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과 문화연대는 때론 시대의 빈곤함을 메우며, 때론 열정을 폭발시키며 승부를 겨뤘던 스포츠 스타에 관한 비평을 주 1회 연재하려 한다. '영웅'은 옳고 그름의 잣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까닭에 '영원한 존재'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웅'이 탄생한 배경에는 그가 살아 왔던 사회와 그를 띄웠던 사람들이 있다. '스포츠 스타' 속에서 다양한 사회문화적 함의를 발견할 수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9회말 2아웃 역전홈런을 날리는 타자 같은, 혹은 운동회의 마지막 계주를 장식하는 주인공을 꿈꿔 왔던 우리들의 꿈틀거리는 별들과 마주서려 한다. 이 연재가 하나의 별을 띄우기 위해 목청껏 외쳤던 열광 너머의 진실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각본 없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찾아서
열혈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이 다른 사회운동을 선도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시간은 마치 유리와 같아서, 속이 빤히 보이면서도 밖에서 오는 자극을 튕겨내곤 했었다. 물론 말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서 허물어질 보호막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캠퍼스에 적을 두고 있는 한, 학생운동에는 더 이상 서광이 비치지 않을 것임을…. 그래도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박철순을 보며 나 자신을 합리화하다
1997년 봄. 그 유리창이 깨지고 말았다. 그 유리가 부서진 건 뜻밖에도 야구장에서였다. OB(두산의 전신)와 LG가 맞붙은 날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박철순 선수가 은퇴식을 가졌다. 만원을 이룬 관중이 집에 돌아갈 생각도 않고 기립한 채, 유니폼을 입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랑스러웠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안타까웠을 것이다. 경기장에는 그의 테마곡 '마이웨이'(My way)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그가 마운드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 열혈 대학생은 모든 것이 허물어져버렸다. 그리고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명확해졌다. '불사조'. 그를 칭하던 별호의 의미가 각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학생운동 역시 박철순이 보여 줬던 것과 같아야 해. 22연승을 달리던 화려한 과거가 언제나 지속될 수는 없는 거야. 까짓 거 선발투수가 아니면 어때. 박철순처럼 중간계투가 돼도 괜찮은 거잖아. 또, 부상으로 잠깐 주춤하면 어때. 박철순처럼 딛고 일어서면 되는 거야. 혹시 팀 내에서 권위주의 때문에 부당한 문제가 생기더라도 심각할 거 없잖아. 박철순처럼 저항을 하면 되는 거니까. 화려한 모습이 아니면 어때. 학생운동도 불사조처럼 거듭나면 되는 거야.'
사람,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으로 우습다. 주위에서 그렇게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도저히 이해를 못하더니만, 박철순을 보면서 한순간에 주술에서 깨어나다니. 아니, 새로운 주술에 걸리다니.
물론,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보는 경향이 있다. 당시 나 역시 세상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니, 필경 박철순은 그 와중에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박철순이 없었더라도 나는 제2, 제3의 박철순을 들어서 나의 바람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스타'를 열망할까?
흔히들 스포츠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고 한다. 스포츠에 담긴 형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와 일치하지야 않겠지만, 어슴푸레 서로 닮은꼴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어느 축구 해설위원이 즐겨 쓰는 말처럼,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아니던가. 정해진 룰이 있고 맞춰진 규격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단지 통계적으로 경기의 승패를 어림해보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나 개인의 의지를 뛰어넘는 흐름이 있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변을 연출하고자 애쓴다.
우리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왜 이토록 열망하는 것일까. 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너무나도 미약한 인간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소에 고약한 습관 하나를 가지고 있다. 내 처지를 쉽게 파악하지 못해서 거울을 이용하는 것이다. 거울에는 나와 닮은 이미지가 있다. 타자와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또한 물리적 의미의 거울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부모가 '거울-이미지'이고,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거울-이미지'다. 그 이미지를 보고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확인한다. '나는 저 인물과 비슷하구나', 혹은 '다르구나'.
이렇게 '내'가 어떤 모습인지 대충 윤곽을 그리고, 그 후에는 다른 이미지와 거리를 재서 '나' 자신의 위치를 확정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인물들을 취사선택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우 좋은 것과 무난한 것, 그리고 불편한 것들을 가려낸다. 그리고는 그대로 따라하거나 무시하거나 정반대로 따라한다.
따라하고 싶은 이미지, 혹은 나를 닮아야 할 이미지. 그것이 바로 스타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이치와 스타덤 현상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스타덤 현상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집단적인 증후, 즉 신드롬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공통된 욕망을 아우르는 이, 그가 바로 스타다
어느 한 명도 예외 없이 스포츠 스타들은 늘 증후군을 동반했다. 왜 우리는 집단적으로 열광하는 것일까. 몇 가지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어떤 욕망을 품고 있다. 무언가 욕망하지 않는 이상 열광할 수는 없다. 둘째, 우리의 욕망들에는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기에 열광이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셋째, 스타들은 그 욕망을 한 데 아우르는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특정한 스포츠 스타를 도화선으로 열광이 터져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다소 거친 예이기는 하지만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를 상기해보자. 각각 대별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김남일, 송종국, 안정환 등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왜 그랬을까?
'터프함', '샤프함', '우아함' 등 공통된 욕망을 갖고 있던 사람들 중 남성들은 이들을 거친 이미지, 똑똑한 이미지, 멋있는 이미지 등으로 자기 자신 속에 내면화하고자 했다. 또 여성들은 이 인물들을 통해 성애적인 차원으로 각각의 이미지들을 소비했다. 이렇듯 각기 다른 사람들의 다른 욕망이라 해도 거기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리고 하필 그 무대에 김남일, 송종국, 안정환이 있었다. 물론 축구 실력 자체가 제일 밑바탕이 되겠지만, 이 아이콘(icon)들이 없었다면 월드컵 축구 응원은 민족주의 놀음에만 그쳤을 것이다. 대중들의 흥미 역시 일정 정도 반감됐을 것이다.
