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수는 그러면서 "사회란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동차들이 시속 100km로 질주하는 고속도로에서 누군가의 차가 중앙선 넘어 내 차에게로, 혹은 도심에서 인도 위를 걷고 있는 나에게로 자동차가 달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운전을 하거나 거리에 나설 수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한국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혹은 세계 어디에서나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곳은 모두 마찬가지다.
그 교수는 "결국 사회란 것은 남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것"이라며 " "이런 믿음의 근원이 무엇인지 신기한 일 아니냐"고 말했다. 특히 많은 인구가 밀집해서 살고 '흉기'라고 부를 만한 도구들이 많아진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으로 전세계가 시끄럽다. 특히 미국에서는 총기 소유 규제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그 와중에 한국의 시민들은 "그래도 우리나라는 총기 소유가 자유롭지 않아 살기 좋은 거야"라며 위안하고 있는 듯 하다. 맞는 말이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들이 "밤에도 도심을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점이 좋다"고 말한다.
총이 없다고 안전한 사회일까
하지만 총이 없다고 해서 안전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이런 '믿음'이 무너졌을 때 어떤 충격적 결과가 나타나는지 이미 국내에서도 많은 사건을 목격해 왔다.
경기도 연천 GP 총기사건. 한솥밥을 먹던 동료가 막사 안에서 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터뜨려 8명이 죽었다. 최근에는 한미FTA 협상타결로 처지를 비관한 한 농민이 이웃들에게 총을 쐈다. 그런가 하면 총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유영철·정남규 등을 통해 표출된 요즘 연쇄살인사건의 특징은 사회에 대한 증오심에서 우러난 '묻지마' 살인이라는 것이고, 어린이 유괴사건은 물론 청소년의 폭력과 성폭행이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처음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인 조승희 씨의 범행 동기에 대해 '고립감'과 '외로움'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19일 공개된 조 씨의 우편물을 보면 조 씨가 '외톨이' 수준을 넘어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구절구절마다 드러난다. 사건의 성격이 놀랍게도 '유영철의 연쇄살인'의 판박이에 가깝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비슷한 사례가 없는 것이 아닌 셈이다.
총이 없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당장 길을 걷고 있는데 덤프트럭이라도 길 위로 뛰어들어 광란의 질주를 한다면 총기 사고 못지 않은 피해를 줄 것이다. 물론 총이 있고 없고에 따라 우발적 사건의 발생 확률은 다르겠지만, '모두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겠다'며 계획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총이 있고 없고는 큰 문제가 아니다.
조 씨가 저지른 이 끔찍한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안도의 한 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안전을, 서로간의 믿음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 요인이 무엇이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미국이 되고자 용 쓰는 한국
특히 최근 우리 사회의 공익적 가치가 축소되고 공동체성이 붕괴되며 양극화로 인한 계층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강건너 불구경 할 때가 아님은 명백하다.
최근 <대한민국 사용후기>(갤리온 펴냄)라는 책을 낸 미국인 문화비평가 J 스콧 버거슨(40)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너무나 지긋지긋하고 영혼이 죽어버린 어떤 나라(미국), 작은 미국이 되려고 용을 쓰는 한국이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멋진 신세계'에선 사람들이 에너지를 소비에만 쏟아 붓는다. 지금 미국이 그런 모습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섹스와 젊음을 찬양하고, 전체 사회가 소비를 기반으로 한다. 한국 역시 똑같이 변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경제 논리', '개발 논리'만이 우선시되면서 문화나 인간 발전 등 다른 부문은 무시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총만 없을 뿐 '미국'이 돼 가고 있는 한국. 이와 같은 성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사회 구성원간의 소통이 불가능한 사회, 계층간의 거리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계층구조가 굳어져 희망보다 절망의 정서가 지배하는 사회, 열심히 살아도 더 열심히 살 것을 채찍질만 하는 사회,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사회, 비정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안에서도 그 증거들은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만 부각시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미국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는 얘기다. 아직은 '미국보다' 안전하다고 느낄 때 우리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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