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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부터 온 시네마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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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부터 온 시네마레터

[특집] <아포칼립토>에서 <향수>, <블러드 다이아몬드>

(1) 뉴욕까지 오는 길은 13시간 가량되는, 이코노미 좌석의 고된 비행길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정작 그 시간을 다 돌파하고 나서 JFK 공항에서의 까다로운 입국심사 때문에 진이 빠진다. 입국심사 데스크까지의 긴 행렬, 마치 무슨 난민들 대하듯 하는 공항 씨큐어리티 직원들, 죄인들마냥 왼손 지장찍고 오른 손 지장찍고 카메라 보고 풀썩하는 표정의 썪은 미소로 사진찍고, 그러면서도 그래 니들 나라 들어가는 게 황송해서 죽겠다 하는 태도로 공항을 빠져 나가야만 할 때의 그 짜증남 등등, 미국은 정말 오가기가 힘이 드는 나라다. 어쨌든 그 과정을 거쳐 1년 반만에 딸과 만났다. JFK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춥기로 유명한 뉴욕에 겨울비가 내리는 것도 십수년만에 처음있는 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흠 그렇군. 지구온난화군. 곧 빙하물이 흘러오겠군. 그럼 이곳이 바짝 언다는 얘기네? 그래서 생각했다. <투모로우>짝 나지말고 빨리 워싱톤으로 가자고.
JFK공항 (영화 '터미널' 중에서) ⓒ프레시안무비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12시간만에 다시 워싱턴으로 떠났던 건 이런저런 이유에서였다. 지구 온난화니, <투모로우>니 하는 건 다 거짓말이고 사실은 뉴욕이 다소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이번엔 좀 다른 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링컨기념관이니 워싱턴기념탑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미국을 여행해 본 사람들이라면 여기 하이웨이는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가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뉴욕에서 워싱턴까지는 남서쪽 방향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남쪽 길과 서쪽 길을 택해서 가면 된다. 95 S(south)를 타고 가다가 495 W(west)를 타고 가면 된다는 얘긴데 뉴저지와 볼티모어, 메린랜드 등 중간 경유지에서의 표지판을 잘 보면서 운전하면 된다. 이번 워싱턴 목적지는 95 S와 495 W말고 66 W, 하나 더를 타야 했다. 근데 그게 문제였다. 워싱턴 근교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한창 66 W를 타고 가면서 55 B 엑시트(Exit)로 나가기만 하면 5시간의 운전을 쉴 수 있는 최종 목적지였다. 표지판들이 하나씩 눈앞을 지나갔다. 57 엑시트, 56 엑시트, 그리고 나선 54 엑시트! 정말 유령처럼 55 엑시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길을 잘못들었는지, 아니면 아차 하는 순간에 55번을 놓쳤는지, 어쨌든 55번을 찾기 위해서는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한참을 올라와야 할 판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램프 길을 한번 놓치면 그 길로 다시 올라올 때까지 얼마나 힘든 일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등골에 땀이 다 날 정도니까. 국내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던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영화 <엘리자베스타운>은 이번에 내가 여행한 뉴욕~워싱턴 하이웨이에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에서도 클레어(커스티 던스트)가 가르쳐 주는 엘리자베스타운까지의 길을, 드류(올란도 블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정작 나가야 할 엑시트를 휙 지나치고 만다.
