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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에는 있지만, 청계천에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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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워싱턴 D.C.에는 있지만, 청계천에는 없는 것?

[교육과정 논란] 예술교육, 패러다임을 바꾸자<2>

앞서 소개된 김인규 교사의 글을 잘 읽었다. 글을 읽으며 최근 예술교육과 관련하여 떠도는 화두를 떠올렸다. '문화예술교육'이 그것이다. 그 배경에 있는 주장은 '미술교육'을 비롯한 기존의 예술교육이 충분히 '문화예술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미술'은 좋아하는 사람 혹은 관련 분야 전문가가 될 사람만 배우면 되는 과목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미술시간은 지긋지긋했는데, '샤갈'전에는 왜 사람이 몰릴까?

근대화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 했던 한국의 특수한 상황은 교육 분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제대로 된 근대를 거칠 수 없었던 폐해는 오히려 다른 분야보다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입시지옥' 현상이 교육 문제의 모든 것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교육의 근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타난 결과 중 일부일 뿐이다. 전통적인 교육방식은 무너졌는데, 학교와 교육의 근대화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화 과정을 충분히 거친 외국의 사례를 그냥 수용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미국이 미술을 선택과목으로 하고, 실기가 아닌 서술형 평가를 한다 해서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나. 교육부의 생각은 '그렇다'라는 것인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미국처럼 미술관이나 도서관, 각종 문화센터 등이 지역사회에서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공간들이 문화교육의 중심이 돼 있어야 한다. 또 이런 공간에서 행해지는 문화교육이 학교교육과 제대로 연계되야 한다. 이런 전제가 있다면 미술이 굳이 필수과목일 필요도, 내신에 반영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교육의 인프라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 흉내만 내려 든다면 학교교육에서 미술교육을 내모는 것 말고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앞서 소개된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 미술시간이 왜 좀 더 '문화예술'적이지 못하냐는 불만이 그것이다.

미술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탁 위에 주전자 하나 달랑 올려놓고 그리라고 하거나, 의자 따위를 묘사하는 걸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미술책에 나와 있는 유명한 작고 화가의 그림을 작은 도판을 보며 외우기도 했다.

미술 수업이라는 게 귀찮은 준비물을 챙겨가야만 하는 시간, 그림 못 그린다고 웃음거리나 되는 시간이었다는 것에 대해 미술인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래도 '샤갈'전이나 '달리'전에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 학창시절 그렇게 미술에 질렸을 텐데 저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해진다. 유명인이 집필한 미술 관련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더라도 그렇다.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도 사람들은 미술 문화를 향유하길 바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욕구를 학교에서 충족시켜 줄 수는 없을까?

미술이론가, 학교 수업에 관심갖다

요즘 들어, 전교조 교사들을 비난하는 사회적 여론이 만만치 않다. 일부 언론의 선동이 그 배경에 있다. 하지만 이런 여론몰이 속에서 전교조 미술 교사들의 노력이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린 것이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못내 안타깝다.

기존의 경직된 미술 수업에 변화의 흐름이 일어난 것은 상당부분 전교조 미술 교사들의 공로 때문이다. 그들이 시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확산되면서 학교미술교육의 현장이 실제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들이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연구해 온 결과들을 보면 미대 교수인 내가 보더라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앞서 소개된 김인규 교사의 사례도 그 중 하나다.

이런 연구의 사회적 파급효과가 더디게 나타났던 이유는 뭘까. 대학사회와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사들만 알고, 교수나 작가, 미술이론가 등 미술계에서는 전혀 이 연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2년 문화연대 안에 시각문화교육분과가 만들어지면서, 교수, 작가, 미술이론가들이 현장 교사들과 한 자리에 모여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미술교육의 내용체계를 새로 만들고, 이를 토대로 대안적인 미술교과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연구 결과는 올해 여름이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시각적문해력, 알레고리, 공공미술…시각문화교육의 키워드

이렇게 연구해 온 내용을 요약하면 바로 ''시각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본 미술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세 개의 중요한 키워드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시각적문해력(Visual Literacy), 둘째는 알레고리(Allegory), 셋째는 공공미술(Public Art)이다.