'냉소'가 아닌 이데올로기를 타고 넘는 '상상력'으로 보라
물론 대중들의 욕망에 섹슈얼한 차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민족주의 문제를 잠깐 언급해보자. 증후군이라는 측면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만큼 쉬운 설명거리도 드물다. 민족주의야말로 집단적 증후로서 파시즘으로 변질될 소지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삭제된 채 민족 그 자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곤 한다.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승리하라, 대한민국! 전진하라, 우리 조국!" 이 구호들이 무얼 말해주는가?
그러나 스포츠와 민족주의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그에 대한 냉소주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왜 대중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스타를 불러내느냐 하는 데에 있다.
흔히들 박찬호와 박세리가(훨씬 이전의 김일도 마찬가지다) 꿈과 용기를 주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것이 헛된 망상, 허위의식이라 할지라도, 대중들은 현실보다 고양된 어떤 상태를 갈망한다. 그리고 주술적이기는 하지만, 스타를 통해 그 갈증을 풀어버린다.
실제로 스타는 수난을 극복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가장 극적인 것이 바로 박세리의 '연못가 맨발 샷'이다. <아침 이슬>의 '헤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는 가사와 함께 증폭된 이 이미지는 대중들이 자신의 고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품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때 민족이라는 수사는 초개인적(trans-individual)으로 작동한다.
'너만 힘든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모두가 다 똑같이 힘들다. 그러니까 박세리처럼 다 같이 이겨내 보자. 박세리도 해낸 일인데, 우리 모두 해낼 수 있다.'
비판 받아 마땅한 이데올로기다. 그렇지만 인간사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를 불러주기 전에 꽃이 아니듯이, 인간은 누구나 거울-이미지를 통해, 즉 허상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대할 때 마땅히 냉소가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타고 넘는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기에 스포츠와 스포츠 스타는 여전히 열광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스타'가 오늘날 신드롬의 현주소
본원적으로 따지자면, 스타는 대중들이 만드는 셈이다. 대중들이 욕망하지 않는다면, 스타는 탄생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대중은 어떤 모호한 대상을 욕망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견고한 것이 미디어로 녹아들어가는 세상에서 스타는 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스타는 미디어라는 거울로 드러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든, 가족주의든, 이데올로기는 그 연후에 작동한다.
그러나 미디어가 발달하여 독자적인 논리를 가지게 되면, 이 선후관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 오늘날 스타는 미디어라는 거울이 욕망하며 대중을 통해서 드러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주도한다. 대중의 욕망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조건 하에 놓이게 된다.
박주영을 보자. 그가 국가대표에 뽑히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본프레레를 압박한 미디어였다. 편집자는 자기 욕망에 맞는 네티즌과 전문가의 의견을 선별하고, 그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포장한다. 북한 응원단이나 흥국생명 배구팀은 뭇 남성 대중들의 사전 동의 없이 '미녀응원단,' '미녀군단'으로 둔갑해버렸다. 축구구단 인천유나이티드의 성공은 <비상>이라는 홍보영화 하나로 수천개의 조기축구회들과 상관없이 한국판 '깔레의 기적'이 됐다.
자고로 믿으면 무릎 꿇어 기도하게 되고, 무릎 꿇고 기도하면 믿게 되는 법이다. 대중이 있고 스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타가 먼저 있고 대중이 나중에 따라오는 현실. 이것이 오늘날 미디어 산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포츠 스타 신드롬의 현주소다.
'세계화'는 오늘날 스타들의 또다른 배경
오늘날 스포츠 스타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또 다른 사회적 현실은 바로 세계화(globalization)다. 세계화라는 조건은 민족주의나 섹슈얼리티로 수렴되곤 하던 기존의 스포츠 스타덤에 거대한 변환을 불러오고 있다.
이전에도 축구선수 피아퐁이나 야구선수 타이론 우즈 같은 걸출한 외국인 선수들(소위 '용병')이 있긴 했지만, 거스 히딩크는 그야말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히딩크 리더십'은 한국의 조직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 조직원들 각각에 대한 맞춤형 멘토링, 나이와 연공서열을 파괴하는 혁신성, 협소한 전문영역들을 통합하는 멀티플레이 등은 역대 여느 스포츠 스타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적 파급력을 몰고 왔다.
2000년대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한국사회에 있어서, 히딩크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서는 하나의 랜드마크였다. 히딩크라는 벽안의 외국인이 한국에서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세계화 흐름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와 맞물린 스타덤 현상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발동한 것이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그런가 하면, 하인스 워드는 다문화주의와 다인종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빛나는 스포츠 스타다. '미국에서 성공한 기지촌 흑인 혼혈'이라는 각별한 정체성은 단순한 줄로만 알았던 우리의 사회문화 지형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워드'라는 아이콘은 미디어와 대중들이 민족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종적으로 혼합된' 새로운 민족주의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술에서 깨어나면, 스타는 '읽을거리'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스포츠 스타는 '살아 있는 텍스트(text)'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옥죄고 있는 사회적인 담론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사실 우리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미학적인 스타일로부터 시작해서, 드라마적인 서사와 집합적인 꿈. 스타덤은 스타덤이되, 그것은 이미 우리가 쳐 놓았던 그물이었다.
잠시 응원을 접고 한적한 객석에 앉아보자. 주술에서 깨어나게 되면, 그라운드의 선수는 더 이상 볼거리가 아니라 읽을거리가 돼 있을 것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의 진면목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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