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부산국제영화제는 사실상 이용관 위원장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지난 달말 정기총회를 열고 집행위원장을 김동호, 이용관 두 공동위원장 체제로 개편했으며 이에 따라 부집행위원장과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등을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용관 신임 공동위원장은 부집행위원장에서 위원장으로 승진,발령이 이루어진 셈이며 앞으로 부산영화제의 국내업무를 총괄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호 위원장은 해외업무만을 총괄할 예정이다. 이로써 김동호 위원장은 부산영화제에서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위원장의 업무가 국내가 어디있고 해외가 어디 있겠는가. 이건 일종의 좋은 의미로 볼 때의 눈가림 장치다. 김동호 위원장 스스로 명예롭고 평화롭게 퇴진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고 그걸 조직이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얘기였지만 김 위원장은 그동안 비교적 꾸준하게 자신의 2선 후퇴를 조직 내에 '종용'해 왔다. 자신이 존재나 역할과 상관없이 부산영화제는 20회, 30회, 100회 더 나아가 끝까지 계속 이어져야 하고 그렇다면 '포스트 김동호 체제'가 일찍부터 준비되고 트레이닝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이 그동안 수면 하에서만 진행됐던 이유는 모두들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머릿 속에서는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동호 위원장이 없는 부산영화제? 그게 되겠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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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위원장 ⓒ프레시안무비 |
따라서 부산영화제의 이번 조직개편은 한 영화계 원로가 스스로의 퇴진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드라마의 첫회를 시작한 셈이며 조직 논리로만 봤을 때는 우리 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평화로운 권력이양을 만들어 낸 셈이다. 김동호 위원장은 아마도 앞으로 부산영화제에서 '군림'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김동호 위원장이 지난 12년간 부산영화제에서 해냈던 공로, 더 나아가 국내 영화계 전체에 끼쳤던 영향은 한두줄로는 도저히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영화가 아시아와 유럽, 미주 지역에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던 데는, 물론 한국영화 자체의 성장 동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코노미스트를 타고 다니며 전 세계를 안방 드나들 듯 오갔던 김동호 위원장의 노력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한마디로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윤이나 사회적 명성, 정치적 동기 등이 철저하게 배제돼 있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국내 영화산업의 발전을 바라는 순수한 열정이야말로 이 60대 노인이 가졌던 행동 동기였을 뿐이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김동호 위원장의 2선 후퇴, 퇴진을 위한 준비 과정을 열심히 뒷받침 '해드려야' 하는 것이 옳은 시기가 됐다. 그의 이번 결정을 마냥 아쉬워만 하는 것은 오히려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닌 셈이 됐다. 그보다는 이용관 공동위원장 체제를 빠르게 안정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김동호 위원장과 부산영화제를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부산영화제는 향후 3~4년간 해야 할 '큰 일'들이 쌓여 있다. 숙원 사업 가운데 하나인 영화제 전용관을 설립하는 일 등이다. 김동호 위원장은 그 과정을, 언제나 그랬듯이, 묵묵히 지켜 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의 '리틀 칠드런'일 뿐이다. 부산영화제를 보다 성공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때문이다.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통권267호에서도 읽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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