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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차라리 '소수정당'으로 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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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주노동당, 차라리 '소수정당'으로 남아라"

[재반론]민노당, 민노총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선출방식을 둘러싸고 아직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아마도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가 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프레시안>의 기고글("민노총, '민중경선제' 철회하고 차라리 혼자 가라" )과 <레디앙>을 통한 논쟁에서 의견을 피력한 바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상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른바 '배타적 지지조직'만 참여하는 '민중경선제'라고 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 동안 민주노총 지도부가 주장해 온 내용과 이수호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반론("민노당, 영원히 '소수정당'으로 남을 것인가?" )의 논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논쟁은 진전되기보다 동어반복의 내용으로 쳇바퀴 돌 듯 돈다.
  
  민중경선제로 '다수 정당' 될 수 있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민주노총 지도부가 보여준 행태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내세우면서 지난 3월11일 당대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넘어 '독자적인 민중후보 선출' 운운하며 외곽에서 때리고, 압력을 가한 행태는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기 힘들다.
  
  민주노총 지도부 자신들이 이 당대회 결정에 참여한 민주노동당의 당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호 지도위원의 말처럼 다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이를 추진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향후 위상, 관계 등과 관련하여 새로운 차원의 논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이제 그 동안 제기된 문제들을 87년 노동자투쟁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지난 기억들을 불러와 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고, 성찰해보고자 한다.
  
  만일 민주노동당이 대선을 앞두고 개방형 경선제 혹은 민중경선제와 같은 일련의 이벤트를 시행한다고 '다수정당'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물론 그 계기로서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보수정당들이 이런저런 선거를 앞두고 그와 유사한 행사를 통해 대중의 이목을 끌어 집권당도 되고 다수정당도 되는 것을 너무 많이 목격하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를 추동하며 '진보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했던 보수정치의 거목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그 또한 죽음의 위기와 많은 고초를 넘기며 나름대로 시대의 징표를 읽고 대중과 호흡한 정치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입신의 정치'가 가능한 것이었고 그토록 질긴 생명력을 갖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적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보수정치가 이러한데,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진보정치야 두 번 말하면 잔소리다.
  
  근대 이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으며 투쟁하고 피눈물 흘리지 않은 정당이 이런 대중적인 정치적 지지기반을 올곧게 구축한 적이 있는가. 지금 서구 정당의 예를 들며 민주노동당의 행보에 대해 이런저런 훈수를 두는 많은 전문가들은 주로 그 이후의 역사만을 언급하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지적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정치, 대중운동이 어떤 험난한 길을 걸어 왔는지 주목하지 않는다면, 지금 보이는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의 노선을 둘러싼 이런저런 평가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노동당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 것도 없다.
  
  오늘의 민주노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민주노동당만 그런가. 민주노총은 어떠한가. 이것은 굳이 세계노동운동사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민주노총이 있기에, 그 중심을 이루는 대기업노조가 있기에 '국민승리21'을 거쳐 오늘의 민주노동당이 존재하게 됐다고 말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민중경선제' 요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해 왔다. 일견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에 대해 말하기 이전, 오늘의 민주노총은 그냥 만들어졌는가. 길게는 전태일 열사 이후, 짧게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을 둘러싸고 90년 전후 공안정국의 와중에서 전개됐던 그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절규, 투쟁과 아픔, 피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아니었는가. 단지 중소기업노동자를 대표한다며 은연중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 전노협이, 87년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방어하기 위해 투쟁했던 그 전노협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노태우 정권의 재권위주의화 시도를 힘겹게 막고 그나마 오늘의 민주노총이, 아니 한국노총을 포함한 대중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그 '사라진 전노협'의 중소기업노동자들은, 혹은 그 후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기업노동조합이 존재하는 바로 그 자본의 원청, 하청기업의 노동자로, 법과 제도, 운동의 사각지대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다시 고통 받으며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필자 같은 이른바 책상물림 나부랭이조차 남의 일 같지 않아 과거의 그 기억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데, 수십 년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대중에 회자되는 명망노동운동가들이 벌써 그것을 잊고 있다니 필자는 아연하기만 하다. 민주노총의 중심인 대기업노동조합이 있었기에 오늘의 민주노동당이 존재한 것이 아니냐고 강변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오히려 연민이 앞설 뿐이다. 혹시 그들을 '동지'가 아니라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위안을 받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왜 민주노총 지도부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비판들로부터도 의미 있는 교훈을 도출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갈기갈기 찢겨진 전노협의 투쟁노선을 옹호하거나 그것을 재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오류를 감추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 평가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전노협이, 그 소속 노동자들이 냉전의 물적 토대인 '브레튼우즈 체제'의 마지막 그림자 속에서, 그것도 분단체제 아래서 쓰인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하나의 전형을 기록했다면, 그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에 민주노총은 과연 어떤 전형을 창출하고 있는지 묻기 위해서다.
  
  그 전노협에게,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생존을 걸고 투쟁하던 그 거리의 '중소자본 노동자들'에게 애정 어린 비판을 하기보다 그들에게 '과잉급진성의 딱지'를 붙이고 가혹할 정도의 비판을 가했던 그 많은 '지식인들', 그들이 '악성 종양'에 걸렸다고 그 투쟁을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그래서 노동운동을 순치시키고 지금의 민주노총을 있게 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던 그 사람들조차 민주노총을 비판하고 있는 지금의 이 현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정치에 대한 낡은 발상에서 벗어나야
  
  이제 명실상부하게 유수의 대기업노동조합들을 거느리며 노동운동의 '다수'가 된 민주노총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위해 어떤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인가. 87년 노동자투쟁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 민주노총은 무엇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는가. '6월항쟁'을 기념한다고 나라 안에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지금, 민주노총은 노동자대투쟁 20주년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폐기된 민중경선제의 소생에 목을 매는 것이 지금 해야 할 가장 핵심적 사안인가. 무엇이 그토록 아쉬움을 자극하는가.
  
