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강 감독을 만났다. <마리이야기>와 <천년여우 여우비>를 만든 바로 그 애니메이션 감독. 한국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감독. 근데 이번엔 애니메이션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니다. 실사영화 <살결>때문이었다. "영화봤어요. 오우, 좋던데요? 파트리스 셰로의 <인티머시>하고 데이빗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섞은 것 같아요." 인터뷰를 할 때는 첫 질문의 세기가 중요한 법이다. 마치 당신 영화를 제대로, 몇번이나 복기하고 봤다는 듯한 인상을 줄 것, 조금 닭살이더라도 다른 영화와 비교하며 잘난 체를 많이 할 것, 기자의 취재 법칙은 그런 것이다.그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가지다. 아는 체를 한 만큼 같이 열심히 아는 체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당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면박을 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다. 이성강 감독은? 그저 사람좋은 미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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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강 감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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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그래요. 잘 보셨다니 좋네요." "하이고 섹스신이 정말 많이 나오대요?" "당황하셨나요? 첫번째 베드신은 일부러 7분동안 갔어요. 야해요? 난 좀더 세게 가려고 했는데… 그리구요, 영화속 남녀주인공들이 벌이는 정사는..글쎄..난 그게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둘만의 언어, 그 둘만의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늘 그렇지 않은가요?" "야하긴 무지 야한데, 오히려 성적으로 흥분되는 장면들은 아녜요. 굉장히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오히려 감정선은 꾹꾹 누른 듯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렇죠? 의도적으로 굉장히 누른 거죠?" "허허. 정말, 영화를 좋게 보셨군요. 맞아요. 그런 면이 있죠. 일부러 매우 드라이하게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자, 이쯤 되면 얘기를 처음부터 좀 정돈해서 해야 하는 법이다. 도대체 이성강 감독의 <살결>이란 영화가 뭐 어떻다는 얘긴가. 요즘의 개그 유행어로 정말 '아무~ 이유없이' 만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스파이더맨3>의 광풍이 전 극장가를 휘젓고 있는 요즘 이성강 감독의 <살결>같은 영화가 대항마로 나섰다는 점, 그것도 전국 4개 정도의 스크린 수를 가지고 그랬다는 점이 신기하고, 대견하고, 특이하고, 역설적으로 희망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가 위기라고? 물론 위기이기는 하지만 이성강 감독처럼 단돈 1억1000만원으로 이렇게 훌륭한 작가주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 한 한국영화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몇 개관이라구요? 세개관? 오우, 그것 참, 그것 참…(말을 잇지 못하는 어투)" (근데 이 사람 또 사람좋은 표정으로 이런다) "허허. 괜찮아요.개봉하는 게 어딘데요. 난 이 영화, 끝내 개봉하지 못할 줄 알았어요. 사실은 2004년에 만든 영화거든요. 사람들은 내가 애니메이션만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마리이야기> 직후에 끝낸 거에요. 그러니까 얼마 전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 훨씬 이전에 만든 거죠." "근데 왜 이렇게 개봉이 늦었어요?" "에이 다 알면서 그래요. 마케팅비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창고에 썩히나 했죠. 다행히 영진위에서 마케팅비 지원을 받았어요. 천운이죠. 그러니 스크린수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요. 이게 어딘데요? 그리고 이번 주에는 유독 나 같은 영화가 많아요. 박흥식 감독의 <경의선>도 그렇고 김동현 감독의 <상어>도 그렇고. 허허."
<살결>의 줄거리 전문 사진작가이자 기자인 민우(김윤태)는 그러나 생활의 방편을 위해 3류 시사지에서 '몰카'를 찍으며 살아간다. 어느 날 우연히 공원에서 뺑소니 교통사고로 죽은 여자(최보영)의 살결을 만진 후 그는 여자의 영혼과 소통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일이 있은 후 민우는 십수년 만에 과거의 연인이었던 재희(김주령)를 만나게 되고 유부녀가 된 그녀와 곧 격정적인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 재희와의 밀회를 위해 새로 얻은 월세집은 공원에서 죽은 여자가 살던 집. 민우는 현실의 여자와 환상의 여자를 동시에 느끼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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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결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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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실 주인공이 분열의 정신상태를 겪게 된다는 이야긴데 뒤로 갈수록 주인공빼고 오히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분열증 환자같아요. 그래서 마치 세상 모두가 분열돼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웃음) 오우 진짜 제대로 보셨네. 앞으로 내 대신 영화설명 좀 해줘요. 어쨌든 그래서 영화는 조금 초자연적인 면도 있고 초현실적인 면도 있고 그래요. 그냥 느끼는대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해석하지 말고." "쉽게 독해할 수 있는 영화는 아녜요. 그래도 영화의 주제에 대해서 직접 한마디로 해줄래요? "주인공이 극후반부에 말하는 대사가 있어요. 「모든 건 욕망이 빚어낸 환상일 뿐, 왜 우리는 그것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그게 이 영화의 주제에요. 허허" "에이 그러지말구요. 독자들을 위해서 조금 더 쉽고 자세하게요." "주인공은 현실 속의 여인과 환상 속의 여자 모두에게 집착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종종 그 환상과 현실이 헷갈리기도 해요. 오히려 현실의 삶이 환상처럼 느껴지죠. 근데 어쩌면 우리 모두는 실루엣처럼 사는 사람들이이에요.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실루엣인지 모르는데 실루엣에조차 집착하고 강박되죠. 그 분열과 불안에 대한 얘기에요." "아..점점 관객들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허허. 그럼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 올까요?" "7분간의 섹스신 얘기를 많이 하면 되지 않을까요? 웃지마세요. 영화흥행은 그런 면이 있거든요?" "오기자 때문에 웃은 게 아니구요. 실제로 영화 포스터엔가 이성강의 에로티시즘 영환가 뭔가로 문구가 나갔을 걸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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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결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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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영화좋았어요. 이런 영화 계속 만드세요. 근데 애니메이션이 어려워요 실사가 어려워요?" "둘 다 어려워요,라고 얘기하는 건 매우 진부한 답변이구요. 사실은 애니메이션이 더 어려워요. 표현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선가?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애니메이션이 더 어려워요." "아항 그래서 실사영화를 하려고 하시는구나." "허허.뭐 꼭 그런 건 아니고. 허허. 어쨌든 앞으로 실사영화 좀 많이 하려구요. 애니메이션만 가지고는 좀 결핍이 생기거든요. 세상은 애니메이션처럼 예쁘고 환상스럽게만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일그러진 세상, 어린이말고 어른들이 생각하는 세상, 그건 실사로 표현해야 해요. 영화계에 소문 좀 많이 내주세요. 이성강이가 실사영화를 굉장히 하고 싶어 한다고. 요즘엔 그렇게 투자자들을 구하기가 어렵다믄요.허허." 이성강 감독의 <살결>은 10일 전국 3개 스크린, 서울 중앙극장과 미로스페이스, 부산 서면CGV 인디상영관 등에서 개봉됐다. 이 영화가 개봉된 건 기적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시장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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