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노동자, 학생 등 범국본 소속 단체 회원 1만5000여 명(경찰추산 7500여 명)은 이날 오후 3시 30분 경부터 '한미FTA 저지 범국민 총궐기'를 열고 "8차 협상과 이후의 고위급 협상에서 미국이 강짜를 부리다 못해 '쌀'까지 꺼내든 마당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냐"며 "오직 협상 중단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중차대한 기로에 놓인 한미 FTA…국민의 힘으로 막아내자"
한미 양국은 미국의 무역촉진권한(TPA) 마감시한인 31일 오전 7시(미국시각 기준 30일 오후 6시)까지 모든 쟁점을 놓고 협상을 계속하는 '끝장 토론' 방식으로 최종 고위급 협상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한미 FTA 협상 타결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범국본도 오는 28일 저녁 7시 광화문에서 대대적인 촛불집회를 열고 '한미 FTA 저지 투쟁'의 파고를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입장이어서 치열한 막판 힘 대결이 예상된다. 범국본의 한 관계자는 "한미 FTA 협상이 타결이냐 중단이냐는 기로에 선 만큼 이번 주를 고비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협상 저지' 목소리를 모아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범국본은 이날 '국민들께 드리는 호소문'을 통해 "3월 말 협상 마감 시한을 앞두고 한국 정부의 '묻지마 타결' 의지와 미국 정부의 강도적인 개방 압력이 맞물려 현재 '국민 주권과 서민 생존권이 뿌리채 뽑혀 나가느냐' 아니면 '막무가내식 협상을 국민의 힘으로 중단시킬 수 있느냐'를 가름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범국본은 이어 "(정부가) 수십 억 원의 혈세를 뿌리고 반대 진영의 집회와 시위마저 봉쇄하고 탄압하는 상황에서도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여론은 의연히 과반에 이르고 있다"며 "국민들의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역사의 반동을 막아내고 정의와 진리를 수호한 것은 결국 거리의 민심이고 평범한 서민대중이었다"면서 "바로 지금 분연히 일어나 망국적 협상의 맹목적 타결을 위한 광란을 중단시켜 내자"고 말했다.
이들은 정치인, 관료 및 경찰 관계자들에게도 "역사의 고빗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며 "당장의 실리에 눈이 어두워 부당한 압력과 지시에 굴종해 국민들을 탄압하는 데 가담한다면 영원히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단식 18일차 문성현 민노당 대표 "자신 있으면 담판 짓자는데 왜 거부?"
국가인권위원회의 "집회 신고 수용" 권고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지난 23일 범국본에 집회 금지를 통보했으나 과거와 달리 이날 집회를 원천봉쇄하지는 않았다. 범국본 집회 장소를 사전에 경찰이 전경 차량으로 막던 '차량벽'은 적어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범국본의 집회에 앞서 열린 민주노동당 결의대회에서는 이날로 단식 18일째를 맞는 문성현 대표가 초췌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해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 오른 문 대표는 "처음 단식할 때는 청와대 앞에 눈보라와 꽃샘추위가 지독히도 심하더니 오늘은 봄볕이 따사롭다"며 "한미 FTA에 대해 그렇게도 자신이 있다면 국민 앞에서 떳떳이 담판을 짓자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요구했지만 노 대통령은 '타결되면 누구와도 대화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중동으로 날아갔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전국민적인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노 대통령이 협상 타결을 선언하는 순간, 민주노동당은 앞으로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주로 하던 말"이라고 비판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노무현 대통령은 FTA에 서명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으며, 노회찬 의원도 "이처럼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한미 FTA를 임기 1년도 채 안 남긴 정부가 다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협상 타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장기전 준비한다"
협상 초기부터 꾸준히 이어진 한미 FTA 반대 목소리가 최종 고위급 협상을 앞두고 점차 높아지면서 국민의 83%가 "3월 말 타결에 반대한다"는 데에까지 이르렀지만 과연 '협상 중단'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그렇기 때문에 범국본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싸움이 장기전으로 갈 것 같다"며 "타결 이후 국민투표 실시와 비준 거부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문 대표도 이날 집회에서 "노 대통령은 오는 30일 협상 타결을 선언하며 '끝났다'고 할 것이지만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투쟁의 시작"이라며 "한미 FTA의 본질을 낱낱이 밝히고 국민투표로 담판 짓자고 새로운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최근 천정배, 김근태 의원 등이 한미 FTA를 이대로 타결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국회 비준 과정도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공식 협상이 시작돼 1년이 넘도록 진행돼 온 한미 FTA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최종 결론이 주목되는 상황이다.
