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남쪽 낙원상가 방향으로 50m쯤 걷다 보면 운현궁(雲峴宮)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개인집이자 고종이 태어나서 열두살 때까지 살던 곳으로, 대원군 섭정기 10년 동안 각종 개혁정책이 구상되고 추진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흥선대원군은 1820년(순조 20)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지금의 안국동이었다. 그러던 그가 언제 운현궁에 터를 잡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뒤에 고종이 된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여기서 낳은 것으로 보아 대략 1852년(철종 3) 이전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보통 파락호 시절의 대원군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 무렵에도 집의 규모는 영조의 현손(玄孫)으로서 왕족의 집답게 그리 궁색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곳이 서운관(書雲觀: 觀象監의 별칭, 지금의 현대사옥 구내) 앞 고개 ‘운현(雲峴)'의 지명을 따 ‘운현궁'이라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고종이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지명된 뒤 그 아버지 이하응에게 ‘흥선대원군’이라는 작호가 내려지면서부터였다.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증축도 뒤따라 1864년(고종 1) 9월 노안당(老安堂)과 노락당(老樂堂)의 낙성식이 고종과 대왕대비, 왕대비까지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6년 뒤에는 안채에 이로당(二老堂)이 새로 들어섰다. 또한 기존의 대문 외에 창덕궁과의 사이에 임금 전용의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이 세워졌다. 이후 운현궁은 대원군 섭정 10년간은 물론 개항후 임오군변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사건의 진앙지로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진3> 운현궁 전경
대원군 당시의 운현궁은 현재의 규모가 아니라, 일본문화원,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일대까지를 아우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시기 이왕직(李王職) 관리하에 있다가 해방후 대원군 후손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이후, 동쪽의 3천여 평되는 땅이 덕성여대에 팔리는 등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지금은 수직사ㆍ노안당ㆍ노락당ㆍ이로당만이 남아 있다. 그 뒤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1993년 12월부터 2년여에 걸친 보수 복원공사를 마치고, 1996년 10월 26일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식을 재현함과 동시에 일반에 공개하였다.
***대원군의 집권과 노안당**
운현궁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한 사람들이 거처했던 수직사(守直舍)가 나온다. 대원군 집권기에는 관리가 파견되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댔다고 하는데, 지금은 몇 안되는 관리인만이 이 곳을 드나든다.
<사진4> 운현궁 수직사 / 운현궁
수직사를 옆으로 하고 솟을지붕을 한 중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행각이 있고 정면에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대원군의 일상 거처였던 노안당은 1898년 대원군이 파란만장한 80 평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본래 운현궁 사랑채에는 노안당 말고도 아재당(我在堂)이라는 건물이 더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我在堂]이라고 하여, 대원군 자신의 위풍당당한 기개를 과시하던 아재당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남향하여 자리잡은 노안당의 마루 위에는 ꡔ논어ꡕ(論語)의 “노인을 편안하게 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노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것은 대원군이 추사의 글씨에서 집자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처마 끝에 나무를 길게 대어 차양을 달아 놓은 건축수법이 이채롭다.
<사진5> 노안당의 모습
<사진6> 노안당 현판의 추사 글씨
노안당 안쪽 방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방석과 서안(書案)을 놓아 대원군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해 놓았다. 당색을 초월한 인재 등용, 서원 구조조정, 호포제 실시, 복식 개혁 등과 같은 일대 개혁정책을 논의하던 당시의 모습이 아마도 그러했을듯 싶다.
<사진7> 노안당 안쪽의 사랑방
***대원군,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보통 대원군하면 쇄국정책을 고집했던 완고한 늙은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1866년의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 이전에 그는 천주교 평신도지도자 남종삼(南鍾三)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때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제휴를 모색하기도 했다. 또 당시 민폐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던 서원을 구조조정하면서는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적어도 세계관의 차원에서 천주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공자보다 내 백성을 앞세운 점에서, 대원군은 서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국가와 민족보다 유교의 도(道), 그리고 신분제와 화이관(華夷觀)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중세적 세계질서를 앞세웠던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와 관련해서는 대원군이 조선후기 실학의 끄트머리를 장식한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스승으로 모신 사실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진8> 아소당기 현판 / 운현궁 *
더욱이 ‘내가 있는 곳’이라는 운현궁 아재당의 당호와 한강의 풍광을 보며 ‘내가 웃는다’고 하여 아소정(我笑亭)이라 이름붙였던 마포 공덕리의 별장(지금의 동도중학교 자리)을 통해서는 희미하나마 ‘나’를 주장하는 근대적 자아의식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허례의 상징이던 갓의 테두리를 줄이고 두루마기나 도포의 거추장스런 소매를 좁게 잘라낸 복식개혁 또한 그의 실용적 마인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간편함으로 인해 요즈음 한복의 일부가 되어버린 마고자 또한 1885년 초 중국에서 연금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입고 와 유행시킨 패션이라고 한다.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미니스커트 선풍을 일으켰듯이.
