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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구의 지배자 혹은 멋지구리 '불량'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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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농구의 지배자 혹은 멋지구리 '불량'형님

[별을 쏘다⑫] 허재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개인적으로 농구라는 단체 스포츠에서 개인이 부각되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다. 필자가 지난 수년간 NBA를 제패했던 팀들 중 가장 선호했던 팀이 2003-2004 시즌을 장악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였던 것도 그 까닭이다.

혹자들은 지루한 수비농구라고 폄하하기도 했으나 그들이 펼친 강력한 팀 디펜스는 2000년대 초반 새크라멘토 킹스가 펼친 모션오펜스와 더불어 팀 스포츠로서의 농구의 미학을 가장 유려하게 펼쳐보였던 예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렇듯 팀 바스켓의 절정을 구사했던 피스톤즈의 수장 래리 브라운은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선수 유니폼에 쓰여진 (선수 개인의) 이름을 모두 지우고 싶다"고.

압도적 선수, 농구의 지형을 바꾸다

이런 입장에서 허재라는 압도적 개인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솔직히 난감하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그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안 한국농구의 지배자였다. 그의 지배력이 최고조였던 것은 아무래도 1997년 프로농구(KBL)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농구대잔치(점보시리즈) 시절이라 하겠다.
▲ 2004년 은퇴를 선언한 허재 ⓒ연합뉴스

1965년생인 허재는 1984년 중앙대학교 입학과 더불어 성인농구에 모습을 드러냈고 등장과 동시에 그 해 농구대잔치의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독식했다. 중앙대는 허재 입학 이전에 이미 한기범, 김유택이라는 걸출한 골밑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충희의 현대, 김현준의 삼성과 같은 실업 강자들에는 다소 못미치는 경기력을 보여줬는데, 허재의 등장과 더불어 순십간에 농구대잔치 우승권에 가까운 팀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허재 등장 이후 중앙대는 대학 레벨에서는 라이벌조차 허용하지 않는 팀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허재가 진정한 한국 농구의 지배자로 등극한 것은 1988년 기아자동차 농구팀에 입단한 이후로 미뤄둬야 할테지만 말이다.

허재의 등장은 한국 농구의 지형도 자체를 바꾸는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히 리그의 강자가 현대와 삼성에서 중앙대와 기아로 옮겨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허재 등장 이전까지의 전통적 강자들은 현대, 삼성이었고 은행팀들이 여기 도전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이들이 추구했던 농구는 전통적인 슛터 중심의 '한국식' 농구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신선우나 임정명 같은 올어라운드한 골밑 선수들이 존재했고 김동광, 유재학 같은 뛰어난 민완가드들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식 농구의 중심은 이충희, 김현준, 최철권 같은 뛰어난 단신 슛터들이었다. 특히 NBA팬들에게는 마이클 조던의 전매특허로 알려진 절정의 '페이드어웨이 점퍼'(몸을 뒤로 점프하며 던지는 슛, 만화 <슬램덩크>의 독자들은 잘 알겠지만 수비가 힘든 반면 성공률도 낮음)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아시아 최고의 슛터 이충희는 80년대 한국농구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그의 라이벌이었던 '전자슛터' 고 김현준은 슛터이면서도 드리블과 패싱에도 능한, 요즘 기준으로 치면 슛팅가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선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를 빛나게 했던 무엇보다 빼어난 슛팅력이었다.

그의 포지션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 2005년 전북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04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3차전에서 삼보의 허재가 3점 슛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허재는 아주 다른 존재였다. 전성기 시절 그의 포지션을 무엇으로 규정해야할지는 그가 은퇴한 요즘까지도 나이 든 농구팬들 사이에서 심심치않게 논란이 되고 있다. 일단 허재 등장 당시 기준으로는 센터나 파워포워드도 가능한 사이즈(188㎝)에 포워드의 득점력과 가드의 경기운영 능력을 모두 최고 레벨에서 보여준 그를 한가지 포지션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그의 포지션을 슛팅가드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가 전성기의 대부분을 대학후배이면서 이후 이상민, 김승현과 같은 정통 포인트가드의 계보를 형성하는 천재가드 강동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다. 허재-강동희의 조합은 리딩을 주도하는 포인트가드와 볼운반을 도우면서 외각 공격을 주도하는 슛팅가드의 일반적 조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번갈아 게임리딩을 담당했고 필요할 때마다 개인적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특히 기아의 2차 집권기의 수장인 최인선의 농구가 기본적으로 선수 간의 유기적 포지션 체인지와 패싱게임을 중심으로 한 모션오펜스를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모션오펜스가 가능했던 것은 허재와 강동희라는 게임 감각이 탁월한 선수들을 보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기아에서는 슛팅가드에 '가까운' 포지션으로 분류할 수 있겠으나 기아를 떠나면 그의 포지션은 더욱 애매해진다. 중앙대 시절만 봐도 초년생 시절에는 주로 포인트가드를 담당하다 강동희 입학 이후에는 슛팅가드와 포워드를 오가는 플레이를 했는데 가끔씩은 센터 포지션에서 뛰기도 했다. 국가대표에서도 강동희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포인트가드를 맡아보곤 했다.