  민중경선제를 말하며 수구정치세력의 이전투구, '진보정치세력 대단결' 운운하기 이전에, 부지불식 중에 자신들의 몸의 일부가 된 정치에 대한 낡은 발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생산현장에서 전개하는 투쟁이야말로 '또 다른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인식에 이르지 못하는 한, 보수정치가 그어 놓은 경계를 단 한치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지난 20년의 노동운동의 역사,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가 가르치고 있는 귀중한 교훈이다.
  
  즉 글로벌 신자유주의시대 노동운동의 핵심대상인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 문제를 단지 양극화의 '경제문제', '사회문제'라고 인식하는 한, 그리하여 그것이야말로 진보운동이 부여잡아야 할 '정치문제 그 자체'라는 것을 놓치는 순간, 그리고 계속 그것이 주류를 형성하는 순간 민주노총은 결코 진보정치에 기여할 수 없으며 그 대중적 영향력 또한 반감할 것이다. 그냥 제도의 효과, 관성에 의해 하나의 조직으로 세를 유지하며 말로는 진보, 민주주의를 운위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생명력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민주노총에 기반하고 있다는 민주노동당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이수호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기고글에서 '민중경선제' 폐기를 아쉬워하며 민주노동당에게 영원히 '소수정당'으로 남을 것이냐고 반문했다.
  
  필자는 다시 묻는다. 민주노동당은 언제까지 민주노총에 끌려 다닐 것인가. 필자는 지금의 이 '기형적 관계'가 "진보정치세력을 배제하고 민주노조운동을 인정했던 87년 체제"의 산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결국 수구세력과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타협이라는 틀이 부여한 생존이었다. 전노협에 대한 공안적 탄압도 바로 이런 정치적 맥락 위에 있었다. 전노협의 요구가 너무 급진적이었기에 그렇게 탄압받았는가. 시간이 흘러 당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지금 '그렇다'고 답할 진보적 연구자들, 활동가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20년이 지나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신자유주의 경쟁국가가 지배하고 있는 지금, 진보 정치세력들이 우여곡절의 투쟁을 겪으며 '87년 체제'라는 보수정치의 경계를 넘어 오늘에 이른 지금 민주노동당은 언제까지 이 불합리한 체제를 용인할 것인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로 표현되는, '87년 체제'로부터 비롯된 이 '기형적 관계'가 실은 보수정치체제가 강제한 것이라는 점을 언제나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깨고 나올 것인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는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민주노총이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압력기제로 삼는다면 더욱 그렇다.
  
  울산에서의 패배는 무엇을 말하는가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에 기대어 다수당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민주노총을 변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민주노총을 진정 진보정치의 발전에 기여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 문제가 '가장 중요한 정치 사안'임을 인식하게 만들고 그 위에서 새로운 관계의 구성을 요구해야 한다. 더 이상 이 문제가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낡은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지난 보선의 결과, 민주노동당의 텃밭이라고 평가된 울산의 패배는 단지 선거공학, 선거운동의 실패 때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이런 낡은 관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보다 앞서 더욱 더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 그리고 민주노총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다가가 진보정치의 면모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그 전형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번 대선을 계기로 당의 혁신을 위한 논쟁을 더욱 첨예하게 전개하면서 진정 민주노동당의 살아 있음을, 그리고 누구를 위한 정당인지를 강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대중이 민주노동당에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 정책의 구체성 여부에 있다기보다 민주노동당이 진정 자신들과 함께 가고 있는가, 앞으로 함께 갈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다. 대중이 보수, 수구정치세력들의 정책이 민주노동당의 정책보다 피부에 와 닿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노동당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더 상처받고, 고통을 나누고 그들로부터 배우고 가르치며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때다. 더 없는 피눈물을 흘려야 할 때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 정책들이야말로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대중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대선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른바 '민중경선제' 논란에 발목 잡혀 더 이상 허송세월할 여유가 없다.
  
  지난 14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번 대선에서 패배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민중경선제를 거부한 당에 있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이것은 함께 대선을 해쳐나가겠다는 고민보다는 시작도 하기 전에 책임론을 언급한 것으로 민주노동당이 더 이상 민주노총에 안주할 수만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의 반응과 달리, 이 시대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진정으로 공감하고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사이의 차이와 변증'을 고민하는 당원이라면, 비록 그가 민주노총소속 대기업의 조합원이라고 하더라도 민중경선제가 채택되지 않은 것을 '배타적 지지'와 연결시키며 '다른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이들을 위해서라도 민주노동당은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통해 더욱 낮은 곳으로 스며들어가야 할 것이다.
  
  만일 이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영원한 '소수정당'으로 남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 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필자가 아는 한 그런 힘든 길을 걸은 정당이 실패했다는 역사의 기록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 길로부터 멀어지고 이탈함으로써 실패했던 정당,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기록은 비일비재하다.
  
  87년 노동자대투쟁 20년에 즈음하여, 이름 없이 사라져 지금은 어느 생산현장에서 고단하게 노동하며 살고 있을 '전노협 소속 노동자들', 그리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의해 고통 받는 그 후예들을 생각하며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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