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다. 신라호텔에서 진행됐던 한미 FTA 2차, 4차, 6차 협상 당시 20여 명이 참석하는 기자회견도 수백, 수천 병력을 동원해 철저히 막았던 경찰이었다. 이번엔 어떨까? '한-EU FTA는 아직 여론화도 되지 않았고, 정부도 훨씬 부드러운 협상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기자는 내심 이번엔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발길을 서둘렀다.
"다 아시면서…서로 편하게 합시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철 출구에는 한미 FTA 당시보다는 다소 완화된 차림의 경찰들이 보였다. 일부는 헬멧과 방패를 들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국가간 협상인데 경호는 필요할 테고, 이 정도면 양호하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출입구 계단을 올라선 찰나.
길 한가운데서 일렬로 늘어선 경찰의 모양새가 심상찮았다. 기자회견 3분전. 마이크와 스피커를 들고 10여 명의 '한-EU 저지 범국본 준비위원회' 관계자들이 도착하자 경찰 간부들이 부리나케 출동했다.
"여긴 안돼요. 저~쪽에 가서 하시죠."
협상장과 너무 가까우니 좀 떨어진 곳에 가서 기자회견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기자회견을 할 수 없다는 것.
"아니 왜 여기서 못하게 합니까?"
"에이, 다 아시면서. 편하게 합시다 서로."
기자회견단이 "집회 신고도 필요없는 기자회견을 왜 막나"라며 경찰의 제지를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경찰은 두번째 이유를 댔다. 이곳은 '차도'이기 때문에 차량 통행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뒤에 차선을 막고 주차시킨 전경버스와 인도를 가득 메우고 보행자를 차도로 다니게 만드는 전경 대열도 보였지만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승강이 가운데 쏟아지는 취재진의 카메라 세례가 부담스러웠는지 결국 경찰은 "딱 20분만 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며 '타협'을 했다. 예정시간보다 15분이 지나서야 기자회견은 전경 병력에 둘러싸인 '다행히' 시작될 수 있었다.
합법과 상식, 한미 FTA로는 학습이 부족했나?
이를 지켜보던 기자의 머릿속에는 지난 1년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한미 FTA 협상만 시작되면 협상단 근처 도로는 물론이고 기자회견을 막기 위해 지하철 출입구까지 철저히 봉쇄하던 경찰이었다. 2차 협상 당시, 1인시위를 준비했던 참여연대 김기식 전 사무처장과 변영주 영화감독은 지하철 출입구 계단도 올라가기 전에 저지당했고, 기자회견단은 장충체육관 앞을 점령한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4차, 6차 협상 때도 이 같은 '기자회견 및 집회 원천 봉쇄'는 계속됐다. 지난 1월 민주노동당 의원 전원이 한미 FTA 중단을 요구하며 닷새간 단식할 때도 경찰은 이들을 신라호텔 로비에서 끌어내 노숙을 하게 했으며 사방을 전경버스로 둘러쳐 지나가던 시민들이 이를 볼 수 없게 했다.
한미 FTA 반대 목소리를 막는 경찰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사실 신라호텔 앞뿐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범국본이 주최하는 집회는 모두 금지"라고 발표했던 경찰은 각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오려던 농민과 노동자들을 기차역에서,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집 앞에서 막지 않았던가. 경찰은 집회가 예정돼 있는 곳이라면 서울시청 앞 광장, 서울역, 독립문역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병력을 동원해 이를 막고자 했다.
이같은 경찰의 행태에 대해 시민들은 "미국과 협상을 하니까…"라는 말로 허탈한 심정을 달래 보기도 했다. 정부의 '위법 행위'에 대해 상대가 세계 초강대국이자 동맹국이기 때문에 정부가 '표현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같은 법규도 위반하는 '창피함'을 무릅쓰는 것 아니냐며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2007년, 한-EU FTA 1차 협상이 막을 올린 지금도 경찰에게는 법규 준수보다 더 막중한 임무가 부여돼 있는 듯 하다. 이날 "기자회견 장소를 옮기라"는 경찰의 명령에는 '법적인 정당성'도, '논리의 일관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 경찰이 따르고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행정상의 편의'였고 정부에 대한 '과잉된 충성'일 뿐이었다.
'도로 제자리' 정부, '허무개그'도 아니고…
경찰의 이 같은 태도는 한-EU FTA를 추진하는 정부 관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FTA 타결에 급급한 관료들은 EU와의 FTA도, 중국과의 FTA도, 그 누구와의 FTA도 모두 국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말뿐이다. 정책 홍보가 갖춰야 할 '이해 득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 1년간 한미 FTA에 반대하는 많은 이들은 정부의 독단을 경고했다. 한국 경제를 뿌리채 변화시키는 정책 앞에서 많은 이들은 '사회적 합의'를 먼저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다쳤고, 어떤 이들은 굶었으며, 심지어는 어떤 이는 자신의 몸을 불태워 목숨을 희생해가며 이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처럼 사회적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정부는 교훈을 얻거나 반성을 하긴 커녕 독단만을 확고히 다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더 많은 FTA를 더 빨리 하겠다며 오히려 "한미 FTA에서 잘 보지 않았냐"며 국민들을 몰아가고 있다. '사회적 합의'나, 반대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 절차는 애당초 '없는 절차'인 셈 치는 모양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눌러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경찰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세월은 분명 지났다.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달력이 바뀌었고, '한미 FTA 협상 중'라고 적혀있던 푯말은 '한-EU FTA 협상 중'이라고 바뀌었는데, 왜 장충동 신라호텔 안과 밖은 이리도 똑같은 걸까. 아니 왜 민주주의 국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점점 후퇴하고 있는 걸까.
사회적 합의 없이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FTA 정책과, 기자회견 및 집회장에서 변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경찰들을 보며, 훗날 발생할 것이 너무 명확해 보이는 그 많은 충돌을 떠올리던 기자는 순식간에 허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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