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많던 신예감독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성감독 킴벌리 피어스가 지난 99년 데뷔작 <소년은 울지않는다>로 미국은 물론 세계영화 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을 당시 나이는 불과 서른둘이었다. 당시만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여배우 힐러리 스웽크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기까지 했다. 데뷔작 한편으로 촉망받는 신예감독 대열에 들어선 피어스의 앞길은 탄탄대로인 듯했다. 지금 그의 나이는 꽉찬 마흔. 그동안 그녀가 몇편의 영화를 만들었냐고? 답은 '제로'다. 지난 2000년 뉴라인영화사와 계약을 맺었던 피어스는 2년동안 시나리오 개발만하다 결국 아무런 성과없이 뉴라인과 관계를 청산했고, 그 이후 영화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렇다고 피어스가 빈둥빈둥댔다는 건 아니다. < 게이샤의 추억> 연출을 맡을뻔하다가 막판에 취소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8년 세월을 절치부심으로 지냈던 그녀가 올해 드디어 두번째 작품인 <스톱 로스(Stop Loss)>를 내놓고 팬들과 다시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라크전쟁에 참전했다가 텍사스 집으로 귀환한 군인이 재배치 명령을 받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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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영화계에서는 평론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신예감독들이 새 작품을 내놓기까지의 시간차가 앞선 세대감독들과 비교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른바 '뉴 아메리칸 영화'의 전성기였던 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영화감독들은 한창때 거의 매년 신작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요즘 미국 젊은 감독들은 연출기회를 잡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미국영화계가 점점 더 비즈니스 중심으로 바뀌면서 창조력, 오리지널리티, 도전정신에 인색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각부문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 ,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멘>, 길레르모 델 토로 감독의 < 판의 미로> 등 멕시코 영화가 무려 3편이나 고루 노미네이션됐는데, 이같은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약진이야말로 '젊은' 미국영화의 위축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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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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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0,40대 감독들의 '과작(寡作)'은 킴벌리 피어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그녀처럼 8년씩이나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 경우 지난 2000년 두번째 영화 <레퀴엠>과 세번째 영화인 2006년작 <천년을 흐르는 사랑(The Fountain)> 개봉 사이에 6년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지난 99년 <존말코비치되기>로 인디 영화계의 스타급으로 급부상했던 스파이크 존즈는 2002년 <어댑테이션> 이후 아직까지도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팬들 앞에 새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데이비드 핀처는 2002년 <패닉룸>이후 4년만인 2006년말에야 <조디악>을 발표했고, 2001년 <물랑루즈>로 대공성한 호주출신 바즈 루어만도 7년만인 올해 신작 <오스트레일리아>를 내놓을 예정이다. <사이드웨이스>의 알렉산더 페인, <쓰리킹스>의 데이비드 O 러셀 등 재능있는 40대감독들의 신작 역시 아직까지는 감감 무소식이다. 유니버설 영화사의 공동회장인 데이비드 린드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요즘 영화는 철저한 (흥행)사전검증을 토대로 제작된다"며 이 같은 관행이 "오리지낼리티, 크리에이티비티에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같다"고 털어놓았다.<파이트 클럽><스파이더맨>의 제작자 로라 지스킨의 지적은 좀더 신랄하다. 단순히 영화비즈니스계 내부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문화적 현상"에 따른 결과인 것같다는 이야기다. 즉, " 깊이 파고드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는" 미국 현대문화의 풍토 때문에 ,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일을 추구하는 젊은 감독들에겐 점점 더 가혹한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제리 맥과이어><엘리자베스타운>의 카메론 크로 감독은 "요즘 미국 영화계에서는 서로 이끌어주는 이른바 공동체 정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불만도 감추지 않았다. 할리우드와 자국 영화계를 활발히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멕시코 감독 3인방 이냐리투, 델토로, 쿠아론이 서로서로를 격려하면서 동반성장을 이룩해나가는 것과 비교해볼 때, 날로 각박해지고 있는 미국영화계 현실은 젊은 감독들의 창작의욕을 좌절시키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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