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열린 직후인 지난 4일, 포항 대동중학교(동인교육재단)에서 근무하던 손규한 교사가 학교 측으로부터 해임 조치를 통보받았다.
학교 측이 내세운 해임 사유는 그 교사가 △방과 후 특기적성교육을 학생들에게 강제로 시키지 않았고 △두발 등의 교칙을 거부하라고 했으며 △강제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민주적 인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결국 학생인권과 자치를 옹호하고, 민주적인 학교 운영을 요구한 것이 손 교사가 학교에서 쫒겨난 이유인 셈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오히려 바람직한 요구를 했다는 이유로 교사가 쫓겨나는 곳이 바로 지금 한국의 사립학교다.
사립학교(사학)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공립학교와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학은 공립학교에 비해 더 폐쇄적이며, 담당 교육청을 비롯한 정부의 관리감독에서도 거리가 멀다.
학생·교사에게 가하는 사학의 억압은 때론 '횡포'라 불러야 할 정도다. 교육당국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 하고 있다. 실제로 대동중 사건에 대해서도 경북도교육청은 사학의 재량이므로 간섭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민주적인 학교 운영뿐만 아니라 끊이지 않는 비리 또한 심각한 문제다. 수학여행, 졸업앨범, 보충수업비, 방송교재 등의 명목으로 수십, 수백억 원을 횡령하는 경우부터 최근에는 '유령직원'을 명단을 올려 월급을 착복하는 경우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학교가 이사장의 사돈의 팔촌까지 나서서 재단 이사부터 경비까지 모두 장악하는 가내 사업으로 운영돼도 당당했던 게 한국의 사학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사회 일각에서 이런 사학의 문제들에 대해 귀를 기울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학교의 문제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사회를 향해 외친 학생과 교사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사학 비리와 재단 측의 횡포에 맞서 문제제기해 왔던 학생과 교사들의 사례를 모아 정리했다.
2004년 인천외고에서의 뜨거운 저항
2004년 인천외고 사건 역시 사학의 막무가내 횡포가 기세를 떨친 기록적인 사건 중 하나다. 발단은 2003년 새로운 교장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교장은 직원회의를 직원조회로 바꾸면서 교사들의 발언권을 제한하고, '경고장'을 남발하는 등 학교 운영에서 독단을 일삼았다.
학생들에 대한 억압도 강화돼 수업시작 시간 앞당기기, 전원 강제야간자습 실시, 두발규제 강화, 외출제한, 벌점제와 유급제 등이 도입됐다. 학생들에게는 숨 막히는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2004년 4월 24일, 교장과 학교 운영이나 학생 지도 등의 문제를 두고 마찰을 빚어 왔던 전교조 박춘배 교사와 이주용 교사가 파면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학생들의 불만은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노현성 씨(2004년 당시 인천외고 2학년. 공동대책위원회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교장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인권탄압 쪽으로 점점 터져 나온 거다. 한마디로 학교에서는 아무 것도 못했다. 기계처럼 공부하고 수업 듣고 수업 듣고 또 수업 듣고…. 학생들이 막 미치려고 그랬다. 선생님들이 파면당한 게 4월 24일인데 그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바로 월요일 교장실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교복을 찢어 쓴 혈서를 교장실 앞에 걸어놓기도 하고, 교사들의 복도수업에 참가하거나 교장실 앞에서 집회를 하는 등 농성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다가 결국 같은 해 6월 4일부터는 600여 명의 학생들이 수업거부를 시작했다. 수업거부를 시작한 당시 정황에 대해 노현성 씨는 "40일 동안 계속 점심시간마다 집회하고 촛불집회도 했는데 학교 측이 들은 척도 안 했다. 또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서 3~4번 (학교 관리자들을) 찾아 갔었는데 다 무시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학생들도 힘들어 하고…. (학교 측과)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6월 7일부터 수업을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대해 전교조가 배후에서 사주했다며 매도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매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100일 가까운 기간 동안 교육청, 교육부, 학교, 서울에 있는 이사장의 집까지 찾아가 항의집회를 열었다.
교장해임과 교사 파면 철회를 요구하는 삭발과 단식이 이어진 뒤에야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학교 측이 '교장 해임과 파면철회' 불가를 고집하면서 상황은 장기화 조짐을 보였다.