<사진9> 오늘날 한복의 일부가 되어버린 마고자 패션
사실 개항기 국내에서 대원군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정치인도 드물었다. 1882년 집단행동에 돌입한 구식군인들의 발길이 자연스레 운현궁에 닿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서민들이 비빌 수 있는 그나마 몇 안되는 언덕 가운데 하나였다. 임오군변으로 재집권에 성공한지 한달 남짓한 1882년 7월 13일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중국 바오딩부[保定府]에서 4년간 유폐생활을 하다 돌아온 뒤에도, 그는 국정이 난맥상을 드러낼 때마다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정치권의 히든 카드였다.
무엇보다 서민들과 친숙한 정치가로서의 이미지,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었는데, 그것을 이해하려면 1863년 12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만 10년간에 걸친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원군의 집권, 60년만의 정권교체**
당시 대원군의 집권은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를 마감한 사실상의 정권교체였다. 소수세력으로서 대원군의 집권은 세도정권 내부의 균열을 틈타 풍양 조씨 조대비(趙大妃: 익종비) 세력과 철종의 후사 문제를 놓고 얼마전 ‘DJP 연대’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담합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양측의 묵계대로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여 익종(翼宗: 효명세자, 순조의 아들)의 대통을 계승케 하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하고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한 뒤 그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하였다.
<사진10> 흥선대원군 이하응
그러나 그것만이 정권교체의 비결은 아니었다. 1998년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IMF 위기’로 인해 비로소 가능했듯이, 거기에는 1862년 진주를 비롯해 전국 70여개 군현을 파도처럼 휩쓴 농민항쟁의 도도한 물결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원군은 세력기반이 취약한 자신이 집권하는 데 세도정권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은 농민들의 저항이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농민들의 분출된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민생 개혁을 과감히 추진하였다.
<사진11> 진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정황과 처리상황에 관한 보고 등을 수록해 놓은, 1862년 농민항쟁의 기록 임술록
비록 취약한 권력기반 속에서 서원 정리에 따른 보수세력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이라는 정치적 카드를 꺼내들고, 왕권강화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경복궁 중건을 강행하다 민생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전정ㆍ군정ㆍ환곡 삼정(三政)에 걸친 세제(稅制) 개혁의 의미까지 덮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양반, 상민을 막론하고 모든 호(戶)에 군포(軍布)를 부과한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는, 관직에 나아가 국가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군역을 면제받고 있던 양반 기득권층의 조직적 반발로 200년 가까이 논의만 무성했던 것을 일거에 돌파해 낸 쾌거였다. 그로 인해 상민들의 세부담은 다소 가벼워졌고, 양반, 상민 모두 군역세를 내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평등의식도 한층 확산되었다.
이러한 대원군의 일련의 내정개혁은 백성들의 여망과 지지에 의해 뒷받침되었는데, 바로 여기에 대원군의 대중적 인기의 비결이 있었다. 더불어 집권 이전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종친들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피하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서슴지 않으며 서민들과 정서적 유대를 다지고, 또 그러한 생활을 통해 서민생활과 백성들의 여망에 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대중정치가로서 그의 이미지 형성에 한몫을 하였다.
<사진12> 대원군 가신정치의 유산 노안당 서행각
그런데 대원군의 정치는 ‘동교동계’ ‘상도동계’하며 얼마전까지 지속되었던 보스정치, 가신정치의 구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전에 복원한 노안당 서행각(西行閣)은 바로 그 유산이다. 운현궁 사랑채의 행각은 대원군 문하에서 그를 보스로 받들며 정치적 야망을 불사르던 대원군의 심복과 식객들이 주로 머무르던 공간이었다. DJ나 YS의 비서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들이 하나같이 회고하는, 동교동, 상도동 집의 문간방에 해당하는 곳이다. 우리네 가신정치의 원조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 또한 우리 정치의 엄연한 역사적 자화상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노락당과 이로당의 사계(四季)**
노안당 서행각에서 북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운현궁의 안채 노락당(老樂堂)이다.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삼간택(三揀擇)을 마친 명성왕후 민씨가 왕비수업을 받고, 고종과 가례의 육례(六禮) 가운데 오례(五禮)를 치른 곳이다.
<사진13> 운현궁 안채의 중심건물 노락당
삼간택에서 뽑힌 예비 왕비는 이미 보통 사람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사가(私家)로 돌아가지 않고 별궁(別宮)을 따로 정해, 거기서 첫날밤을 보내는 동뢰(同牢) 의식을 제외한 수납채의(受納采儀)ㆍ수납징의(受納徵儀)ㆍ수고기의(受告期儀)ㆍ비수책의(妃受冊儀)ㆍ친영의(親迎儀) 등의 의례를 치른다. 그런데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면서 별궁으로 선정된 곳이 바로 운현궁이었다. 그리하여 1866년(고종 3) 3월 9일 수납채의에서 시작해 육례중 가장 중요한 의식인, 임금이 친히 납시어 왕비를 창덕궁으로 모셔가는 친영 의식이 3월 21일 운현궁에서 치러졌다.
