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전통적인 '비수기'로 여겨지는 2월과 3월은 영화광들에게는 오히려 완전히 다른 의미의 '성수기'가 되기도 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강력한 후보작들과 흥행을 기대하기 힘들지만 작품성이 좋은 영화들이 한산한 극장가에 연이어 개봉하기 때문이다. 설 연휴 한국 코미디들과 나란히 개봉했던 <더 퀸>에 이어, 이번 주에는 <드림걸즈>와 <바벨>이 나란히 개봉한다. 아카데미 특수가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효력을 잃었다고는 해도, 헐리웃 영화들이 왜 여전히 전세계에서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를 이런 영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영화로는 김석훈이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마강호텔>이 <1번가의 기적>과 <복면달호>의 양자 격돌에 뒤늦게 가세할 예정이고, <괜찮아, 울지마> 이후 5년만에 세 번째 작품을 내놓는 민병훈 감독의 신작 <포도나무를 베어라>가 CGV 인디영화관 라인을 타고 개봉할 예정이다. 호러팬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일 텍사스 전기톱 시리즈의 새로운 속편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 : 제로>가 대체로 푸근한 편이었던 겨울 날씨를 더욱 차갑게 얼려버릴 것이라 공언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 조금씩 영향력을 확장하며 꾸준히 개봉하고 있는 일본영화들 가운데 <태양의 노래>와 <눈에게 바라는 것>이 함께 개봉할 예정이다.
| 마강호텔 감독 최성철 주연 김석훈, 김성은, 박희진 |
인수합병과 구조조정의 바람이 기업뿐 아니라 조폭계에도 불어, 대행(김석훈)과 일당은 하루아침에 '평생직장과 생계보장'을 외치며 시위를 하는 신세가 된다. 조직으로 다시 복귀하기 위해 그들이 맞닥뜨린 미션은 백마강호텔에서 대출 미수금을 받아오는 것. 그러나 이들이 쳐들어간 백마강 호텔의 직원과 젊은 여사장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한국영화에서 특이한 한 서브장르를 이루고 있는 이른바 '조폭 코미디'의 주춤한 기운을 반영이라도 하듯, 새로운 변주가 가미되었다. <귀여워>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김석훈이 양아치 조폭으로 변신을 보여준다.
. | 바벨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주연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으로 새로운 영화적 대안을 제시해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신작. 모로코에 여행을 온 미국인 부부, 이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멕시코로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유모, 외국인들의 관광버스를 향해 총을 쏘았던 모로코의 형제, 그리고 엄마의 자살 이후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동경의 소녀. 네 집단이 겪는 사건들이 얽히고 엮이면서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만들어간다. 전작들에서도 선보였듯, 파편화된 인간의 관계들이 결국 하나의 거대한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이냐리투 식의 편집과 구성이 돋보이는 영화로, 작년 아카데미상을 휩쓴 <크래쉬>가 남겨준 찜찜함에 대해 탁월한 대안의 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 | 드림걸즈 감독 빌 콘돈 주연 비욘세 놀즈, 제이미 폭스, 에디 머피, 제니퍼 허드슨 |
열정과 재능이 넘치는 여성 트리오가 야심찬 매니저를 만나 백보컬로 시작하여 한발한발 성공을 향해 다가간다. 1981년 초연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드림걸즈'를 <킨제이>, <갓 앤 몬스터>의 빌 콘돈 감독이 영화화한 버전으로, 다이애나 로스를 중심으로 6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슈퍼 팝그룹 슈프림즈의 실제 이야기를 느슨하게 각색했다. 팝의 디바 비욘세와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놀라운 가창력으로 전 미국을 사로잡았던 제니퍼 허드슨, 뮤지컬 배우 애니카 노니 로즈가 여성 트리오 '드림걸즈'의 디나, 에피, 로렐의 역할을 맡아 뛰어난 연기와 노래 솜씨를 보여주는 가운데, 당대 최고 흑인가수 제임스 '썬더' 얼리 역의 에디 머피, 이들을 성공의 길로 이끄는 매니저 커티스 역으로 제이미 폭스가 출연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있다.
. | 포도나무를 베어라 감독 민병훈 주연 서장원, 기주봉, 이민정 |
신부의 길을 가고자 하는 가톨릭 신학생 수현(서장원)은 사랑하는 여자친구 수아(이민정)에게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한 후,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여자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학장 신부님의 권유에 따라 수도원 피정 생활을 시작한 수현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지만 수아와 꼭 닮은 헬레나 수녀를 보며 다시 갈등과 혼란에 빠진다. <괜찮아, 울지 마> 이후 6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민병훈 감독의 세번째 작품. 카자흐스탄의 시골을 배경으로 비전문 배우를 기용해 사실적이면서 소박한 영화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이전 영화들과 달리, 이번에는 연기 경험이 있는 기성 배우를 캐스팅하여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로 시작하는 성경구절에서 착안한 제목이 암시하듯, 종교와 사랑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 돋보인다.
. |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 : 제로 감독 조나단 리브스만 주연 샤이아 배튼, 디오라 베어드 |
제목에서 짐작이 가능하듯, 33명을 살해한 실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토대로 1974년 영화화된 토브 후퍼 감독의 전설적인 호러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의 프리퀄(더 앞선 시기를 다루는 영화) 속편이다. 끔찍한 연쇄살인범은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떻게 연쇄살인범이 되었는가? 1969년을 배경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전 마지막 주를 보내는 두 형제와 그들의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틴에이지 호러물의 형식으로 시작해 끔찍한 연쇄살인범의 기원과 첫 살인을 높은 강도의 고어로 보여준다.
. | 태양의 노래 감독 고이즈미 노리히로 주연 유이, 츠가모토 다카시, 아사기 쿠니코 |
색소증 건피증을 앓고 있어 태양 밑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소녀 카오루(유이)는 해가 진 후 아무도 없는 역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삶의 유일한 일과다. 그녀는 새벽에 친구들과 역 앞을 지나곤 하는 소년 코지(츠카모토 다카시)와 사랑에 빠지고, 이 두 사람은 기한이 얼마 남지 않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나가는데… 일본의 인기가수로 연기에 첫 도전을 하는 유이를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는 원래 원영의가 주연을 맡았던 홍콩영화 <신불료정>의 리메이크작.
. | 눈에게 바라는 것 감독 네기시 키치타로 주연 이세야 유스케, 사토 코이치 |
성공을 위해 가족을 다 내팽개쳤지만 연이은 실패를 경험하고 13년만에 형을 찾아온 마나부(이세아 유스케). 동생을 못마땅해하는 형의 마구간에서 일을 하게 된 그는 자신이 형을 찾아오기 직전 남은 돈을 모두 걸었다가 잃게 했던 경주마, '운류'를 만나게 되고, 이 말이 성적부진으로 곧 식용으로 팔려나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동병상련을 느끼며 운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면서 그는 새로운 감정들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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