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와 시위 속에 치러져 온 양대노총 주관의 노동절 행사가 올해는 이주노동자와 일반 시민까지 아우르는 '축제 한마당' 형식으로 차분하게 지나갔다고 일부 언론은 촌평하기도 했다. 또 소위 '춘투(春鬪)'로 표현되던 봄날 노사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히 지나가고 있는 사실을 두고 십인십색일 정도로 다양한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노동절 전날까지 파업 건수와 손실일수가 대폭 줄고 노사화합선언의 급증 등 차분히 지나가는 봄날을 놓고 '주눅 든 두 노총'이라는 과격한(?) 용어로 표현하는가 하면, '노동운동의 방향전환 조짐', '파업을 위한 파업 자제', '투쟁에서 교섭으로 무게 이동' 등의 평가도 등장했다.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봄날
해석이야 어떻든 노동운동을 둘러싼 환경은 과거 20년 동안 진행되어 온 정규근로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측에는 점점 불리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제화와 무한경쟁 속에 노동시장 비정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사이에 노동조합 조직률이 해마다 낮아지고 있는 현상은 노동조합이 노동시장에서 누려 왔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장 7월이면 비정규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 시행된다. 1999년 3월 임시일용근로자가 임금근로자 중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비정규근로가 본격적으로 사회현안으로 대두됐다. 그 후, 당사자인 비정규근로자의 목소리는 거의 배제된 상태에서 진행된 지난 7년의 논의는 각 이해당사자들의 합의 불가능한 입장만 드러낸 채, 작년 말 기간제 근로자와 시간제 근로자를 보호하는 취지의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일단락 됐다.
이제 법률 시행을 앞두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취하는, 특히 사업체에서는 비정규근로자들과의 계약관계를 서둘러 종료하는 현상이 무더기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몇 년 간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주장하던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법안 통과에 반발하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 실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일 것이며, 최근 진행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조용한 봄날'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최저임금법 개정이 불러 온 한 아파트 경비원의 죽음
노동절 전날에는 한 아파트 경비원이 방화를 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감시·단속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들에게 최저임금(통상적으로 시급 3480원인 최저임금의 70%)을 적용하도록 최저임금법이 개정됐다. 이에 관리비 상승을 저어하는 아파트 주민들이 용역회사에 경비원 구조조정을 요청해 회사는 20명 중 6명을 선별하여 해고통지를 했고, 마지막 날 업무를 마친 한 경비원이 해고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세상을 버린 것이다. 최저임금이 적용될 때 24시간 격일근무에 월 90만 원 정도를 받는 아파트 경비원들은 약 2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이기적인 동물'로 정의한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다 보면 당연히 충돌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손'은 합리적으로 이러한 충돌을 해결하여 모든 충돌 현장 참여자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균형을 만들어낸다. 그런 균형은 역시 이기적인 다른 사람을 침해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이익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정부와 같은 '보이는 손'은 엄청나게 현명한 사령관(wise commander)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균형을 깨뜨려 혼란(chaos)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필요없다는 무정부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띤다.
경제적 사고를 중심으로 한 세계화 속에 두드러지는 것이 양극화 현상이고, 이에 따라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세계화된 현상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계층 간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중산층이 감소하고, 지나친 사교육시장 활황은 학력 간 임금격차와 함께 저소득층에서 빈곤이 대물림되도록 만든다. 설령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대기업에 취업하면 중소기업에 취업할 때보다 두 배에 이르는 보수를 받고 전도는 더욱 양양하다.
더군다나 비정규근로자로 취업하면 정규근로자와 비교할 때 다시 절반 정도에 불과한 보수를 받는다. 낮은 보수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고용이 불안정해서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 위험에 더욱 노출되어 있음에도 사회보험에 가입된다는 것은 아련한 꿈으로만 남아 있다.
연공급제 중심의 불공정한 시장에서 기업은 늘 '해고'의 유혹을 느낀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불공정한 시장에 있다고 본다.
우리 노동시장에서 주류를 이루는 임금체계는 아직은 연공급제다. 일단 정규근로자로 입사하면 고용이 보장되고(물론 1997년 말 경제위기 이후 '평생직장'에서 '평생직업'으로 고용의 개념이 변해가고 있지만) 근속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소득수준도 올라가는 것이 연공급제다. 연공급제는 개인의 생애임금과 그 기간 동안 기업에 기여하는 생산성을 현재가치로 환산할 때 같도록 하면서 입사해서 기업에 적절한 숙련을 쌓아가는 근로자들이 가능한 다른 회사로 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도록 설계한 임금체계다.
연공급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신고용 개념이다. 그런데 경제위기 이후 이러한 제도에 문제가 발생했다. '정당한 사유 없이'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는 근로기준법에 '경영상 해고' 조항이 들어오고 당시 실제로 대규모 구조조정이 발생하면서 평생직장의 개념이 무너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상당수 정규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실업난 속에서 준비 안 된 이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직전에 받았던 보수와 비교할 때, 이전 회사에 맞도록 훈련된 기술을 평가해주지 않는 새로운 일자리에서 제시하는 보수는 매우 낮았고 그 결과는 장기실직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입사 초기에는 생산성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연공급제에서 일정 시점에서는 생산성과 임금수준이 일치하고 그 이후에는 임금수준이 생산성을 상회하게 된다. 기업이윤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사용자에게는 이들을 해고하고픈 유인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정규직 노조의 존재가 비정규직의 고용을 불러오다
정규근로자에게 있어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사용자로부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노동조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원으로서의 근로자는 노동조합 지도자에게 자신의 고용을 보장해주고 임금수준을 유지, 더 나아가 향상시켜 줄 것을 요구할 것이고 노동조합 지도자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야만 한다. 실업의 추억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최근 노동조합이 임금상승보다는 고용안정성에 더 치중하는 것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노동조합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용조정이 용이하지 않음을 판단한 기업은 주주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이윤을 확보하는 방안을 찾아야 했고, 대표적인 방안으로 원하청 거래에서 무수한 중소 하청업체를 대상으로 독점적 지위를 행사하는 것과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등 규제를 피해 자유로이 인력을 운용할 수 있는 비정규근로를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비정규근로자는 고용이 보장되지 않고 임금수준도 정규근로자에 비해 매우 낮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실업난과 일자리 부족으로 인해 사용자의 협상력이 우위에 있는 사용자시장(buyers' market)에서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하는 많은 근로자들이 비정규근로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고 이들을 대변해 줄 어떤 조직도 없었던 것이 지난 7년여에 걸친 노동시장의 역사다.
노동절 117주년을 보내면서 이제 노동운동이 달라져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노동운동은 우선 공정한 노동시장을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비정규근로자를 우리가 아닌 남으로 미뤄둬서는 안 된다. 모든 일하는 사람이 하나 되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첫 발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기여한 만큼은 받고 모든 사용자들 역시 기여한 만큼은 주는 그런 노동시장이 공정한 노동시장이다. 물론 이런 시장에서 능력이 부족해 밀려나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을 보듬는 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이 국가요, 사회다. 정부는 이들이 다시 시장으로 들어가 공정한 경쟁을 하고 공정한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모자라는 능력을 키워주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나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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