임이라는 명목으로 형사고소까지 한다"는 것.
"입사 4년 만에 영업하며 발생한 미수 차액이 1억600만 원이 되더군요. 제가 이 돈에 대해 채무부존재 소송을 제기하고 이 사실이 회사에 통보되자 회사는 곧바로 제 전세 보증금 6000만 원과 퇴직금 1000만 원, 자동차까지 가압류를 했습니다. 그뿐인 줄 아세요? 보증인인 아버님의 전세 보증금 8000만 원과 고모부님의 부동산 2억 원 상당도 압류했습니다. 해태음료는 민사 소송 1심이 끝나자마자 고모부님의 부동산에 대해 강제경매에 들어가더군요."
"인보증인제 폐지, 허위세금계산서 발행 처벌 강화 등 대책 마련해야"
이처럼 회사와 업종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영업 직원들의 고통은 이 문제가 단순히 한 회사의 윤리적 도덕성을 넘어서는 일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제도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이 자리에서 나왔다.
영업직에 대한 회사의 무리한 판매실적 강요와 회사의 '묵인' 속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부당 영업 행위에 대한 제도적 규제를 비롯해 인보증인제도의 폐지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또 가상판매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허위세금계산서 발행에 대해 사업자의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또 임금체계의 개편 문제도 있다. 이현숙 학습지노조 위원장은 "특히 회사의 정규직이 아닌 위탁계약관계에 있는 학습지 교사의 경우에 임금 자체가 실적 중심의 100% 성과급제로 이뤄져 있어 무리한 영업 행위가 벌어진다"며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학습지 업계에서의 부정영업은 근절되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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