한편 서울시청 앞에서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오후 5시경 행진을 시작해 6시 현재 서울 광화문 주한 미대사관 앞 16차선 도로를 막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참가자들이 광화문 앞 도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종로 등지에서 일부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된 이후 범국본 등 반FTA 진영이 미대사관 앞의 광화문 도로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처음이다.
2002년 이후 첫 미국 대사관 앞 대규모 집회 "아니 여기까지 어떻게 왔데요? 심하게 싸웠나보죠?" 25일 오후 7시께 서울 광화문 미국 대사관 건너편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던 한 40대 부부는 "80년대 그렇게 데모 심하게 할 때도 여기는 절대로 터주지 않던 곳"이라며 의아해하며 기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날 가벼운 몸싸움은 있었지만 큰 충돌이나 부상자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날 낮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한미FTA 저지 범국민궐기대회'를 연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는 서울 도심 곳곳에서 행진을 벌인 뒤 이날 저녁 미 대사관과 세종문화회관 사이 16차선 도로를 완전히 막은 채 정리집회를 열었다. 미 대사관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 것은 지난 2002년 12월 경기도 양주에서 미군장갑차에 의해 숨진 효순·미선 양을 추모하는 촛불집회 이후 처음이고, 2002년 이전에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교보빌딩 앞 이순신 동상 앞까지 진출이 가능했을 뿐이다. 이날 오후 5시께 서울시청 앞 집회를 마친 1만5000여 명의 노동자, 농민, 학생, 민주노동당원,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서울 종로와 서대문, 광화문으로 나뉘어 행진을 시작했다. 경찰은 곳곳에서 경찰버스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했지만, '막히면 돌아가고, 사이사이 골목길을 누비는' 시위대를 막지 못했다. 서대문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서대문 지하철역 입구를 막은 경찰병력을 뚫었고, 적십자 병원 앞에서 광화문 방향 진출로가 막히자 적십자 병원 뒤로 돌아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다. 종로 쪽으로 진출한 시위대도 종각에서 막히자 종로 3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인사동을 관통해 광화문으로 행진했다. 이날 '미국 대사관' 앞 시위는 경찰의 유연한 대응도 한몫 했다. 방호복과 방패를 든 전·의경 대신 베이지색 근무복을 입은 순경 이상의 경찰관들이 경찰 저지선 맨 앞에 있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고, 일부 경찰관들은 시위대에게 "고생이 많으십니다. 빨리 지나가십쇼"라며 인사를 나누는 등 시위대와 충돌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시민단체 관계자도 "경찰이 사흘 전 청와대 방어선을 제외하고 최대한 대응을 자제하겠다고 알려왔었다"고 전했다. 한편 미국 대사관 앞에 모인 시위대는 '한미 FTA 반대' 구호 제창의 기세를 드높였다. 한 참가자는 "저기 옆에 흔들리는 성조기가 보이느냐. 미국이 이제 경제적으로도 한반도를 침략하려 한다"며 "반드시 한미FTA를 저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날 미국 대사관 앞 집회에 대해 경찰은 "여러분의 무단 도로점거로 서울시민들이 엄청난 교통 불편을 겪고 있다"며 집회 종료를 선언과 함께 자진 해산할 것을 수차례 요청했고, 시위대는 오후 7시20분께 자진해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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