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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개방'에 맞서는 문화다양성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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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국식 개방'에 맞서는 문화다양성 운동

[창비주간논평]"애국적 구호만으론 '국익' 못 지켜"

오는 3월 18일로 지난 2005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통과된 '문화다양성 협약'(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이 발효된다. 이 협약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 이후 다자간투자협정(MAI)이 문화분야 같은 비무역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각 당사국은 자국의 문화적 표현이 위협받거나 취약한 상황에 처할 경우 문화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목표로 규정을 만들거나 재정을 지원하는 방안을 채택할 수 있다. 한국은 이 협약의 통과에 찬성했지만 현재 국회 비준이 미뤄지고 있다.
  
  '문화다양성 협약'이란 단어를 접하면 나는 상반된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3년 10월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제2회 문화다양성을 위한 국제네트워크(INCD) 총회의 광경이다. 나 자신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이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스크린쿼터라는 제도를 통해 자국의 문화적 독자성과 다양성을 지켜낸 모범사례로 부각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지난해 서울 거리에서 벌어졌던 영화인들의 길고 고단했던 싸움이다. 이 두 풍경을 연결하는 단어는 실상 '문화다양성'이 아닌 '스크린쿼터'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에 맞선 영화인들의 싸움은 한편에선 '문화주권 수호'라는 지지를 받았지만 정부와 주류언론으로부터는 '국익에 반하는 업계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화, 지키는 싸움에서 기르는 지혜로
  
  한국에서 문화다양성 운동과 협약에 대한 논의는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압력이라는 현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불가피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운한 것이기도 하다. 문화다양성 협약이 폭넓은 문화영역을 포괄하는 국제적 운동의 소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우 스크린쿼터만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된 상황은 불운하다. 그럼에도 한미FTA로 대표되는 자유무역체제 하에서 문화산업 및 미디어 서비스에 대한 일방주의적 개방압력은 우리들 앞에 놓인 객관적 현실이다. 바로 이 엄중한 현실이 우리에게 문화다양성이라는 낯선 단어를 불러오게 만드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은 문화다양성 운동·협약의 이론적 배경으로 '다문화주의'를 꼽는다. 다문화주의는 동화주의, 즉 근대화론과 문화우열주의에 입각하여 약한 문화는 강한 문화에 흡수된다는 논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한 사회 내에 두 가지 이상의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인정하고 우열을 가리지 않으며, 소수문화에 대해서는 보호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 이래 특히 캐나다와 호주에서 정책적으로 장려되어 왔다.
  
  다문화주의는 결코 이상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다문화주의는 기본적으로는 다문화의 인정으로 인종간 정치적 통합을 통해 사회적 갈등요소를 해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에서 인종문제나 빈부격차 같은 사회의 근본적 갈등요소들이 봉합된다고 비판하는 쪽도 있다.
  
  미국과 유럽의 영화전쟁
  
  이러한 다문화주의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촉발된 문화다양성 운동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문화산업 중에서도 높은 경제적 비중을 차지하는 시청각 서비스 분야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바, 미국자본의 끊임없는 규제철폐 주장은 다름아닌 이익실현의 요구이다. 초창기 유럽 중심이던 세계 영화시장에서 미국은 1차대전을 계기로 맹주가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이 1920년대 이후 영화강국이 된 것은 실은 그 자체가 완강한 보호주의의 결과였다. 유럽 영상산업에 맞서 미국은 높은 관세장벽과 극도의 수입제한조치를 통해 자국 영화를 보호해 온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유럽 영화산업은 미국영화의 엄청난 유입에 맞서 스크린쿼터를 구축했지만 미국은 정부와 영화업계의 긴밀한 협력으로 이 방어선을 돌파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정부는 프랑스와 불룸-번즈 협정을 맺어 미국영화의 수입쿼터를 대폭 늘리는 것으로 전쟁채무 일부를 삭감했고, 미국 영화수출연합은 각국 정부와 직접협상을 통해 유럽 스크린쿼터의 흐름을 지금껏 꾸준히 방해해 왔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공동체는 문화산업 분야에 대한 지속적 분쟁과 협상을 거쳐 왔는데, 문화다양성 협약은 1990년대 중반 이후 WTO체제에서의 유럽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보호주의적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문화적 예외 청원만으론 어렵다
  
  다시 2007년의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WTO보다 한층 강화된 양자간 협상인 한미FTA가 체결 추진 중이다. 지금까지 7차에 걸친 협상을 통해 양자간 이해관계의 차이가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양국 정부는 이런 차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협상을 강행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최근 몇년간 WTO체제가 부진을 겪자 다자간협상 대신 양자간협상을 선호하면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과 FTA를 맺으려 하고 있다.
  
  물론 한국정부는 비판적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협상 추진이 결코 미국의 일방적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닌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관계가 단순한 경제적 파트너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이 연관된 동북아 전체의 정치·군사적 질서의 일부임을 감안하면 한미FTA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설사 그것이 부분적으로 국가경쟁력 강화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때의 국가경쟁력이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에 두루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극히 의문이다.
  
  당초 스크린쿼터 논란에서 촉발된 문화다양성 운동은 지금까지 WTO나 FTA 등의 시장개방 압력에 대해 문화적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청원운동에 머물러 왔다. 문화다양성 협약 또한 그러한 예외조치에 대한 근거 정도로 수용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상 어떤 협약이나 협상도 국제사회의 냉혹한 힘의 논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문화다양성 협약의 국회 비준도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비준이 된다고 해서 문화적 예외나 문화다양성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리라는 것은 대단히 순진한 발상이다.
  
  문화다양성의 토착화와 생활화
  
  문화다양성 협약이 실질적으로 힘을 발휘하도록 하려면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실체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공허하게 들리는 문화다양성의 명분에 보다 많은 담론의 속살을 채우며 토착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문화다양성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가 서구중심적이며 여전히 낯선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문화다양성을 촉진할 실천 전략과 정책을 다각도로 개발해 많은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비단 한미FTA가 아니더라도 문화시장에 대한 개방압력은 지속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감상적이고 애국주의적인 구호만으로는 길고 지루한 싸움을 지탱할 수도, 진정한 의미의 국익도 지킬 수 없다. 문화다양성 이념이 서구에서 수입된 선언적 운동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일상적 가치체계 안으로 수용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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