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큰 일도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 할지라도 그의 명성을 확인하는 건 영화 한편부터가 시작이다. <가까이서 본 기차>로 1967년 미국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것으로 시작해 지난 2월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국제평론가상을 수상하기까지 국제적 명성의 40년 영화경력을 지니고 있지만 국내 관객들에게는 쉽게 알려지지 못했던 체코 거장 이리 맨젤이야말로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리 맨젤 감독은 지난 달말 열린 제8회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한, 예술영화 전문수입사인 백두대간이 그의 영화 세편을 잇달아 개봉하는 것을 계기로 서울에서도 일반관객들과의 만남을 갖고 8일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관객과의 만남은 백두대간이 서울 광화문에 운영하고 있는 극장 씨네큐브에서 지난 6일 저녁에 진행됐으며 이 행사를 전후해서는 그의 대표작 <가까이서 본 기차>와 <줄위의 종달새> 등 두편이 상영됐다. 백두대간은 이 두 작품외에도 <거지의 오페라>까지 총 세편의 이리 맨젤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다. 10일과 17일, 일주일 차이로 개봉될 <가까이서 본 기차>와 <줄위의 종달새>가 각각 1967년과 1969년에 만들어진 맨젤의 초기작이라면 24일부터 상영될 <거지의 오페라>는 1991년작으로 비교적 최근작이다. 특히 <거지의 오페라>는 대통령을 지냈던 하벨이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 유명하다. 영화광들 가운데는 2002년에 만들어진 거장들의 옴니버스 영화 <텐 미니츠 첼로> 가운데 '단 한번의 순간'이란 에피소드로 이리 맨젤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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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맨젤 감독 (사진제공: 씨네큐브) |
이리 맨젤 감독이 지난 세월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준 주제의식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삶에 대한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삶은 이어진다'는 평범한 진리가 느껴진다. 그 같은 작품세계를 강조하듯 관객과의 대화 첫 멘트 역시 "삶이 당신을 슬프게 하더라도 웃음을 잃지 말 것, 웃으면 비극도 희극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웃음 속에 진정한 힘과 에너지가 있으며 그 힘과 에너지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박찬욱, 김지운 등 국내 현대작가들 영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불규칙하고 아이러니한 유머, 어색한 웃음의 충돌과 같은 느낌을 생각하면 맨젤의 작품을 이해하기 쉽다. 그런 작품세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데뷔작인 <가까이서 본 기차>다. 나치 독일 점령 말기 한 시골역에서 벌어지는 신참 역무원의 좌충우돌 체험기가 펼쳐지는데, 그 에피소드들이 줄곧 미소를 자아내게 만들어서 영화 후반 그가 선택하는 위대한 영웅적 행위와 그에 따른 비극적 결말조차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가까이서 본 기차>에는 반나치 운동, 독립, 민족, 애국따위의 '엄숙주의'가 존재하지 않거나 전면에 내세워지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의 역사는 엄숙하거나 센 척하는 찰라적 영웅주의자들이 아니라 어떻게든 삶을 이어왔던 밑바닥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가까이서 본 기차>는 철저하게 민중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영화역사서와 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재미있다'는 것이다.
<가까이서 본 기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곧 이리 맨젤 영화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서 체코 영화나 동구권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더 나아가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비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크다. 새로운 문법과 어법을 갖고 있는 체코영화 한편이 <스파이더맨3> 등으로 초토화되고 있는 국내 시장을 한순간에 호전시키지는 못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국내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지키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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