엘리자베스타운 ⓒ프레시안무비
영화속 드류나 실제의 내가 그런 것처럼 고속도로 엑시트든 인생의 출구도 아차 하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남들이 저 길로 꼭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괜찮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우린 항상 그걸 귓잔등으로 흘려 듣고 있다가 정작 나가야 할 때는 출구를 휙휙 지나치기 일쑤다. 그리고나서는 뼈저리게 후회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좋은 얘긴데, 사람들이 <엘리자베스타운>에 왜 박한 점수를 줬을까. 그건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뭔가를 휙휙 지나치며 보고 있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 돌아가면 <엘리자베스타운>을 다시 보기를 권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문이다. (2) 오후 4시반이면 주변이 완전히 깜깜해지는 동계 뉴욕에서의 열흘은 거의 겨울잠자는 곰 수준이었다. 마늘만 계산해서 잘 먹으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판이었을 정도다. 이게 아마도 백수의 노릇이지 싶었다. 먹고, 자고, 또 자고, 먹고. 그러다 한 일주일 가까이 됐을 때쯤 극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극장에 나가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에그 참, 누가 그 직업이 아니랄까봐,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포칼립토 ⓒ프레시안무비
뉴욕에 와서 꼭 보고싶었던 영화는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였다. 그리스어로 '새로운 시작'이란 뜻이라지 아마. 그렇다면 이거이 지금 내게 딱 맞는 영화가 아니겠냐 싶었다,기 보다는 제작단계부터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화였던데다 멜 깁슨이 이번에도 '문제적 작품'을 냈겠냐 싶어서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할 요량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머릿 속에 떠오른 분명한 생각 한 가지는 <아포칼립토>가 국내에서 상영되면 극장 안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영화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모양새였다. 영화속, 마야 부족의 인간들 몸은 순식간에 찢겨지고, 으깨지고, 잘려진다. 멜 깁슨은 요즘 왜 이렇게 폭력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멜 깁슨은 왜 15세기 남미 원시림 야만의 시대로 돌아간 것일까였다.(물론 마야족은 고색창연한 문명을 꽃피웠지만 현대 문명의 이기들을 기준으로 볼 때 '야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오해없기를 바란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때의 야만적 폭력의 실체나 지금 미국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세계 폭력의 정체가 사실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라는 문제의식때문이 아니었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제 멜 깁슨을 더 이상 문제아 감독이라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그는 분명 '문제적' 감독으로 등극했다. <아포칼립토>가 그래도 멀티플렉스 여기저기서 상영중이었다면 톰 티크베어 감독의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넓디 넓은 뉴욕의 딱 두군데 극장에서만 상영중이었다. 덕분에 맨하탄을 나갔다. <향수>를 상영한 링컨센터 주변의 링컨플라자 시네마는 주로 비상업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그러니 결국 뉴욕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아무리 전세계 몇천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한들, 18세기 유럽의 음울하면서도 화려한 색채감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한들, 대중관객은 시큰둥한 것이다. 극단적 탐미주의를 추구한 한 예술가의 삶의 이야기에 대해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지금 그딴 게 왜 필요한데 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향수>는 마치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나 걸려 있을 법한 고야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자극적이고, 매혹적이며, 음울하고 불온한 느낌을 줬다. 이 영화가 국내에도 수입됐을까? 과연 제대로 개봉이 되기나 할까.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집단 난교의 장면을 마케팅에 내세우면 어떻게 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한숨이 나온 건 그때문이다.
조금 무리한다 싶으면서도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블러드 다이아몬드>였다. 그레그 캠벨의 저서 '다이아몬드 잔혹사'가 모태가 된 이 영화는 그러나,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연출에서 조금 헤맨 감을 줬다. 잔혹사의 사회상으로 좀 더 영화를 보내든지 아니면 디카프리오의 영웅담 혹은 디카프리오와 제니퍼 코넬리의 비극적 로맨스를 더 보여주든지 했어야 옳았다. 의미도 2% 부족했고 재미와 울림도 2% 부족했다. 한국에 상륙하면 대중적으로 큰 파장을 몰아가기가 어려울 듯 싶었다. <아포칼립토> 등의 얘기로 공연히 무게를 잡았지만 뉴욕와서 찔금거리며 본 영화는 이곳의 케이블TV '오! 옥시즌'에서 방영한 <왓 어 걸 원츠>였다. 이 진부한 드라마를 보고 왜 훌쩍거렸냐고? 17살난 미국 소녀가 아빠를 찾아 영국으로 온다는 얘긴데, 난 지금 15살난 딸을 뉴욕에 두고 떠나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때론 진부한 신파가 먹히는 법이다. 뉴욕이나 서울이나 그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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