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피츠버그의 88번도로를 따라가다보면 공동묘지 하나가 나온다. 이름은 세인트 존 침례 세미터리. 그 곳의 한 구석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화가 중 한 사람이 영면해있다. 그의 이름은 팝아트의 창시자로 꼽히는 앤디 워홀(1928~1987년)이다. 22일로 워홀이 사망한지 꼭 20년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22일자 현지 르포기사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워홀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색 묘석 위에는 캠벨사의 토마토 수프 깡통 하나와 한 주먹의 동전들이 놓여있었다고 보도했다. 누가 깡통과 동전을 가져다 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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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사진 www.lucidcaf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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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이야 워홀의 그림에 등장한 인연이 있다지만, 동전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로 워홀에게 바쳐졌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묘지지기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워홀이 이곳에 매장된지 약 한달뒤부터 지난 20년동안 매달 누군가 꼬박꼬박 깡통과 동전을 묘석 위에 놓아두고 가는 것같다"고 말했다.피츠버그의 워홀미술관 관장인 토머스 소콜로브스키는 "워홀이 매장될 때 조문객들 중 일부가 저 세상으로 잘가란 뜻에선지 관 위에 동전을 뿌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따라서 워홀의 가까웠던 친지 또는 열성적인 팬 중 누군가가 꽃다발대신 캠벨수프깡통과 동전을 바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워홀 20주기를 맞아 최근 뉴욕, 피츠버그 등에서 관련 추모 기획전이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삼성미술관 리움은 오는 3월 15일부터 6월 10일까지 '앤디 워홀 팩토리'을 개최한다). 최근에는 60년대 워홀의 단편영화 등에 출연하며 '뮤즈' 역할을 했던 에디 세드윅(1943~1971년)의 혼란스러웠던 짧은 생애를 소재로 한 <팩토리 걸> 이 개봉돼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가이 피어스는 워홀로 출연해 천재적이면서도 이기적인 화가의 성격을 탁월하게 그려냈으며, 주인공 시에나 밀러도 '공장'으로 불렸던 워홀의 작업실을 드나들며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 가수, 작가들과 어울렸던 세드윅을 열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팝아티스트에서 영화감독까지 워홀은 팝아티스트로 잘 알려져있지만, 현대 영화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예술가다. 63년 발표한 <잠(Sleep)>이란 6시간짜리 16mm 흑백 무성영화가 대표적인 작품. 제목그대로 아방가르드 시인 존 지오르노가 6시간 내내 몸을 뒤척이며 잠자는 모습만 담고 있다. 같은해 <키스>는 남녀는 겹쳐진 입술만 화면에 클로즈업한 영화이며, 65년에는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 주구장창 비추는 6시간짜리 무성영화 <엠파이어>를 발표하기도 했다. 영화가 시작된 수시간 후에야 빌딩 창문에 하나둘 불이 켜지는 장면이 나오자 지루함에 지칠대로 지쳤던 관객들 사이에서 박수와 휘파람이 터져나왔을 정도. 당초 200여명이었던 관객들은 6시간후 영화가 끝날 때쯤 5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진 사람까지 포함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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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 걸 ⓒ프레시안무비 |
첫작품 <잠>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그가 감독 또는 제작한 수백편의 단편,중편, 장편영화들은 이처럼 대부분 우리 주변에 있는 일상적인 모습들을 담았다. 워홀은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필름에 기록하고자 했던 것. 평론가들은 워홀의 이런 영화 작업을 "시간과 공간개념에 대한 획기적인 실험'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파격적인 소재의 영화들도 적지 않았다. 65년작 <헤디><마이 허슬러>는 여장남자와 동성연애자들의 생활을 다뤘고, 이듬해 발표된 <첼시 걸스>는 뉴욕의 유명한 첼시호텔에 투숙한 손님들의 은밀한 성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워홀은 68년 급진 페미니스트 발레리 솔라나스가 쏜 총탄에 맞아 죽을뻔한 사건을 겪은후 영화작업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후 워홀의 이름을 발표된 <육체><쓰레기><열기><앤디 워홀의 드라큘라> 등은 그의 카메라맨이자 조수였던 폴 모리시에가 거의 다 만들다시피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워홀은 87년 2월 22일 담낭결석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할때까지 '예술사업가'로 명성과 부를 누렸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주문 초상화 제작, 부동산투자도 마다하지 않았다. 술, 마약, 자유분방한 성생활도 그에겐 유쾌한 해프닝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평생 남보다 성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도 했던 워홀.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그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과 대중사회의 고독한 초상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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