<사진 14>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 재현 모습 / 운현궁
가례뿐 아니라 가족들의 회갑이나 그밖의 잔치 또한 여기서 치러졌다. 아마도 대원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시절에는 이 앞마당이 온갖 잔치준비로 북적거렸을 것이고, 권력에서 밀려나 유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앞마당도 덩달아 스산한 연금상태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 북쪽으로는 노락당과 함께 안채 역할을 하던 이로당(二老堂)이 남아 있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ㅁ’자로 된 특이한 건물로, 가운데에 조그만 마당이 있다. 바깥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이러한 구조를 취했다고 하는데, 첫 눈에도 금남(禁男)의 공간이란 느낌을 준다.
<사진15> 이로당의 내부
이들 안채의 주인은 대원군의 아내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였다. 운현궁 안주인으로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기쁨, 같은 집안의 12촌 자매지간이자 친동생 민승호의 양누이인 명성왕후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성대한 가례식을 치르던 즐거움, 남편이 실각당하는 슬픔, 손자 준용이 역모에 연루되어 귀양길에 오르는 아픔 등을 두루 겪어야 했던, 한 여인네의 사연많고 곡절많은 한 평생의 체취가 깊게 배여 있는 곳이다.
이로당 동편 뒤뜰에는 사람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후미진 곳에 ‘경송비’(慶松碑)라는 비석이 있다. 고종이 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간 뒤 어릴적 함께 벗하여 놀던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이라는 관작을 내리고 금관자를 달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연유로 해서 세워진 비석이다. 그러나 지금 정이품 대부송(正二品 大夫松)은 온데간데 없고, 경송비만이 남아 고종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사진16> 이로당 뒤뜰의 경송비
***유물전시관에서**
이로당 서쪽 넓은 마당 한 켠에는 서울시에서 운현궁을 보수 복원하면서 새로 꾸민 유물전시관이 있다. 두 개의 전시공간 가운데 제1전시관에는 한편에 대원군의 영정과 운현궁의 모형, 대원군의 그 유명한 석파란(石坡蘭) 사본과 낙관, 붓ㆍ먹ㆍ벼루, 운현궁답양안(雲峴宮畓量案), 노락당기(老樂堂記) 현판, 나전칠기함과 자기쟁반ㆍ목각쟁반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1843년(헌종 9) 이하응을 흥선군에 봉하는 임금의 교지와 노락당 상량문(上梁文), 고종과 명성왕후가 친영의를 치를 당시 입었던 면복(冕服)과 적의(翟衣), 대원군과 부대부인의 조복(朝服)과 원삼(圓衫)이 재현되어 있다.
<사진17> 대원군의 난초그림 / 운현궁
제2전시관에는 병인양요ㆍ신미양요 당시 사용했던 활 화살 화승총 홍이포(紅夷砲) 용고(龍鼓) 등의 무기류,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상징하는 척화비 모형, 복식의 실용화․평등화를 가져왔던 대원군 복식개혁의 의의에 대한 설명과 갓 탕건 사모 등 실용화된 복식들, 경복궁 중건에 따른 백성들의 과중한 부담을 잘 대변해 주는 당백전, 대원군의 교의(交椅: 혼백틀), 정이품 대부송과 대원군 사랑방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18> 복식개혁 이전 사람들의 복장, 신윤복의 풍속화 / 간송미술관 *
<사진18-2> 복식개혁 이후의 복장, 도포에서 두루마기로의 변화가 눈에 띈다.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작은 규모이지만 근대 여명기의 굵직한 사건들과 함께 한 대원군의 숨결과 파란만장했던 운현궁의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전시물들이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한 뒤 대원군의 창덕궁 출입을 돕기 위해 1864년 6월 운현궁과 금위영(현 삼환기업 앞) 사이에 세웠다고 하는 공근문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고종 전용으로 만든 경근문의 기초가 현재 일본문화원 주변에 남아 있다는 설명문만이 전시관 한 귀퉁이에서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사진19> 일본문화원에서 바라본 운현궁, 담장 너머 오른쪽 건물이 유물전시관이다.
한편 노락당 뒤 동편으로는 고풍스럽지만 허름한 서양건물이 하나 서 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할 무렵 운현궁의 새 주인이 된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을 회유하기 위해 지어 주었다고 하는 양관(洋館)이다. 언뜻 보아도 왜색풍이 짙게 풍기는 서양건물인데, 거리는 지척이지만 현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소유로 되어 있어 운현궁 출입문을 나와 빙 돌아가야만 한다. 전통가옥과 서양건물이 한 데 어우러져 있고, 그 한가운데가 38선을 연상시키는 담장으로 가로막힌 운현궁... 전통과 왜색풍으로 왜곡된 근대가 뒤섞여 있고, 또 한편으로 단절된 우리 근대사의 자화상은 아닐까?
<사진20> 일본풍의 서양건물 운현궁 양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