교육청에서 교장 해임을 사학 측에 요구했지만, 사학에서는 교장을 같은 재단의 다른 고등학교로 전근시켜 일단락지었다. 인천외고 사태의 주범인 교장을 바로 옆 학교인 명신여고로 전근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한 것이다. 감독기관인 교육청도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사학의 벽을 확인케 한 사건이었다.
2002년 용화여고, 1999년과 1994년 상문고, 1987년 파주여종고….
사학을 상대로 한 학생들의 투쟁 역사는 인천외고 이전에도 꽤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용화여고 사건이나 1994,1999년 상문고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용화여고 사건은 학교의 비리를 교육청에 고발한 학생을 퇴학시킨 재단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이 학교 진웅용 교사가 파면당한 사건이다. 진 교사는 2년 간의 투쟁 끝에 지난 2004년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결정으로 복직됐다.
사학 비리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상문고 사건이다. 당시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라고 불릴 정도였다. 상문고 사건은 이 학교 교사들이 친인척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각종 비리들을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찬조금 착복, 과학 기자재 및 도서 위장 구입, 수학여행 여행사·졸업앨범·체육복 업체와 결탁하여 뇌물 수수, 없는 교내 행사를 있는 것처럼 위장해 행사비 착복 등 온갖 비리가 줄지어 터져 나왔다. 결국 수백 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이 학교 상춘식 교장이 구속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지난 1999년, 이우자(상춘식 전 교장의 부인) 씨가 현행법 상 하자가 없다며 다시 학교 복귀를 시도하면서 2차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과 교사들의 끈질긴 싸움 끝에 관선이사 파견으로 사건은 매듭지어졌지만, 2년여의 지리한 싸움 끝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중도에 떠나야 했다.
사학 비리에 맞서는 투쟁이 1990년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을 찾아 보면 1987년 파주여자종합고등학교에서 사학 비리와 재단의 횡포에 맞서 학생·교사가 7월 1일부터 3일까지 학교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교 측에서는 시위를 진압하면서 각목과 가죽혁대를 휘둘렀다.
특히 시위가 진행되면서 일부 여학생들이 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몰고 왔다. 이어서 '폭력교사, 성폭행 교사의 처벌과 비리 이사진 퇴진' 등을 요구하는 농성이 5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파주여종고 농성은 학교 내 성폭력에 대항한 최초의 싸움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2005년 말, 사학법 개정은 이런 수많은 싸움들이 모여 낳은 결과에 다름 아니다. 물론 당시 국회를 통과한 사학법 개정안은 아직 여러모로 미흡하다. 그러나 이 개정안에 담긴 개방형 이사제와 친인척 이사 선임 제한, 비리 당사자 학교복귀 금지 등의 내용은 그동안 수많은 학생과 교사의 희생 끝에 폭로된 사학의 횡포를 거울삼은 것이다. 그런데 사학들, 그들을 옹호하는 한나라당은 이런 내용들을 다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지난 긴 세월 동안의 싸움이 일궈진 작은 진보를 허물려는 움직임인 셈이다.
"청소년 시절 불의를 참는다면, 어른 돼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사립학교는 외부에서 통제가 불가능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 대한 인권침해나 억압이 쉽게 이뤄진다. 또 비민주적 학교 운영과 비리 역시 학교의 '재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돼 왔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들이 공론화될 수 있었던 것은 개별 학교들의 사례들이 제각기 드러나면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옳은 것'을 가르쳐야 할 학교가 비리와 불의로 얼룩진 공간이 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던 학생과 교사들의 끈질긴 투쟁이 있었다.
1990년대 초, 고등학교의 비리를 다룬 학생소식지인 <감초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김진숙 씨는 학생들이 학교 내 비리에 맞서는 투쟁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 시절은 정서적으로 예민하기도 하고 정의롭고 순수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우에도 잘못된 학교의 모습을 보며 많이 갈등했던 것 같다. 꾹 참고 모른 척하며 버티고 그냥 졸업하려는 생각도 있었고 학교와 선생님이 너무나 크고 거대하게 느껴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 지금 참는다면 어른이 돼서도 힘없이 순응하며 살아갈 것만 같아서 나서게 됐다. (…) 흔히 나이가 어려서 사리판단을 감정에 치우쳐서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옳고 그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청소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 물론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이 나서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 어른들의 더러운 모습과 이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너무 일찍 목격하게 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픈 점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학창시절 불의와 맞서서 싸웠던 것이 인생의 힘이 된 것처럼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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