1988년, 야생마 같은 허재의 '폭풍질주'를 기억한다

농구팬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곤 하는 허재의 명경기로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예선에서 맞붙었던 유고 연방과의 대전이 있다. 이 시합은 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 사이트에서 동영상(VOD) 서비스를 통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다. 결과로만 놓고보면 92대 104의 아쉬운 패배였으나 당시 유고의 전력을 놓고보자면 엄청난 선전을 했던 경기다. 현재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으로 분리독립됐지만 당시 하나의 연합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이 지역은 1980년대 이래 세계적인 농구 수준을 자랑하는 곳이다.

특히 1988년 유고 대표팀에는 비운의 스타 드라젠 페트로비치를 비롯하여, 블라데 디바치, 토니 쿠코치, 디노 라자 등 1990년대 NBA농구를 즐겨본 팬들에게는 익숙한 '동유럽 용병'들이 다수 포함된 막강한 팀이었다. 실제로 유고는 당시 올림픽에서 사보니스가 이끄는 소련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NCAA(미국대학농구) 소속 선수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대표팀으로 참여했다. 데이비드 로빈슨 등 '이후' NBA 스타들이 다수 포함되기는 했으나 1980년대 세계 최강 센터였던 사보니스의 소련을 당해내지 못했고 이 충격으로 1992년 올림픽에 매직, 조던, 버드가 포함된 '드림팀1'을 출범시키게 된다.

여하간 이런 괴물 같은 유고를 상대로 한국은, 비록 홈 코트의 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기가 막힌 경기력을 선보였다. 김현준이 다소 부진하기는 했으나 이충희의 득점포는 맹렬하게 타올랐고 한기범, 김유택, 이문규 등이 사수했던 골밑은, 비록 사이즈의 엄청난 차이에서 오는 약점을 완전히 보완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쉬운 골밑 득점을 허용하지 않는 끈끈한 수비력과 치열한 몸싸움을 통해 슛터들에게 오픈 찬스를 만들어주는 스크린 능력과 박스아웃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의 화룡정점은 실업 새내기 가드 허재였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 경기에서 포인트가드로 나선 20대 중반의 '팔팔한' 허재는 낮은 드리블을 통한 안정적인 볼운반과 장신 가드의 이점을 살린 폭넓은 시야, 무엇보다 상대의 패싱 라인을 정확하게 읽고 잘라버리는 수비 능력을 보여줬다. 한국 골밑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높이 때문에 골밑에서 밀릴 수 밖에 없던 한국이 경기 내내 유고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허재의 가로채기에서 시작되는 속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합에서 한국의 최다득점자는 이충희로 기억되지만 (비록 패배한 경기지만) 한국의 에이스는 이미 허재였다. 경기를 실제로 보면 어딘가에서 번개같이 튀어나와 공을 가로채고 상대 진영으로 향하는 야생마 같은 허재의 '폭풍질주'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노장의 '부상 투혼' 보여준 97-98 KBL 챔피언 결정전
▲ 97-98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에 뽑혔던 허재 선수. ⓒ연합뉴스

1988년 유고전이 '젊은' 허재의 진면목을 보여준 경기라면 세월이 10년 가까이 흐른 1997~1998 시즌 KBL 챔피언 결정전은 '노장' 허재의 진면목이 드러났던 시합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이조추'(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트리오와 최강의 외국인 선수로 군림하던 맥도웰의 현대(현 KCC)는 이미 정규시즌에서 1위를 차지하며 전력의 깊이를 보여줬으며 그에 비해 기아(현 모비스)는 (김영만을 제외하면) 팀 전체가 노쇠화되며 하락세를 보이고 있던 팀이었다.

정규시즌에서도 기아는 현대에 이은 2위도 아닌 LG에도 밀린 3위를 차지하며 이제 기아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 했었다. 게다가 시즌 막판부터 시작된 외국인 선수들의 태업 때문에 현대가 예상 외로 쉽게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러나 기아는 이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리즈를 최종 7차전까지 끌고가는 명경기를 선보였다.

솔직히 당시 필자는 허재가 소속된 기아가 아닌 현대를 응원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허재의 분전에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30대 중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노장 허재는 역시 여러 농구팬들에게 회자되는 놀라운 부상 투혼을 보여줬다. 1, 2차전에 오른쪽 손등 부상으로 출전이 불확실했던 허재는 진통제를 먹고 깁스를 한 상태로 코트에 나와 각각 29득점, 30득점을 올리며 기아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최대 승부처는 3차전이었는데 경기종료 7초전까지 92:93으로 현대를 몰아세우며 시리즈가 기아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순간 조성원의 극적인 3점슛이 터지며 95대93의 역전극이 펼쳐졌다. 이 3점슛은 시리즈의 흐름을 바꾼 3점슛인 동시에 '허재의 기아'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3점포이기도 했다.