'시각적문해력'은 문자 그대로 이미지를 읽는 능력이다. 우리가 글을 읽듯이 이미지도 읽을 줄 알아야만 한다. 흔히 미술인들은 그림을 보면서 "느껴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읽을 수 있을 때야만 가능하다. 이렇게 이미지를 읽어낸 작업은 다시 표현으로 이어진다. 즉 무엇을 느꼈는지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한 느낌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넓은지, 좁은지, 어두운지, 밝은지, 거친지, 부드러운지, 색은 따뜻한지, 차가운지, 또 어떤 상징적 의미로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 작가는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는지 모든 것을 분석적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 역시 시각문화교육분과 활동을 하며 대안교과서 연구에 참여하기 전까지 '비주얼 리터러시'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중등 교육은 물론, 미술대학 교육을 통해서도 '이미지 읽기'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읽지 못 하는 이들이 모인 사회에서 풍부한 시각문화가 자리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그리트 전시회가 열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학부모들이 논술강의 듣는 데 열을 올리느라 전시감상은 뒷전이더라는 기사를 최근 본 기억이 있다.

그들이 그곳에서 어떤 강의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마그리트는 '알레고리'의 화가로 유명하다. 알레고리는 '알레고리아'(allegoria)라는 그리스어로부터 유래하는데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것을 보여주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재미있는 표현 기술인데, 좁은 의미로는 우리가 국어시간에 배운 풍유(諷諭)로, 다른 사물에 비유하여 넌지시 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이보다 훨씬 광범위한 뜻으로 쓰인다. '인식의 방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영화 관련 기사를 봐도 알레고리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현대의 문화 현상을 읽어내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개념이다. 중학생 정도 되면 알레고리라는 말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데, 정작 미술시간에 우리는 알레고리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공공미술'의 부재로 이어진다.

공공미술은 흔히 공공장소에 있는 미술품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런 식으로 '미술장식품'을 건물 앞에 세워 놓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공미술'은 그런 게 아니다. 시민들이 미술을 통해 담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청계천에 세워진 올덴버그의 조형물이 '공공미술'이 아닌 이유는

그러므로 서울 청계천에 세워진 올덴버그의 조형물과 같은 것은 공공미술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유명작가가 선정되고, 그 작가가 혼자 고민해서 모종의 형태를 만들어, 어느 날 갑자기 광장에 세워진다. 이렇게 탄생한 미술품을 우리는 공공미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묻고 싶다. 사람들은 왜 청계천이라는 역사적인 공간에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고 왜 얘기할 기회조차 가지질 못했는가?

만약 학생들이 미술 숙제로 서울시내의 건물 앞에 있는 모든 조각작품을 조사하고 선호도 투표에 따라 모두가 좋아하는 작품을 뽑았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미술장식품일 뿐 공공미술이 아니다. '미'에 관한 결과만 있고, 담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들끼리 힘을 합해 무엇인가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공공미술'인가? 역시 아니다. 예를 들어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조각그림 맞추듯 제작한 모자이크 벽화도 '공공미술'이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공공미술'인가? 워싱턴 D.C.의 월남전 참전 용사의 기념비는 공공미술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시민들이 벽에 새겨진 죽은 이들의 깨알 같은 이름 위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꺼진 땅 밑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죽은이들의 이름 위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땅 밑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풍부한 알레고리를 끌어내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담론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경우 '공공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미술' 실천할 시민 키우려면

결국 미술교육은 그림 잘 그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공공미술'을 구현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량을 키우려면 미술 교과에서도 지식교육이 중요하다. 국어, 영어, 수학은 지식을 전하는 과목이고 미술, 음악은 아니라는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시각적 문해력'을 갖지 못하면 지금처럼 이미지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현실에서 문화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았는가? 이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얘기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문화시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필수적인 게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는 '감성의 기술'을 제공한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언어로 바꾸기 위해서는 알레고리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끌어낸 상상력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눈으로 본 것들과 연결시켜 하나의 주제를 이끌어내는 기술이다. 이것을 배우는 것과 배우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자루의 연필을 우연히 들고, 혹은 그냥 실없는 낙서 속에서 알레고리를 떠올린다면 우리의 시각문화는 훨씬 풍부해질 것이다. '공공미술'은 이런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공공미술은 시민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공간에서 미술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시민을 키워내는 일, 이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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