이후 현대가 4차전을 잡고 5, 6차전을 양팀이 주고받으며 최종전까지 끌고갔다. 그리고 7차전 다시 허재와 기아의 가슴에 대못을 밖은 것은 3차전의 주인공 조성원이었다. 조성원은 경기가 팽팽한 평형상태를 유지하던(72 : 72) 4쿼터 2분 30초 벼락같은 3점포를 꽂아 넣고 다시 78 : 74 상황에서 기아를 그로기 상태로 몰고가는 2개의 3점포를 연속해서 집어넣는다. 조성원은 이 시리즈를 통해 비주류 대학(명지대) 출신의 매니악한 스타에서 농구판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대중적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현대는 왕조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됐다. 반면 기아는 왕년의 제왕으로 물러섰다. 한국 농구의 권력교체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농구는 이런 것이다'…영웅은 여전히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기아간의 왕조교체식의 영웅이 '구'왕조의 주인공인 허재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준우승팀에서 시리즈 MVP가 배출되는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신'왕조 현대를 내내 응원했던 필자의 입장에서도 이 결정에는 승복할 수 밖에 없었다. 부상투혼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소재를 제거하고 봐도 그렇다. 시리즈 내내 노장 허재는 '이조추'라는 막강한 젊은 도전자들에게 한치도 안 뒤지는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어찌보면 '젊은 녀석들아, 농구는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듯한 동양인의 신체조건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실로 멋들어진 제왕의 퇴장이었다.

농구라는 팀 스포츠에서 개인의 역할은 분명히 제한적이다. 아무리 혼자 잘해도 팀이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NBA 역사상 최고의 개인기록을 자랑했던 센터 윌트 체임벌린이 단 2차례 밖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 그의 라이벌이었던 센터 빌 러셀이 체임벌린에 훨씬 못미치는 개인기록에도 불구하고 그의 팀(보스턴 셀틱스)이 13년간 11차례의 우승을 차지하며 왕조를 구축했다는 것은 농구의 이런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승리, 혹은 우승이라는 결과물은 선수를 평가할 때도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보스턴의 왕조구축은 빌 러셀의 능력 뿐만 아니라 명장 레드 아워백의 리더쉽과 천재 포인트가드 밥 쿠지와의 조화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체임벌린과 러셀을 비교할 때 객관적 기록의 압도적 우세에도 쉽사리 체임벌린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는 이유는 러셀의 팀이 거둔 압도적 성과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NBA의 마이클 조던과 한국 농구의 허재는 개인 역량과 팀 성적의 양측면에서 흠잡기 힘든 성과를 거둔 리그의 지배자들이었다고 하겠다. 전성기 시절 필적할만한 라이벌이 없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 두 선수가 미국과 한국이라는 각각의 사회에서 수용된 양상은 사뭇 다르다. 마이클 조던은 그야말로 흑인 스포츠 스타의 모범적 롤모델로 홍보되었다. 사실 조던도 캐고 보면 도박, 외도, 과도한 승부욕이 원인이 된 팀동료들과의 불화 등 적잖은 흠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현재까지 그런 부분을 부각시키지 않고 있으며 그야말로 모범적인 슈퍼스타로 인지되고 있다. 그렇지만 허재는 다르다.

예측불허 반항아가 안겨준 알 수 없는 해방감을 회고한다
▲ 1996년 무면허로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 뒤 달아났다 서초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를 받은 허재 선수 ⓒ연합뉴스

허재는, 특히 리그의 지배자였던 시절에 황색 언론이 선호하는 스타였다. 아마 스포츠 선수로서 허재만큼 많은 '파문'을 달고 다녔던 선수도 드물 것이다. 결혼 전까지는 적잖은 여자연예인들과 '확인불가능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고 음주와 관련된 사건은 이보다도 훨씬 많았다. 기량 문제가 아니라 인성 문제가 거론되며 대표팀에서 탈락된 몇 안되는 선수이기도 했다. 언론에 비친 허재의 전성기 이미지는 '농구 잘하지만 사람은 안된 망나니' 이상이 아니었다.

과연 실제 허재가 실제로 어떤 캐릭터였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허재의 전성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허재의 망나니 이미지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8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적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모범적 스타는 좀 재수없어 보이기도 했다. 반면에 심심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허재 '형님'의 예측불허의 폭주는 뭔지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오만방자해 보이는 이미지는 불같은 승부욕과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허재는 NBA식으로 말하자면 마이클 조던(리그의 지배자)인 동시에 앨런 아이버슨 혹은 라트렐 스프리웰(반항아)이었던 것이다.

지난 시즌 KCC가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는 감독 허재의 고뇌에 찬 얼굴을 언론 매체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이제 중년이 된 허재 '형님'은 사고도 안 치시고 말씀도 점잖게 하신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느덧 30대 중반에 이른 필자는 뿌듯함과 더불어 설명하기 힘든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허재는 왕년에 한국 농구의 오만한 지배자였던 동시에 멋들어진 반항아, 혹은 불량형님이었는데 말이다. 비록 상당한 부분 매스미디어가 만든 이미지였을지 몰라도 말이다. 어찌되었건 여전히 필자와, 필자의 농구 친구들은 소주라도 한잔 하는 자리가 있으면 허재라는 전설이 만들어지던 순간을 실시간으로 접했던 인생 최고의 행운을 즐겁게 회상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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